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담.서-


“홍”


사뿐사뿐 보도블럭을 디디는 발.


“담”


나풀거리며 춤추는 몸 주변을 휘날리는 손.


“서”


입가에서 떠나지 않은 웃음.

담서의 이름을 한 음절씩 소리내어 읽을 때마다 오늘 벌어진 일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떠올리게된다. 입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낮의 대화가 다시 들리는 것만 같다.

1학년때는 말을 걸 생각도 못했는데, 2학년이 되자마자 담서가 자기 집에 오겠다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자신의 그림에 관심도 보였다. 그리고 게다가 담서 자신의 그림도 보여준다고 한다. 두 사람만의 비밀을 공유하는 것 같은 행위에 현지는 벌써부터 발걸음 못지않게 심장이 쿵쿵대고 있었다.

3월이지만 추운 날씨가 밀어내듯, 해는 재빨리 모습을 감춘다. 늦은 노을이 뉘엿거리는 아파트 단지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올라간다.


“나이트 라이크 디스 리드 투…러브 라이크 아워스…유 라이트 더 스파크 인 마이 본파이어 하트….”


현지가 집에 들어가지만, 사람이 없는 것처럼 캄캄하다. 현관 옆의 닫힌 방 문 틈새의 빛과 그 안에서 들리는 기이한 노랫소리가 사람이 있긴 하단 걸 알려주고 있었다.


“나 왔어.”


평소의 현지는 그가 방에서 뭘 하던 그러려니 하지만 오늘은 굳이 닫힌 방 문을 열고 인사한다. 현지는 잘 모르는 팝송을 흥얼거리는 남성은 흘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기만한다. 보통 노래를 흥얼거릴 때는 작업이 마무리단계라는 것을 아는 현지는 가방을 내려놓고 남성의 침대에 드러눕는다.


“형, 내일 어디 안나가?”

“에브리바디 원츠 어 플레임…데이 돈 원츠 투 겟 번…웰, 투데이 이즈 아워 턴….”


현지가 질문을 하지만, 그의 형은 노래만 부른다. 그나마 고개를 끄덕여주기는 하고 있었다.


“운동 안 가?”

“오전에 갈건데? 왜.”

“나가.”

“왜.”

“내일 집에 친구 오기로 했단 말이야.”

“오라 그래.”


그의 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모니터에 얼굴을 고정하고 자판을 두드린다.

현지의 친구가 오던 친구 아빠가 오던 그에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현지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나마 오늘은 얌전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어느 날처럼 대뜸 소리를 지르는 노래라도 부르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을 것이다.


“누군데. 이도윤?”

“걔가 왜 와.”

“아니면, 그 쪼끄만 여자애?”

“누구 말하는거야…하여튼 나가.”

“싫은데?”

“아. 그럼 조용히라도 해.”

“봐서.”


담서가 오는 것은 좋은데, 전 날부터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한다.

일단 형은 내버려두기로 한 현지는 가방을 집어넣어두고 밀린 집안 일들을 치우기 시작한다. 평소에도 집안일은 본인이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나 손 닿지 않는 곳을 밀고 닦는 것은 물론, 빨래 바구니도 비워두고 마른 빨래는 개어서 미리 정리 해둔다.

거실과 거실에서 보일만한 곳은 다 정리한 후에야 본인 방으로 들어가선 공책들을 뒤지기 시작한다.


“이거 보여줘도 되나….”


노골적으로 섹스어필을 하는 그림은 아니었지만, 당장 반년, 1년 전 그림들이 남 보여주기 부끄러울 정도로 못 그린것처럼 느껴진다.

못 그린 그림을 보고 실망하진 않을까 하면서도 보여주고 싶단 아이러니한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던 현지는 공책들을 책상에 차곡차곡 쌓아가기 시작한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밝은 회색과 어두운 회색뿐인 공간에도 그나마 생기라는 것이 돈다. 추운 날씨를 위로하듯 하얗다 못해 푸른 햇빛이 내리막길을 비춘다.

무거운 비닐봉지 안에 유리병끼리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볼새라 일찍 집을 나선 담서가 유리병을 편의점에 전달하고 주머니에 천 원 짜리 지폐와 동전을 꾸겨넣는다.

알콜 냄새가 묻은 것 같은 손을 괜히 치마 자락에 비빈다.

현지가 보고싶어졌다.


어제는 집에 가네마네, 그림을 보여주네 마네 떠들었는데 오늘은 둘 다 대화를 피한다. 전 날 서로가 너무 달라붙었다는 걸 실감해서인지, 아니면 지금의 간질간질함을 집에 갈 때까지 아끼고 싶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 다 수업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그것을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다른 애들이 먼저 반을 나갈 때까지 밍기적거리며 가방을 싸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간다.


“갈까?”

“응.”


평소의 담서는 정문으로 나갔지만, 오늘은 현지와 함께 뒷문으로 나가 역으로 걷는다. 자기가 사는 동네도 걷는 시간대가 다르니 이질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평소에도 지하철타고 다니는거야?”

“그렇지. 좀 걷긴 해도 민하구청역에서 타는게 빠르거든. 버스는 시간도 애매하고 빙빙 돌아서 오래걸려.”


지하철 역까지는 걸어서 길어봐야 5분, 대부분 학생들이 학교 근처에서 통학을 하는 것을 생각하면 역까지 오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그다지 사람이 많이 찾는 곳도 아닌 도곡역 플랫폼은 한산한 편이었다.


“어?”

“교통카드 없어?”


개찰구 앞까지 내려오고나서야 담서는 자신이 교통카드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먼저 개찰구를 통과한 현지의 질문에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거 써.”

“아. 고마워.”


이미 개찰구 안으로 들어온 현지는 형이 생활비 용으로 준 체크카드를 담서에게 건네준다. 담서는 현지가 한 것처럼 개찰구에 카드를 찍고 안으로 들어간다.

운 좋게, 어쩌면 운 없게도 두 사람이 내려가자마자 전철이 도착한다. 플랫폼의 벤치에 앉아서 둘의 시간을 즐기고싶었던 현지는 담서보다 한 걸음 앞을 뛰어가며 전철에 올라탄다.


“민하구청역에서 내리는거지?”

“응.”


학교 근처 말고는 달리 갈 일이 없던 담서는 지하철을 탈 일도 거의 없었다. 학교 근처에 도곡역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뒤로는 무슨 역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도곡, 초람, 문화센터, 민하구청. 5분이면 가.”


현지 말처럼 정말 금방 금방 역들을 지나쳐간다.

민하구청역에서 내려서 몇 분 걸었을까?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보인다. 보통 학생들이 놀러 나가는 민하역 근처의 번화가보다는 작지만,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며 상가들이 인공적이다 싶을만큼 깔끔한 이미지를 준다. 건물 사이에 노을이 비춰지는 모습이 예쁘다.


“아파트 단지 크네.”

“그치? 나도 처음 왔을땐 신기했어.”

“이사 온거야?”

“초등학교까지는 시골에서 다녔고 중학생 되면서.”


담서의 눈에 현지는 세련된 도련님같은 이미지인데, 시골에서 왔다고 하니 어쩐지 매칭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러면 부모님도 집에 계셔?”


25층까지 올라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담서가 궁금한 것들을 물어본다. 담서의 관심이 마냥 좋았던 현지는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모르고 재잘대기 시작한다.


“아니, 부모님은 안동에 있어. 나는 형이랑 둘이 살고.”

“왜?”

“원래는 할머니랑 같이 살았거든, 그런데 나 초등학교 졸업할 때쯤에 할머니가 몸이 안좋아져서 돌아가시면 다 올라오려해서 중학교 입학 때문에 나 먼저 올라왔지. 형은 그 전부터 살고있었고. 그런데 할머니가 갑자기 건강해지시는 바람에…그렇게 됐어.”

“지금도?”

“엄청 건강하셔. 맨날 산 꼭대기에 있는 법당 왔다갔다해.”

“오빠분은?”


아. 올 것이 왔구나. 현지는 잠시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는다. 마치 일부러 보여주려는 듯한 앙증맞은 리액션에 담서의 눈동자가 조금 뜨인다.


“미리 말하는데, 우리 형 엄청 이상해.”

“어?”

“나쁜 인간은 아닌데, 하여튼 엄청 이상해.”

“뭐 하시는 분인데?”

“웹소설 쓰고, 영화 미튜브 각본 쓰는 일. 보통은 집에만 있어.”

“그렇구나.”


담서는 개성적으로 생긴 현지를 보며 그의 오빠가 어떤 사람일지 상상한다. 남자애지만 발랄한 소녀같은 현지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나름 추측을 해본다.

직업을 가졌다고 했으니 나이차는 조금 더 있을테고, 그러면 뭔가 성숙한 여성같은 느낌일까? 아니면 현지와 비슷하지만 더 발랄한 아이돌같은 느낌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아.”

“응?”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잠깐 망상에 빠진 담서는 현지가 남성이라는 걸 다시 떠올린다. 

따뜻한 빛이 가득한 엘리베이터가 6층에 멈춘다. 먼저 내린 현지가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들어와.”


문 앞에서 잠깐 머뭇거리던 담서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담서는 그제서야 현관 안으로 들어오며 작게 인사한다.


“실례합니다.”

“뭐야?”


현관 옆에 달린 방 문에서 들리는 짧은 의문형의 목소리. 담서와 키가 비슷한 남성이 방에서 고개를 내민다.


“안녕하세요.”

“어.”


여자애치고는 자신과 맞먹을 정도의 장신인 담서가 흔치 않은 저음의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그도 순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눈썹을 치켜올린다.


“야 잠깐만.”

“아. 왜?…담서야 잠깐만 앉아있어.”

“응.”


담서에게 쇼파를 내어주고는 현지는 자신에게 들어오라는 손가락질을 하는 형의 방으로 들어간다. 문을 닫자 벌써부터 놀려먹으려는 표정에 짜증이 치솟는다.


“야. 여자애라고는 안했잖아.”

“남자애라고도 안했어.”


그러고는 또 웃긴 표정을 짓는다.


“야! 너 이름이 뭐냐?”

“네?”


현지가 말릴 새도 없이 방 밖으로 튀어나간 형이 담서에게 말을 건다. 현지는 마음 같아서는 그냥 발로 걷어차버리고 싶었지만, 담서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홍담서입니다.”

“으흐, 나는 채중지라고 하고…야. 이따 뭐라도 먹여서 보내라.”

“나가게?”


중지는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현지에게 던진다. 그러고는 곧장 방에 널부러진 잠바 하나를 꺼내입고는 나갈 채비를 한다.

분명 둘이 있으라고 자리를 마련해주는건데도 저렇게 꼴보기 싫을 수가 있을까? 현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보낸다.


“재밌으신 분이네.”

“제정신이 아닌거지….”


몇 마디 대화에도 몰아치는 개성적인 성격을 보곤 담서가 웃으며 대꾸하자 현지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젓는다.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 담서가 그제서야 가방에서 자신의 공책을 꺼낸다. 그 모습을 본 현지도 자기 방에서 사용감이 가득한 공책들을 들고 나온다.


“소설 쓴다고 했지?”

“응. 인기는 없지만.”

“그래도, 어제 잠깐 봤을때 캐릭터라던가 세계관이라던가 되게 자세하더라고.”

“그냥 시간이 많으니까 그런거지 뭐…공책 봐도 돼?”


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서로의 공책을 교환한다. 쇼파에 앉아있는 담서와 맞은 편 바닥에 놓인 책상에 앉아있는 현지가 서로의 공책을 펼친다.

담서의 공책 첫 장을 바라본 현지는 공책을 다시 덮고 담서를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공책을 펼친다.


“이거 진짜 네가 그린거야?”

“응.”


큰 눈을 더 크게 뜬 현지의 표정에 담서는 뭐가 이상하냐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한 장을 넘기고 다시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자신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섬세하고 아름다운 곡선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정말로 자신의 손을 간지럽히는 것만 같은 머리카락의 움직임이며 옷의 표현, 그리고 감정이 담겨져있는 눈과 표정 모두 그냥 낙서집이 아니라 자신이 돈을 주고 화집을 산 건지 의심케할 수준이었다.


“너 엄청 잘그린다.”

“그래?”

“아니, 진짜로….”


담서는 현지의 놀란 반응이 상투적인 칭찬정도라고 생각하는 듯 별다른 반응 없이 새초롬한 미소만 띄운다.


“그, 안 이상해?”

“어? 아냐. 재밌어…캐릭터마다 이름이라던가 성격이라던가 배경같은 걸 보는 건 처음이거든.”


현지는 담서의 그림에 비하면 반의 반도 못되는 자신의 그림이 하찮게 보일까 걱정한다. 담서의 차분한 목소리와 표정을 보면 그녀의 말이 진심처럼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안감이 남는다.


“소설도 여기 있는 캐릭터로 쓰는거야?”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어. 일단 그리고나서 설정은 생각해보고 만드는거라.”

“소설도 봐도 돼?”

“어? 상관은 없는데….”


그림과 글을 보여주려할때마다 맨몸이 되는 부끄러운 느낌이 들지만, 그러면서도 담서에게 보여주고싶다는 정 반대의 생각이 현지의 손을 움직인다.

핸드폰을 켠 현지가 자신이 쓰고 업로드한 글을 담서에게 보여준다. 그다지 인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현지는 건네면서도 가슴이 불안해진다.


“얘가 좋아.”

“누구?”

“시드르. 말투가 귀엽잖아.”


현지의 걱정과는 다르게 담서는 자세도 조금씩 풀어가며 소설을 읽는다. 혼자 중얼거리기도하고, 현지에게 뭔가를 묻기도 한다. 현지는 평소와 비슷한 분위기면서도 가벼워진 담서의 모습에 마음이 놓인듯 이야기를 이어간다.


“저녁 뭐 먹을래?”

“어? 안 사줘도 괜찮은데.”

“아냐. 안 사면 또 나한테 난리쳐…이상한 인간이라고 했잖아.”

“그냥 현지 네가 먹고싶은거로 시켜줘.”

“알았어.”


식사를 주문하고, 다시 담서의 그림들을 넘겨가며 모두 보던 현지가 공책을 덮고는 담서가 앉아있는 쇼파 아래로 가서 앉는다.


“계속 여기 있고싶다.”

“응?”


소설을 넘기던 담서의 한 마디에 현지가 빙긋 웃는다. 마음만 같아선 그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너무 속보이는 것 같아 입만 뻐끔거린다.

어제의 걱정 때문에 준비를 한 덕인지 아니면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 것인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담서가 만족한 것 같아 현지의 가슴도 진한 분홍색으로 물든다.

담서의 한 마디가 실현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새벽 1시 14분, 담서는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비가 되어 내리는 내리막길을 우산 없이 걷고 있었다.

비는 서늘한 공기도, 울음소리도 모두 내리막 아래 어둠으로 밀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