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


양철이 진동하는 낡은 소리가 울린다. 불투명한 유리창이 달린 철문을 두드리던 사내가 인기척 없는 집 안에다 대고 이야기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5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과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항상 선을 따르라….”


그리고 다시 챙챙 문 두드리는 소리.


“야. 없냐?”


불투명한 유리창엔 움직이는 실루엣도 사람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없나보다.”


중지가 뒤를 돌아 계단 아래에 있던 담서와 현지에게 말한다.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 현지와 담서가 몸통만 한 상자를 하나씩 들고 계단 위로 올라온다.


“교복이나 교과서처럼 필요한 것만 챙겨. 나중에 필요한 건 사줄 테니까.”

“네.”


장미색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른 담서가 문을 연다. 불이 꺼진 방 안에 가득한 적막과 소주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두 사람이 물건을 챙기는 동안 중지는 계단 아래로 내려가 담배를 문다. 페인트가 벗겨진 콘크리트 계단에 기대어 숨을 들이쉰다. 첫 모금을 빨고 머리가 혼탁해지는 강렬한 느낌에 취하던 와중에 누군가가 대문밖에서 흘끗거리는 게 눈에 띈다.


“아.”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계단에 기대어 서 있는 자신을 문틈 사이로 쳐다본다. 눈이 콱 마주치자 끼익하며 문이 열린다. 소년은 문간으로 걸어들어오지는 않고 문밖에서 중지를 바라보기만 한다.


“너 뭐니?”

“혹시, 이 집에 사람 있지 않아요? 여고생?”

“너 누군데.”

“그 사람 동생이예요.”


그렇게 들으니 인상이 다른 듯 비슷하다.


“너, 누나랑 만나면 아빠인지 뭔지가 난리 친다고 하지 않았어?”

“주말 낮에는 술 마시러 갈 것 같아서요.”

“없어.”

“아저씨는 누구예요?”

“네 누나 보호자.”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있던 중지는 입의 담배 연기를 가시게 하고는 한 번 빤 담배를 바닥에 던져 비벼끈다.


“누나한테 전화는 안 해봤니?”

“한 번 저랑 전화했다가 누나가 맞았어요. 그래서 그 후로는 거의 안 했죠. 해도 몰래했고.”


콘크리트 벽에 고개를 젖힌 중지의 입에 담배 연기와 한숨이 섞여 입김이 되어 나온다. 어이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이제 전화해도 돼. 지금은 안전한 곳에 있으니까.”

“그래요?”

“저녁때쯤에 전화해 보던가...일단은 돌아가. 술 먹으러 간 거 같기는 해도 네 아빠 돌아오면 난리 난다.”


마음 같아서는 애비란 인간을 봤다간 예전처럼 주먹다짐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사양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저씨는 누구예요?”

“그러니까…. 너 핸드폰 줘 봐.”


네 누나의 반 친구의 형이다. 네 누나는 지금 우리 집에 있다. 라고 말해 봐야 못 믿을 것이 뻔했고, 이해시키기도 어려울거로 생각한 중지는 그의 전직을 흉내 내기로 한다.


“한 시간 정도 뒤에라도 누나한테 전화해도 되고, 계속해도 되는데 어디인지는 묻지 마. 누나도 곤란하고 너도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 대신, 정말 도움이 필요하다 싶을 때는 이 번호로 전화해서 네 누나 이름 말하면서 도와달라고 해. 그러면 도와줄 거야…. 아저씨는 채중지라고 사회복지사고 혹시나 해서 여기 와 본 거야.”

“알았어요. 지금은 누나 없는 거죠?”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언제정신나간 인간이 난입할지 모르는 곳에서 눈물의 가족상봉을 하는 것도 사양이었기에 중지는 고개를 끄덕인다. 가족을 만난다면 차라리 자기 집이 나았다.


“갈게요. 누나한테 찾아왔다고 얘기해줘요.”

“오냐.”


담서 못지 않은 검은 눈동자와 흑발을 가진 소년은 그렇게 자리를 뜬다. 괜한 신경이 쓰인 중지는 대문간 밖으로 나가 소년이 오르막길로 사라지는 것까지 바라본다. 역시 기분이 찝찝하다.


10분 정도가 더 지나서야 현지와 담서가 낑낑거리며 집 안에서 걸어 나온다.


“싣어라.”


자기 소형 SUV 문을 열고는 뒷좌석에 상자를 싣게 한다. 대개 옷과 책, 비닐봉지에 담은 신발 같은 것들이 주였다.


“너희들 따로 집으로 가라. 나 어디 갔다 와야하니까.”

“알았어.”

“다녀오세요.”


현지와 담서는 길의 내리막으로, 중지의 자동차는 오르막으로 향한다. 학교와 그리 머지않은 곳인 만큼 익숙한 발걸음으로 학교를 지나 도곡역으로 향한다. 내리막을 다 내려온 담서는 잠깐 뒤를 돌아본다. 남길 미련도 없지만, 콘크리트 일색의 공간도 자기 일부라고 생각하니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다만, 그 감정이 긍정적이진 않단 건 확신할 수 있었다.

도곡역 플랫폼 아래로 내려갈 때까지 재잘거리던 현지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춘다. 현지가 한적한 플랫폼의 한 곳을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한 사람과 현지의 시선을 따라간 담서의 시선까지 한 점에서 만난다.


“현지 선배?”

“채리?”

“응?”


머리띠로 앞머리를 넘겨 이마를 드러낸 여학생은 키도, 체격도 왜소했다. 무표정에 가까운 눈동자는 경계심은 없었지만, 긴장이 베어 있었다. 또래 여자애들과 비슷한 키인 현지보다도 한 마디 작은 여학생은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뒤로 넘겨 더 어려 보였다.


“누구야?”


채리라는 여학생은 자신이 현지에게 누구인지 묻는 장신의 여학생을 바라본다. 지그시 쳐다보는 눈빛에 담서가 되려 흘끗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본다.


“방채리라고 나랑 같은 중학교 졸업한 여자애야.”

“현지 선배 염색 한 거예요?”

“그렇지.”


눈길을 확 끄는 머리색이 질문을 만든다. 담서를 포함한 학생들도 1학년 때 다 한 번씩 했던 질문이었다.


"홍담서라고 내 친구야."

"반가워."

"네."


채리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인다. 눈에 서린 묘한 불신감과 긴장감이 그녀가 낯을 가리는 성격이란 걸 알게 해주었다.


"그런데 여기는 웬일이야?"

"반 친구가 만나자고 해서요. 잠깐...."

"그러면 너도 민곡고 온 거야?"

"네. 선배도?"


알고 지낸 사이 같은데, 서로 어느 학교인지도 몰랐단 사실이 황당하다. 묘하지만 현지도 꽤 내성적이었던 걸 생각하면 두 사람 다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반 친구? 잘됐네."

"아뇨. 뭐, 좀 이상한 얘기를 들어서...."

"왜?"

"아. 선배가 생각하는 그런 쪽은 아니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담서가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허벅지께에 느껴지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내 확인한다.


"어?"

"왜 그래?"

"아니, 동생한테 전화가 와서."


채리는 동생한테 전화가 온 것치고 얼굴에 긴장과 화색이 도는 담서를 보며 저 사람도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구나 하는 걸 추측해낸다. 물론 그래 봐야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일이니만큼 잊어 주기로 한다.

소곤거리며 전화를 받던 담서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져간다.


"그래, 자주 전화하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엄마한테도 지금 안전한 곳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해. 응."


현지와 채리는 그녀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기로 한다.


도곡역 플랫폼 위, 사거리 건널목을 건너는 한 쌍의 남학생이 있었다. 한 명은 멀리서 봐도 장신이라는 것이 느껴질 만큼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었고, 한 명은 되려 또래보다 작아 보이지만, 특이한 곱슬머리가 시선을 끌었다.


"야. 나까지 주말에 불러낼 만큼 걔가 그렇게 좋냐?"

"좋잖아."

"아니 애초에 나는 왜 부른 거야? 혼자 만나면 되잖아?"


서글거리며 웃는 키 큰 남학생이 귀찮다는 듯 부루퉁한 키 작은 남학생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키 못지 않게 다리도 긴 남학생의 보폭에 맞춰 걷느라 키 작은 남학생은 발걸음도 재촉하고 있었다. 물론 자주 다닌 사이인 만큼 익숙한 발걸음이었다.


"얘기하다 수틀리면 나보다는 리아 네가 인상이 더 좋잖아."

"뭐래는 거야."


무안하다는 걸 돌려 말한 거였다. 기껏 불러내서 가 봤더니, 같은 반인 채리와 앉아서는 신나게 떠들어댈 동안 자신은 옆에 앉아 서로의 눈치만 흘끗거리며 빨대만 빨아 댔다. 리아는 오히려 채리가 옆에 멀뚱멀뚱 앉아 있는 자기 눈치를 흘끗흘끗 보느라 불편해 죽을 맛이었다.


"근데 소현일 너는 걔가 뭐가 좋다고 그러냐? 정신없어 보이는구만."

"예쁘잖아. 뭔가 성격도 밝아 보이고. 난 치어리더같은 스타일이 좋더라."

"취향하고는."


리아가 픽 쏘아붙이지만, 현일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싱글거린다.


"그런데 방채리 그 애 놀라지 않았겠냐? 갑자기 그런 말 하면?"

"뭘, 요즘 애들은 진도도 빠르다는데."


요즘 애들이라는 단어가 현일의 입에서 나오자 리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린다. 현일은 뭐가 이상하냐는 듯 태연한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다.


"너는 뭐 스물 여덟쯤 됐냐? 똑같이 열다섯이면서 무슨."


고1, 생일 지나지 않은 15살, 채리, 리아, 현일 모두가 공유하는 한 가지 사실이었다.


"야구하는 애들은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거 알잖아."

"뭔 소리인지는 알겠다만, 요즘 애들이 뭐냐? 요즘 애들이."

"뭐 어쨌거나, 분위기도 밝아 보이고 좋잖아."


콩깍지가 씌여도 단단히 씌인 현일은 모든 대화의 결론이 '좋다' 였다. 어릴 적부터 긍정적인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긍정적이다 못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믿는 모습을 보며 리아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근데 잘 될까?"

"왜?"

"방채리인가 걔 남지나랑 실제로 친한 건 맞아? 완전 상극처럼 보이더만."


항상 다른 친구들을 끌고 다니는 현일과 다르게 반 애들에 큰 관심이 없는 리아가 보기에도 지나와 채리가 같이 다니는 건 보였지만, 둘의 성향은 달라도 너무 달라 보였다. 리아의 평으론, 지나는 정신사납고 움직임도 크고 시끄럽고 방긋방긋 웃는 타입이었지만, 채리는 대부분의 상황이 무표정에 남지나만 아니면 다른 애들과는 서먹했고, 오늘까지는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었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모습이 남지나와 친하단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친하다잖아. 애도 착해 보이니까 분명 도와줄거야."

"너 알아서 해라. 간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리아가 현일을 두고 자기 집 방향으로 걸어올라간다. 현일은 리아의 반응은 무시하고 핸드폰을 켜 자신을 도와 준다는 채리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아 얘 상체 너무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