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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기에 걸려 자취방에서 외롭게 누워 있던 어느 오후. 띵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딱히 올 사람도 없고, 택배를 주문한 기억도 없었다.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나는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머리가 핑 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콧물을 훌쩍이며 나는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평소보다 배는 무겁게 느껴지는 문을 힘없이 열자, 의외의 인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정우야! 괜찮아?"

 "어, 예슬아. 웬일이야?"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잠옷 차림에 콧물을 질질 흘리는 몰골로 그녀를 마주한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방의 청결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아파서 나중에 필기를 보여달라고만 연락했을 뿐인데, 설마 이렇게 직접 찾아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걱정돼서 왔지! 약이랑 죽 사왔어. 어서 누워!"

 "자, 잠깐…!"


 그녀는 신발을 대충 벗어던진 뒤 작은 체구로 나를 침대로 떠밀었다. 나는 그녀의 미약한 완력도 버티지 못하고 침대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그녀가 짐을 푸는 것을 바라보았다.


 "야, 이정우! 내가 인스턴트 그만 먹으라고 했지!"


 그녀가 내 책상에 놓인 수많은 종이 용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내 방과 책상은 쓰레기로 가득해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은 뒤 분주하게 내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야, 콜록, 그거 내가 나중에 할게."

 "넌 가만히 누워 있어!"


 그녀가 갑자기 내게 다가와 손을 내 이마에 짚었다. 부드럽고 따스했다. 어쩐지 얼굴이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반대쪽 손을 자신의 이마에 짚더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열 좀 봐. 밥은 먹었어?"

 "응."

 "뭐 먹었는데?"

 "…주스."

 "안 먹었네! 기다려, 죽 데워 줄게. 내가 밥 잘 챙겨 먹으라고 했지!"


 그녀는 창문을 살짝 연 뒤 가방에서 사각형 용기를 꺼냈다. 편의점에서 파는 인스턴트 죽이 아니라, 값이 꽤 나가는 프랜차이즈 죽이었다. 그녀는 찬장에서 국자를 꺼내 죽을 접시에 덜기 시작했다.


 "야, 뭐 그런 걸, 콜록, 사 왔어…."

 "기침도 심하네. 죽 먹고 나서 약 먹자. 빈 속에 약 먹으면 안 돼."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어조로 죽을 담은 그릇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창문 틈으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어둡고 좁고 음침했던 자취방이 그녀의 활기로 다채로워진 느낌이 들었다.


 "설거지도 미리미리 좀 해 놓지. 원래 이렇게 밀리면 더 하기 싫어져."


 그녀는 더러운 그릇으로 가득한 싱크대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마치 엄마가 나한테 잔소리를 하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귀찮다기보다는, 이상하게 정겨웠다.


 "다 됐다! 어서 먹어."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와 펄펄 김이 나는 죽을 쟁반 위에 담아 왔다. 먹음직스러운 쇠고기죽 옆에는 김치, 장조림, 그리고 양념장도 있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어. 나 그렇게, 쿨럭, 안 아파."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몸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녀는 작은 손으로 내 가슴을 지긋이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무리하지 마. 그냥 내가 먹여 줄게."

 "쿨럭 쿨럭!"


 아파서 나온 기침이 아니었다. 나는 당혹스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슬이는 숟가락으로 죽을 한 숟갈 퍼서 후후 불기 시작했다. 그녀의 숨결이 내 귀를 간질였다.


 "자, 아 해."


 그녀가 숟가락을 내밀었다. 뭔가 굉장히 수치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나는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맞게 따뜻해진 죽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부드러운 밥알의 식감이 좋았다.


 "김치도 올려 줄까?"

 "…응."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의 그녀와는 달리 내 가슴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아파서 그런가, 유난히 그녀가 평소보다 더 예쁘게 보였다. 나는 자리에 누운 채로 조용히 그녀가 주는 죽을 받아 먹었다.


 "더 먹을래?"

 "아니, 괜찮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릇을 모두 치웠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컵에 물을 따라 약과 함께 가져왔다. 나는 그녀가 건넨 약을 물과 함께 삼켰다. 차가운 액체가 부은 목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고생했어. 이제 한숨 자."

 "알았어. 진짜 고마워. 너도 이제 가."

 "너 잘 자는지 보고 갈게."

 "뭐, 쿨럭, 라고?"


 오늘따라 그녀의 행동은 지나치게 파격적이었다. 아무리 내가 아프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호의를 받을 줄은 몰랐다. 내 가슴 속에서 감동의 물결이 요동쳤다.


 "이렇게까지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이제 괜찮아. 어서 집에 가."

 "내가 여기 있는 게 싫어?"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럼 좀만 더 여기 있을게. 간단하게 청소랑 설거지만 하고 갈 거야."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약 기운 때문인지, 눈꺼풀이 견딜 수 없이 무거웠다. 부스럭대는 청소 소리를 들으며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문 앞까지 와서도 초인종을 누를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괜히 자는 데에 방해만 될 것 같았다.


 생각보다 많이 아픈 모양이었다. 어질러진 방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껏 혼자서 사느라 힘들어했던 흔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안쓰러웠다.


 죽을 먹여줄 땐 마치 여자친구라도 된 것 같았다. 기뻤다. 티를 내는 것은 부끄러워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그가 죽을 한 그릇 다 비우고 나서야, 나는 마침내 돌아서서 작게 미소지을 수 있었다.


 수건을 찬물에 적셔 그의 이마에 올려 주었다.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또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금은 거칠어 보이는 그 볼에 살짝 입맞춤을 하는 내 모습이 멋대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망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청소를 시작했다. 적어도 집은 깔끔하게 치우고 떠날 예정이었다.


 이젠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남들이 보기에 조금 과하다고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내가 하고 싶으니까, 내가 돕고 싶으니까 그렇게 하기로 했다.

 왜냐고? 그야 당연히….


 "정우야…."


 하던 일을 멈추고 다시 그가 누운 침대에 살포시 앉았다.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크고 멋져서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온한 그의 표정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역시 자신의 감정은 틀림없었다.


 "좋아해."


 지금은 용기가 부족해서 네가 잠들었을 때밖에 말할 수 없지만, 언젠가 꼭 제대로 말할게.


 "아프지 마…."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픈데도 잔소리밖에 하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솔직하게 마음을 전할 수 없는 것이 미안했다. 나는 조용히 손수건으로 그의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


 "으…."


 가벼운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생각보다 몸이 상쾌했다. 미지근해진 수건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열은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예슬아?"


 그녀의 모습은 이미 없었다. 대신 몰라보게 깨끗해진 내 방이 있었다. 마치 새로 이사왔을 때의 그 모습같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내 방을 둘러보았다. 침대 옆에 작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냉장고에 넣어놓은 죽 꼭 먹고, 책상에 약 올려놨으니까 잘 챙겨 먹어! 무슨 일 있으면 카톡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 그녀다운 상냥함이었다.


 "미안하다, 예슬아."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금껏 간신히 참아왔다. 그녀에게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라는 마음으로 애써 감정을 숨겼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내 마음이 너무 커지고 말았다.


 "고마워."


 그녀의 글씨체에서 그녀의 웃는 모습이 보였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는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