누가 보면 참 정신나간 소리인 줄 알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단 글로 정리하는게 나을 것 같아서 대충 끄적여봄


고등학생 때, 나랑 항상 놀아주던 여자애가 하나 있었음. 서로 취미도 잘 맞았고, 관심사도 비슷했고, 성격도 좋아서 굉장히 잘 어울렸었음.


당시 나는 학교에서 소위 아싸에 속하는 그런 사람이었고,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잘 대처도 못했음.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에 대해 너무나도 미숙했지. 결국 졸업할 때까지 친구를 단 하나도 만들지 못했음.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는 걔랑 지내는 게 마치 도피처 비슷한 감각이 아니었나 싶어.


그렇게 방과후에 맨날 같이 어울리면서, 2년 내지 3년 동안 지내다 보니까, 어느새 내 마음에 걔가 굉장히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더라. 여느 소설에 나올 법한 청춘 로맨스물 전개라고 해야 할까, 참 어색하지만 그게 “좋아한다”라는 감정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음.


그렇게 20살이 되고, 대학생 1학년 여름방학 때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서 그녀한테 고백했고, 의외로 쿨하게 받아들여주더라. 나 혼자만 짝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자폭에 가까운 식으로 질렀던 건데 ㅋㅋ


그래서 첫 사랑에 빠진 소년은 어떤 느낌이었냐고? 그저 옆에 있는 것 만으로도 즐거웠기 때문에, 뭘 많이 바라지도 않았음. 심장이 박동칠때마다, 그동안 힘들었던 것들, 그동안 아팠던 기억들이 도트힐(?) 식으로 조금씩 치유되는 기분이었음. 막 하늘을 떠다닐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단 한번도 맛 본 적 없는 기분이 계속 드는 게 참 신기했음.


하지만 그런 기쁨은 얼마 못 갔음. 뭐라고 해야 할까, 준비되지 않은 연애는 생각보다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야 할까?


인간관계에 너무나도 미숙한 내가, 여자친구가 생긴다고 해서 갑자기 크게 나아질 턱이 없다는 걸, 그 때 당시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음. 눈을 가려버렸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상정하지도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많은 실수를 했음. 그때마다 괜찮다고 다독여주기는 했는데, 그쪽에서도 상당히 많이 참지 않았을까.


물론 그 당시 나는 수능 박살나서 (평균 7등급) 당시 자존감이 거의 바닥을 기고 있었고, 동시에 찾아온 현자타임과 더불어 삶의 의욕을 절반쯤 잃어버리고 뭘 해야 할지 방황하고 있었고, 여자친구 쪽도 가정에 일이 있어서 그쪽에 상당히 민감한 상태였긴 했는데,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건 다 변명이지.


그 해 겨울방학 즈음, 나는 그녀한테 엄청난 말실수를 했고, 그게 곧바로 마지막 만남이 되었음. 얼마 안 지나서 문자로 헤어지자고 왔고, 그 뒤로는... 죽음의 5단계를 밟았지.


처음에는? 부정.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내 눈이 이상한 게 틀림없다... 하고 전화를 걸어 봤지만, 당연히 차단.


그 다음? 분노.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데, 그냥 싫으면 싫다고 면전에다가 욕을 좀 박던지, 갑자기 대뜸 이러면 어쩌라는 거냐.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다음? 협상.

다시 한 번만 만날 수만 있으면, 뭐든지 하겠다. 내가 잘못하지 않은 거라도, 일단 잘못했다고 빌테니까...


그 다음? 우울.

아... 그냥 답이 없구나. 나도, 너도. 이건 처음부터 잘못된 거였구나. 그냥 내가... 내가 머저리인 거구나.


그때부터 내 시간은 완전히 멈춰버렸음.

더 이상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를 하지 않았고, 있던 사람한테도 연락을 아예 돌리지도 않았고, 그때서부터 제대로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함.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나락으로 계속 추락하는 기분이었고, 도트힐 반전 개념이 아니라 그냥 치명타로 찍히는 출혈피해마냥 아예 심장이 아플 정도로 고통스러웠음. 숨도 잘 못 쉬었고...


처음에는 화가 났었는데, 잘 생각해보니까 내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어떻게든 변명할 껀덕지 자체가 없다는 걸 깨달은 이후부터... 매 순간이 그냥 힘들었음. 스스로 도피도 못 하고, 어쩔 수 없었던 게 단 하나도 없었단 사실 자체가 내 몸을 옥죄는 족쇄 그 자체가 되어서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지.



...그래서 마지막 단계인 수용은 어디로 갔냐고?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면서 알려줄게.



이런 고충을 사람들에게 털어놓으면, 크게 두 가지 의견이 나옴.


1.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고, 더 좋은 사람 만나면 금방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거야.

2. 시간이 해결해 줄 것. 지금 이 감정도, 몇 년이 지나면 하나의 기억으로 남게 되겠지.


일단 아쉽게도 난 두 가지 경우 모두 해결책이 되지 못했음.


사람은 사람으로 잊으라고 하는데... 무슨 저주라도 걸린 건지, 아무리 성격이 좋은 사람을 만나도, 아무리 더 잘 맞는 사람을 만나도, 아무리 괜찮은 사람을 만나도, 오히려 더 잊지 못하겠더라. 기억에도 폭력이 있다면 이런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하염없이 시간이 해결해주기만을 바라고 나를 거의 내다던지다시피 하면서 살고 있었음. 학교를 휴학하면서 회사도 다니고, 공부만 주구장창 하거나, 아니면 밤새서 프로젝트만 하거나...


그렇게 6년이 지나갔고, 분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 우울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걸 계속 생각한다는 후회로 남아서 내 곁을 떠나지 않았어.


그래도 그 감정 자체는 남지 않았네.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시간이 해결해주는구나 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2024년 1월 1일, 새해를 맞이해서 기념 축하를 해야 할 그런 순간에, 잠을 자고 있었고...


꿈에서 그녀를 봤음.



12월에 워낙 바빠서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런 식으로 등장하는 게 상당히 개연성이 없긴 했음. 애초에 꿈에서 개연성을 따지는 게 이상하긴  한데, 뭔가 굉장히 기묘했어.


보통 꿈이라고 한다면 내가 막 통제할 수 있는게 아니잖아? 하늘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면 내가 갑자기 꿈을 조작해 윙슈트를 펼쳐서 안전하게 착지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지. 오히려 떨어지다가 식은땀과 함께 잠에서 깨지.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음. 내 의지대로 말할 수 있었고,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었음. 좀 의아하다 싶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나한테 말을 거는 거야.


“안녕. 그동안 잘 지냈고?”


그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음. 생각만으로는 100분 토론을 할 수 있었는데, 그냥, 목에서 아무런 말도 튀어나오지 않더라.


그러고선 그냥, 눈물이 흘러나오더라. 그리움? 죄책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아오르면서, 그토록 하고 싶었던 한 마디를 꺼냈음.


“미안해. 내가 못나서... 미안해.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미안해.”


그리고 그렇게 그저 하염없이 울고 있었는데, 그녀가 나를 안아주더라.




그러고 잠에서 깼음.

막 베개가 눈물 범벅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진 않았더라. 그와 동시에 몇 가지 감정이 뒤따라왔는데,


먼저 황당함. 미안할 수도 있지. 사과할 수도 있지. 그란데 왜 그걸 꿈에서 하고 난리임?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는데...? 뭐지...?

다음으로 후련함. 비록 꿈에서라고 할 지언정, 그 동안, 6년 동안 마음 한 구석에 모아놓은 한 마디를 “용기 있게” 꺼냈다는 사실이, 황당함을 넘어서고 있었음.

다음으로 텁텁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해소된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음. 생각이 더 복잡해지기만 하고, 이리저리 섥힌 결과물은 내가 나중에 진짜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꿈에서 했던 대로 말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과 약간의 자신감이었고...


마지막으로는, 조만간 꿈의 내용이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근거 없는 기묘한 확신. 꿈 내용을 정확하게,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고, 내 경험 상 그동안 이런 일이 벌어지면 늦어도 그 해 안에는 무조건 꿈과 연관된 일이 생겼음.


한 편에서는 이걸 수용의 단계라고 일컫을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직 잘 모르겠어. 과학적으로는 아무런 근거도 없고, 막말로 “너의 심리가 강하게 반영된 결과물” 이라고 일갈해도 할 말이 없지만...


모르겠어.


만약 진짜로 꿈에서 했던 말을 현실에서 직접 그녀한테 해줄 수 있다고 하면, 내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걸까?


어쩌면 그냥 단순히 내 미련일 뿐일 수도 있는데.

그냥,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그걸 덜어내려는 내 심리적 방어 기재에 불과하지 않을까?


상대가 사과를 받아줄 마음이 없는데 사과하는 건, 단순히 내 죄책감을 덜어내겠다는 이기적인 마인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


그냥 개꿈 아니었을까.





복잡하기만 한 마음을 안고서 새해를 보내게 될 나한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