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여도 상관 없나?-

 

아담한 채리와 현지 사이에 앉은 거대한 담서는 두 사람의 미묘한 분위기가 신경 쓰였다. 채리가 말하는 것만 들으면 입학때부터 분홍 머리였던 현지의 염색 사실도 모를 만큼 오랜만에 만난 사이인데 반기는 느낌이 없다. 그렇다고 어색한 사이라기에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어렴풋 서로를 이해한다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동아리 신청할 텐데 뭐 할 거야?"


두 사람의 침묵에 끼어 있던 담서가 화제를 연다. 현지를 바라보며 이야기했지만, 채리의 흥미를 끌기에도 충분한 주제였다. 담서가 자신에게 묻자 현지는 반사적으로 입을 연다.


"글쎄, 별로 내키는 게 없어서 아직 못 정했어. 담서 너는?"

"작년처럼 배구부 하려고."

"배구부도 있어요?"


채리는 고개를 내밀며 담서에게 묻는다. 시선 차이가 큰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한다.


"응. 배구부는 1, 2학년 합동이야. 너도 할래? 주말에 연습도 하고 재밌어."

"생각해보구요."


담서의 눈동자를 피해 얼굴을 돌린 채리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민하구청역에서 내린 세 사람은 길이 갈라질 때까지 걷는다. 공유하는 것이 없는 담서와 채리는 대화가 없었고, 채리와 현지는 서로에게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다. 결국 담서와 현지만 재잘대고 채리는 그들을 흘끗 쳐다볼 뿐이었다.


"선배, 분위기가 많이 변했네요."

"그래?"

"네."


현지의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채리가 현지를 보며 이야기한다. 분위기, 담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분위기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채리에게도 현지에게도 캐물을 수 없었다.

현지와 담서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뒤돌아 걷는 채리를 담서가 멈추어 바라본다. 무언가를 계속 신경 쓰는 듯 긴장한 눈빛과 얼어 있는 분위기가 담서의 가슴 한 켠에 계속 걸린다. 분위기, 현지의 분위기는 어땠던 걸까.


"채리라고 했나?"

"쟤? 응."

"무슨 관계야? 알고 지낸 사이 같은데."


담서는 서로 고백한 사이지만서도 남의 비밀을 캐묻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런데도 너의 과거를 알고 싶다는 솔직한 궁금증이 담서의 입을 움직이게 했다. 담서의 질문을 받은 현지는 눈동자가 흐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담서도 현지가 자기 눈을 피한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같은 중학교 나왔거든, 몇 번 마주친 사이야."


명쾌한 대답은 아니었다. 평소의 현지라면 당황스러운 질문도 부정은 못하고 삐지면서도 솔직하게 말해주었는데, 현지가 얼버무리자 담서는 더 캐묻지 않기로 한다.


월요일, 아직은 낯선 도곡역의 모습을 익혀가며 채리가 1층의 대합실로 올라간다. 신용카드를 개찰구에 찍고 나가자 저 멀리서 여학생이 방방 뛰며 다가온다.


"채리야!"


매일 보면서 매일 저런다. 풍성한 웨이브머리를 풀썩거리며 뛰는 지나가 채리를 끌어안는다. 언젠가부터 키가 커진 지나가 자신을 끌어 안을수록 무게를 지탱하는 게 버거워졌다. 그러면서도 채리는 큭큭 웃으며 지나를 안아준다.


"얘가 왜 이래."

"토요일날 뭐 했어?"

"누구 만날 일이 있어서."


평소에 별 다른 약속이 없는 채리는 주말에 만나자고하면 대개 승낙했지만, 이번 토요일엔 채리가 일이 있다며 바람을 맞혔다. 지나는 바람 맞은 건 신경 쓰지 않았지만, 채리가 자신 말고 누구를 만났는지 궁금했다.


"누구?"


채리가 내성적이란 건 7년 가까이 그녀를 봐 온 지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채리가 자기도 아니고 누굴 만났다니, 지나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이기 시작한다.


"응? 누군데?"


대충 얼버무리려던 채리는 궁금증을 가득 품은 지나의 눈빛에 당황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거짓말을 하는 건 내키지 않았고, 그렇다고 진실을 말하자니 자연스럽게 지나랑 만날 기회를 만들어달라던 현일의 부탁이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나리아."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일으킨다. 채리의 순수한 머릿속에서 내놓은 결론은 현일 옆에 앉아 있던 리아였다. 다른 반 애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채리는 그의 이름도 가물가물했지만, 임기응변을 발휘해야 할 상황에선 머리가 쌩쌩 돌아갔다.


"나리아? 우리 반에 그 곱슬머리 한 애?"


현일을 만날 때 리아가 옆에 있었으니 거짓말도 아니었지만, 순수한 눈빛으로 히죽대는 지나의 부담스런 표정이 일단 고개를 끄덕거리게 한다.


"왜? 걔가 먼저 만나자고 했어?"

"어? 어."

"어머, 미쳤나 봐. 걔도 안 그렇게 생겨서는 와."


지나는 꿀밭의 벌처럼 방방 뛰며 흥분감을 보인다. 며칠 간 반 애들을 관찰한 지나의 눈에는 리아도 의도적으로 겉도는 학생인데, 그런 애가 채리에게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다.


"괜찮지 않아? 키 좀 작아도 얼굴도 괜찮고, 걔도 막 외향적인 건 아니니까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어? 그렇지 뭐."


1층 위로 올라가면 현일이 기다리고 있겠다고 메시지를 보냈었다. 채리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간다.


"어? 안녕."


현일은 역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의심할 정도의 뻔한 타이밍에 나타났지만, 지나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는다. 멀대같이 큰 현일을 보며 대충 손 인사를 한 지나는 그 옆에서 피곤함 가득한 표정의 리아를 보고 잠깐 머리를 굴린다. 핑 하는 전구가 지나의 머리 위에 켜진다.


"야. 야. 소현일, 너 잠깐 따라와 봐."

"어?"


대뜸 현일의 손목을 잡은 지나가 성큼성큼 그를 끌고 자리를 비워준다. 현일은 자연스러운 만남 이후에 단 둘이 있는 기회를 원하긴 했지만, 갑작스러워도 너무 갑작스러운 지나의 접근 속도에 현일은 얼굴 가득 퍼지는 미소를 어설픈 자제심으로 숨길 수 밖에 없었다. 186cm인 현일의 보폭보다도 성큼성큼 걸으며 황당한 오해를 하고 있는 지나는 리아와 채리가 같이 있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준다.


"쟤 왜 저래?"


리아도 현일과 채리가 어떤 약속을 했는지 알지만, 그렇다고 만나자마자 저렇게 둘이 치고 나갈 거라고는 예상 못 한 듯했다.


"그, 방금 만났을 때 주말에 누구 만났냐고 묻길래...내가 너가 나 불렀다고 했거든."

"뭐?"


자기 옆에 서 있는 리아를 흘끗흘끗 쳐다보며 채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한다. 예상은 했지만 리아의 얼굴에 황당함이 퍼진다.


"그럼 쟤는 지금 내가 너한테 관심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마도 그럴 거야."

"참 나...."

"그, 미안."

 

시니컬한 리아의 반응에 채리가 먼저 꼬리를 내린다.


"아니, 사과할 것 까지는 없어."

"말 좀 맞춰줘."

"알았어."

 

자신을 귀찮게 하지만 않으면 리아는 남지나가 자신을 뭐라 생각하던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현일이 지나랑 가까워져서 주말마다 자신을 불러내지 않는다면 까짓것 채리와 가까이 지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 채리는 늦지 않기 위해 집에서 일찍 출발하는 편이었다. 느긋한 발걸음으로 학교에 가도 늦지 않겠지만, 달리 갈 곳도 없는 둘은 바로 학교로 이동한다. 역 방향에서 오는 학생들은 자신들밖에 없었다.

 

"너랑 남지나는 어쩌다 친해진 거야?"

 

리아도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고 채리도 지나처럼 조잘대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5분 동안 서로 꾹 다물고 걸을 만큼 어색함을 즐길 성격도 못되었다. 그래도 채리처럼 소심한 것은 아닌 리아가 먼저 질문을 한다. 리아의 말에 채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너는 조용할 거 좋아하는 분위기인데, 쟤는 보기만해도 시끄럽잖아.“

"그래?"

"응. 너는 그런 분위기야."

 

리아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채리는 내향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껄끄러워한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친구 사이라는 것은 성향 따위로 재단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리아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단순한 호기심 수준으로 채리에게 질문을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지나가 전학오고. 그때 친해졌어. 지나가 날 챙기기도 많이 챙기지만."

"그래?"

"그럼 넌? 소현일이랑 많이 친해? 토요일에도 같이 나왔잖아."

 

다른 사람들에 관심이 많은 현일은 지나와 채리가 세트라는 걸 단박에 눈치챘고 리아도 얼핏 감은 잡았지만, 타인에 관심을 두지 않는 채리는 현일과 리아가 세트라는 걸 토요일이 되어서야 알았다.

 

"친하지. 초등학교 들어가자마자부터 같이 다녔으니까."

"진짜?"

"둘 다 야구 선수였거든."

"야구 선수?"

 

야구를 잘 모르는 채리는 고등학생인 둘이 선수였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걔는 작년까지. 지금은 둘 다 관뒀지만. 리틀야구도 같이 했고, 걔는 중학교 야구부 있는데 갔고. 나도 같이 갔지. 어쨌거나 그렇게 초, 중, 고. 친하지."

"그런데 왜 그만둔거야?"

"나도 뭐 일이 있어서 관뒀고, 걔도 뭐."

 

말하는 것이 내켜지 않아 보이기에 채리는 더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혹시나, 소현일하는게 귀찮다 싶으면 나한테 얘기해. 걔는 하여튼 자기가 좋아하는 거엔 눈에 뵈는 게 없어져서."

"알았어."

 

지나나 현일처럼 외향적이지 못한 둘의 대화 소재는 금방 바닥난다.

리아는 평소에 정문으로 다니지만, 오늘은 현일에 맞추어 도곡역에서 기다린 탓에 후문으로 들어간다. 매일 후문으로 다니던 채리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1학년이 사용하는 신관 건물로 걸어들어간다. 반으로 들어가자 지나와 현일이 뭐가 그리 신나는 지 한참을 떠들어 대고 있었다. 계획을 실행하는 첫 날 아침부터 오해가 엉켰지만, 결과적으론 잘 된 것처럼 보였다. 채리와 리아가 들어오는 걸 보자 현일이 채리를 보며 슬쩍 웃어 보인다. 토요일 날 봤을 때는 황당한 요청 때문에 신경 쓰지 못했지만, 저렇게 웃는 걸 보니 남자에게 둔감한 채리도 현일이 미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금요일에 괜찮은 거지?"

"응. 나는 괜찮아."

 

잔뜩 신이 난 지나가 싱글싱글 웃으며 채리에게 다가온다. 금요일? 얼핏 대화를 들은 채리가 무슨 이야기냐며 눈으로 묻는다.

 

"쟤 어때?"

"응?"

"오면서 같이 얘기했을 거 아니야."

 

지나는 역에서부터 같이 걸어와놓고 따로 온 것처럼 각자 자리에 앉는 리아와 채리가 신기했지만, 호기심은 접어두고 필요한 이야기부터 한다. 리아가 어떠냐는 질문에 채리는 뭐라 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한다. 하지만 고민해도 10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어떠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뭐, 좋은 애 같아."

"진짜?"

 

채리는 둘러댈 겸 상투적인 칭찬을 했지만, 지나는 채리도 나름 호감을 가졌나보다 하며 반색한다. 사람의 눈치와 분위기를 자주 살피는 채리는 지나가 또 오해했다고 생각하지만, 부정은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마냥 고개를 끄덕인 건 아니었다. 채리 역시 리아가 나쁜 애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탓도, 그리고 현일과 이야기하던 지나의 표정에서 은근한 즐거움을 본 탓도 있었다.

 

"그러면 금요일에 동아리 끝나고 만나기로 했는데, 나랑 쟤가 중간에 자리 비워줄 테니까 잘해봐. 히히."

"알았어."

 

빙긋빙긋 웃는 지나가 리아를 슬쩍 쳐다본다. 리아는 지나의 시선을 느낀 듯 만 듯, 핸드폰에서 잠시 시선을 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