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의 비 –

 

시곗바늘의 시침은 토요일로 건너간지 오래였고 밖에 나간 형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담서가 자기 집에 있었다는 사실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주체 못하던 현지는 새벽까지 티비로 평소에는 보지도 않던 러브코미디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 자신도 연애니 여자 친구니 망상하는 건 오버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간질거리는 감각은 어쩔 수 없었다.

여차하면 소파에 드러누워 자자고 마음먹은 현지는 방에서 자기 이불을 꺼내온다.

 

"어?"

 

이불을 덮기 좋게 펼치기 위해 소파에 깔아 놓은 시트를 다듬던 현지의 눈에 볼펜 한 자루가 눈에 들어온다. 틈새 사이에 끼어 있던 볼펜은 자기 것은 아니었고, 그의 형은 필기구를 쓰는 일이 거의 없을뿐더러 방 밖으로 본인의 물건을 갖고 나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담서 건가?"

 

집 안에 볼펜 한 자루 굴러다니는 게 그리 신기한 일이겠냐마는, 현지는 혹시나 담서 거라면 이걸 빌미로 말이라도 한 마디 더 붙일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소파 앞의 책상에 펜을 내려놓는다. 잠깐 머뭇거리던 손은 곧 핸드폰을 들고 담서와의 메신저 창을 켠다.

 

'음. 담서야. 자고 있을 거 아는데 우리 집에 볼펜 두고 간 거 같아. 월요일날 가져다줄게.'

 

다음 날 아침에 보내야 예의라고 생각하면서도, 철없는 흥분감이 현지의 손을 이끈다. 새벽인데 피곤함보단 아직도 흥분감이 그의 정신을 오롯이 지배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머리맡에 던져놓고는 베개를 끌어안고 보다 만 애니메이션을 다시 재생시킨다. 애니메이션의 장면들에 자신과 담서를 대입해 본다. 자기가 생각해도 징그럽다고 느끼면서도 히죽거리는 웃음이 멎질 않는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티비의 음성을 한 칸 더 올려 자기 웃음소리를 묻는다. 웃음소리와 애니메이션의 대사, 그리고 노랫소리.

 

 

"어?"

 

베개를 부여잡은 손의 힘이 세지던 와중에 귀에 들릴 이유 없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OTT 애니메이션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시린의 솔로곡이 깔릴 이유는 없으니, 음악 소리가 들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드러누워 있던 현지는 머리맡을 더듬어 자기 핸드폰을 본다. 시간을 보면 아마도 형이 술 먹고 전화했던가 할 것이다.

 

"담서?"

 

당연히 형인 줄 알고 통화버튼을 누르려던 현지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다. 새벽에 메시지를 넣었다고 기분 나빠졌나? 아니 아직 안 자고 있었나? 받아야 하나? 만약 잘못 건 거라면?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집에 강도가 들었다던가 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거라면? 아니 그러면 119에 연락했을 것이다.

생각은 매듭에 매듭을 이어 점점 늘어나지만, 그동안에도 시린의 노랫소리는 그칠 생각을 않는다. 액정에는 홍담서 라는 세 글자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머뭇거리면 오히려 전화를 안 받는 애 취급받을 수도 있었다.

 

"어. 담서야."

 

일단 받고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누른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는지 걱정하면서도 자세를 고쳐 앉고 티비의 소리를 줄인다.

 

"현지야."

 

당황 다음으로 먹은 감정은 흥분과 기쁨이었는데, 스피커 너머에서 들리는 빗소리와 떨리는 목소리에 현지의 마음도 불안감이 끼이기 시작한다. 밖에 비가 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스피커에서 들리는 빗소리는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밖이야? 무슨 일 있어?"

"응."

"왜?"

 

현지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보지만, 상황을 쉽사리 추측할 수 없다. 이 시간에 밖에 나와서 자신에게 전화할 이유가 있나? 알 턱이 없었다.

 

"혹시 내가 도와줘야 할 일이면...."

"현지야...."

 

그러고는 이내 울음소리가 귀에 들리는 빗소리를 묻어 버린다. 무언가 일이 있다는 것은 직감한 현지가 제 방으로 들어가 나갈 채비를 한다. 택시를 부르던 뭘 하던 해서 상황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어디야? 내가 갈게.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여기...카페 같고...헤이즐넛? 그런 곳인데...."

"헤이즐넛?"

 

프랜차이즈도 아니고,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어렴풋 담서가 학교 근처에 산다는 건 알고 있지만, 학교 근처에서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혹시 헤이즐이야?"

"그런 거 같기도하고...."

 

헤이즐, 현지도 아는 이름이었다. 아니 민곡고등학교 다니는 애들 중에 헤이즐을 아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한참 떨어진 카페였고, 현지의 집 앞의 상가에 꽤 전부터 있던 카페였으니까.

 

"알았어. 바로 갈게. 전화 끊지 말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헤이즐에 담서가 있다면 전철도 다니지 않는 이 새벽에 학교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걸어서는 대략 한 시간 정도의 거리, 빗 속에 올 만한 거리는 절대 아니었다.

스피커 너머로 들리는 거친 숨소리에서 하얀 입김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대충 외투만 걸친 현지는 발에 끼이는 대로 슬리퍼를 신고는 곧장 아파트 단지 밖으로 뛰어나간다. 봄 답지 않게 쏟아지는 빗방울이 가로등 불빛을 튕기며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슬리퍼에 금방 물이 차 미끄럽지만, 5분도 안 되는 거리를 뜀박질한다. 쿵쿵대며 뛰어가는 통에 바짓단은 금방 젖어 버린다. 봄인데도 슬리퍼에 튕기는 비가 차다.

 

"담서야!"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와 스피커의 현지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카페의 차양 아래, 나무 데크에 쪼그리고 앉아 비를 피하고 있던 담서에게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고 싶은데,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피곤해서일까, 몸이 자꾸 떨린다. 다리를 끌어안은 손을 펴보고 가만히 있어 보려하지만 손가락의 떨림은 손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커져간다.

 

"담서야!"

 

이미 문을 닫은 헤이즐 앞까지 뛰어온 현지는 우산을 꼿꼿이 세우고는 허리를 숙여 숨을 몰아쉰다.

 

"뭐야? 무슨 일이야.?"

 

잠시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지만, 상황이 이해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생각했던 것보다 이상했다. 젖다 못해 비에 적셔진 흰 티셔츠는 속살을 비추고 있었고, 옅은 회색이었을 면바지는 물을 잔뜩 먹어 늘어져 있었다. 긴 생머리도 물에서 건져낸 양 제멋대로 엉켜 바닥까지 늘어져 있었다. 핏기가 가신 얼굴은 창백하다못해 입술과 몸이 떨리는 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우산은?"

"없어."

 

현지가 손을 내밀자 담서가 팔을 들어 손을 쥔다.. 찬 비에 얼어가던 몸을 일으키자 마디가 어긋난 인형처럼 통증이 밀려온다. 비틀거리며 카페의 벽을 집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킨 담서의 손이 찬 것을 넘어 식어간다는 것이 느껴진다.

 

"일단 집에 가자."

"그래도, 괜찮아?"

"응. 걱정하지 마."

 

자기보다 키가 15cm는 큰 담서의 등을 감싸 우산을 씌워준다. 담서와 달라붙을 만큼 가까이 밀착했지만, 오후의 흥분이니 설렘이니 하는 감정들은 느껴지지 않는다. 어렴풋하게나마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까지 드는 모습에 현지는 침을 삼킨다. 긴 옷을 입고 있는 자신에게 담서의 맨몸이 닿는 것은 아니지만, 옷 위로 느껴지는 촉감은 사람의 피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이 피부는 이것보다 훨씬 따듯했으니까.

 

"일단...일단 따듯한 물로 씻어. 옷은 내 거 빌려줄게. 그러고 나서...무슨 일 있었는지...."

 

얘기해 달라는 말까지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는다면 자신이 도와줄 수 있을까?

 

"고마워...."

 

핏기 가신 입술을 오물거린 담서가 들릴 듯 말 듯 대답한다. 빗물을 흘리다못해 몸에서 물이 흐르는 것처럼 바닥을 적시며 담서가 욕실로 들어간다. 바닥에 흥건한 물 자국이 그녀가 얼마나 오래 비를 맞고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알 턱이 없던 현지는 주방으로 가 잔을 꺼낸다. 얇은 외투를 뚫고도 한기가 들어오는 바깥의 날씨는 영하권, 그런 곳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한 시간이나 맞았다면, 얼어 죽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냄비에 우유를 데우고 정향과 시나몬을 넣어 끓인다. 자신이 물을 따르면 한참을 마시는 머그잔에 우유를 옮겨담고 핫초코 스틱을 뜯어 풀어낸다. 연한 나무색의 핫초코에 거품이 사라질 때까지 저어 준다. 흰 김이 핫초코의 모습을 가릴 정도로 폴폴 피어오른다.

 

"옷, 앞에 둘게."

"응."

 

남자인데도 체격이 훨씬 작은 자기 옷이 맞을까 싶기는 했지만, 담서가 입은 채로 욕실에 들어간 옷은 잠깐 말린다고 입을 수준이 못 되었다. 그나마 자기 옷 중에 큰 옷 들만 골라 화장실 문 앞에 둔다.

핫초코 잔을 들고 소파로 걸어와 앉는다. 담서가 우리 집에서 샤워하고 있는데, 기분이 착잡하기만 하다. 샤워실의 물소리와 빗소리가 섞여 우울한 협주곡을 만든다. 담서의 떨리는 몸, 창백한 입술, 초췌하고 생기 없던 얼굴이 떠오른다.

 

욕실의 문이 열리고 구름 같은 수증기 속에서 샤워한 담서의 몸에 그래도 생기가 돌아온 듯 조금 전보다는 개운해 보이는 모습이 현지의 마음을 놓는다. 현지 자신이 입으면 헐렁할 정도로 큰 스타일의 옷이 담서가 입자 어디는 꼭 맞고, 어디는 짧고, 어울리지는 않는다.

 

"이불 덮고, 이거 마셔봐."

"응."

 

기운은 없지만, 평소의 목소리가 들리자 현지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담서는 흰 김이 많이 빠진 핫초코를 입가에 가져다 댄다. 비에 얼어 굳은 심장이 열을 발하도록 노력하자 가슴의 중심에서부터 온기가 퍼져나가는 것만 같다. 현지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기운을 차릴 때까지 옆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핫초코 잔을 다 비우자 그제야 현지가 담서를 돌아본다.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

 

 

자신 못지 않게 불안한 현지의 눈빛을 보자 담서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분명 자신과 동갑인데, 현지는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어린애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인 담서가 자기 몸을 덮고 있던 두꺼운 이불을 풀어낸다.

 

"비밀로 해 줄 수 있어?"

"응."

 

현지의 목소리를 들은 담서가 잠깐 고개를 숙이고는 결심한 듯 옷의 밑단을 부여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