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감-

 

저녁이 되면 현지와 담서는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쓰거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담서는 보통 거실 책상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곤 했다. 취미이기도 했지만, 그림을 보고 난 현지의 반응이 귀엽기도 했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불안감이나 복잡한 마음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리 잡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도, 그림을 그린 페이지도 늘어났다.

현지가 장을 보러 간 사이, 담서는 거실에 앉는다. 따라갈까 싶었지만, 현지가 그리다 만 그림을 완성해서 보여달라 얘기해 공책을 펼치기로 했다.

 

"뭐 하냐?"

 

샤프가 공책을 긁는 소리가 들리자 집 안의 다른 식구가 기지개를 켜며 방에서 걸어나온다. 담서에게 있어선 현지의 오빠, 그리고 집의 실질적 주인인 중지였다. 얹혀사는 입장에서 마주치기는 자주 마주치지만, 담서 입장에선 편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림 그려요."

"봐도 돼?"

"네."

 

소파 아래 앉아있는 담서는 신경쓰지 않고, 소파에 드러누워 담서의 공책을 받는다. 가벼운 느낌으로 공책을 건네받은 중지는 맨 앞 장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담서를 쳐다본다. 그리고 다시 한 장 넘기고 몸을 일으켜 세운다. 현지에게 처음 보여줬을 때처럼, 팔락팔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빨라진다.

 

"이거 네가 그린 거야?"

"네."

 

중지는 종이와 담서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너 그림 배웠냐?"

"아뇨."

 

자기 아빠에게 화를 낼 때도 당황한 눈빛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꽤 놀란 듯 눈이 동그래진다.

 

"너, 이거 그냥 한 거야?"

"네."

"되게 잘 그리네."

"감사합니다."

 

그리다 만 그림까지 페이지를 넘겨가며 본 중지가 공책을 돌려준다. 사람에 대한 평가가 꽤 냉정한 편인 중지가 보기에도 담서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아. 내가 할 말이 있는데."

 

쇼파에 누운 중지를 신경쓰지 않으려해도 중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담서에게는 부담이었다. 안정을 찾았다곤 해도 남의 집이었고, 게다가 중지마저 집의 보호자지 집의 주인은 아니었다. 나가라고 하면 나갈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너, 쟤랑 같은 방 쓸 생각은 없냐."

"네?"

 

다행히 나가란 말은 아니었지만, 그것 못지 않게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지금 담서의 짐은 현지 방에 보관되어있긴 해도 담서는 보통 소파에서 자고 거실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같은 방을 쓰라니, 그걸 현지한테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한테 이야기 하는 것이 맞는 걸까?

 

"아니, 내가 원래는 밤이나 새벽에 영화를 보는데. 네가 여기 있어서 못 봐. 아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영화 미튜브도 하나 하고 하여튼 영화를 많이 보거든?"

"현지한테 얘기는 들었어요. 웹소설이랑 미튜브 대본 쓰는 거 하신다고."

"그래. 내가 영화를 봐야 해. 근데 너가 여기서 자잖아. 그러니까 쟤랑 같이 자."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중지의 말에 담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요청인지 통보인지 모를 애매한 어조가 담서의 머리를 누른다.

 

"저는 상관 없는데, 현지가 괜찮을까요?"

"어? 쟤는 내가 하라면 돼. 너네 둘이 이상한 사고만 치지 마."

"일단, 현지 오면 얘기 해 볼게요."

"그래."

 

중지는 일단 됐겠거니 하며 몸을 다시 소파에 뉘인다.

 

"저기, 오빠분은 몇 살이세요?"

"맞아. 오빠분이라고 하지마. 체 할 거 같아."

"아. 네."

"너보다 12살 많지."

 

어렴풋 대학생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보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자신이 16살이니까 생일이 지났으면 스물아홉, 아니면 스물여덟. 분위기의 차이만큼 나이차가 꽤 큰 형제였다.

 

"영화 틀어도 되지?"

"그럼요. 오빠 집이잖아요."

 

배려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중지라고해서 마냥 무관심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담서가 궁금하기도 했고 알아둬야 할 것도 많았지만, 아무튼 나이 차 큰 여자애다보니 본인은 본인 나름대로 간격 좁히는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물론 자기 기준이었다.

 

"영화 좋아하냐?"

"싫어하는 건 아닌데, 자주 보진 않았어요."

 

중지는 담서가 그 집에서 문화생활을 할 만큼 충분한 여유가 없었단 걸 눈치챈다. 그런 얘기를 듣자니 또 뭘 묻기가 껄끄러워진다.

피식 하며 탄산 빠지는 소리가 들리자 멘솔과 바닐라가 섞인 오묘한 향이 펴진다. 중지는 그런 특이한 음료수를 물 마시듯 홀짝인다. 그림을 거의 다 완성한 담서는 점점 티비에 눈길을 뺏기는 시간이 길어진다.

 

"무슨 영화에요?"

"아네트."

"요즘 영화에요? 현지가 맨날 예전 영화만 본다고...."

 

자신이 말실수를 했단 걸 눈치 챈 담서는 끝을 흐리지만, 중지는 개의치 않았다.

 

"걔는 내가 보는 영화 다 이상하다고 하거든. 안목이 없어. 레오 까락스가 영화를 얼마나 잘 만드는데."

 

레오 까락스가 누구인진 몰라도 깨끗한 영상에 한 줄 없는 대사 대신 읊는 노래며 음악도 아름다워 흘끗 흘끗 쳐다보던 담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소파에 기대어 영화를 볼 만큼 빠졌지만, 처음 보는 영화라는 걸 부정하진 못했다.

 

"담서야. 너 말이야. 혹시 그림 팔아서 돈 벌 생각 없냐?"

 

영화를 보던 중지는 문맥 없는 질문을 담서에게 던진다. 그림을 완성하곤 공책을 덮던 담서가 황당한 질문에 중지를 쳐다본다.

 

"누가 사겠어요?"

"내가."

"네?"

"타블렛 하나 사 줄테니까. 내가 말하는대로 그려서 내꺼 소설 표지랑 삽화 좀 그려줘. 퀄리티 따라서 커미션 값은 줄게."

"커미션이 뭐에요?"

"그림 그려주고 돈 받는 거."

 

더 복잡하지만, 어차피 단어가 중요하지 않은 담서에게 간결한 설명으로 끝낸다.

 

"흑백인 게 아쉽지만, 어때? 한 장 당 5만원에서 10만원."

"그래도 돼요?"

"할 생각 있냐고."

 

5만? 10만? 그림 한 장에? 담서의 경제관념을 아득히 뛰어넘는 중지의 경제관에 담서가 놀란 듯 앵무새처럼 되묻는다. 중지 입장에서야 저 정도 퀄리티의 그림이 안정적으로 공급된다면 10만원은  지불 할 용의가 있었다. 오히려 싼 값이라고 보는 게 타당했다.

 

"그냥 그려드릴게요. 집세도 안내고 얹혀 사는데."

"그건 내가 싫어."

 

호의가 아니라 정말 싫다는 듯한 단호한 표정에 담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대신, 내가 요청한 대로만 그려야 해. 수정해야 할 수도 있고. 근데 많이 그리지는 않을 거야. 해봐야 등장인물 시트랑 간간히 중요한 장면 삽화나 설정 일러스트 정도?"

 

담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가늠되지는 않았지만, 중지는 이미 계획을 짜고 있는 것처럼 혼자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과 귀는 화면에 고정된 것이 보일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담서는 그가 입을 열 때까지 다시 영화에 집중하기로 한다.

영화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현지가 돌아온다. 눈 깜짝할 사이에 2시간이 지나갔고, 현지의 장바구니도 쇼핑에 쓴 시간 만큼 묵직했다. 담서까지 쳐서 셋이 사는 집, 그나마도 담서와 현지가 점심을 밖에서 먹고, 중지는 점심, 저녁 두 끼만 먹는 걸 생각하면 식재료가 너무 많았다.

 

"뭐야?"

"영화 봤어?"

"왔어?"

"담서야. 담요. 소파에서 맨날 이불 덮기는 뭐 할 거 같아서 사왔어."

 

형은 본 척도 안하고 묵직한 장바구니 맨 아래에서 돌돌 말린 담요 하나를 꺼낸다. 밝은 크림색의 담요는 접어 허벅지를 덮거나 몸을 덮기에도 넉넉한 크기였다.

 

"야. 근데 얘 오늘부터 네 방에서 잘 거다."

"뭐?"

"나 여기서 영화 봐야 해."

 

현지가 사 온 비닐봉지에서 자기 몫인 당근케이크맛 아몬드만 쏙 빼선 뜯어 먹는다. 그러고는 쇼파에서 봤던 영화 리스트를 정리하면서 태연한 목소리로 폭탄같은 발언을 투하한다.

 

"왜 상관 없잖아. 네 방이 우리 집에서 제일 넓어."

"아니, 아니...담서야 그래도 괜찮아?"

"나는 괜찮지만...."

"그러면 됐네."

 

오늘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저녁 준비하고 그림 구경하면서 간식이나 먹을 생각이었는데, 머리의 회전이 브레이크와 함께 멈춰버린다. 이상한 짓 할 생각은 없었다. 추호도 없었다. 물론 담서에게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같은 침대를 쓴다고 이상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한 침대에서 얼굴을 맞대고 잠을 자야한다는 생각이 현지의 눈 앞을 홀리고 있었다.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집중하려해도 실웃음을 짓게 만드는 원초적인 유혹을 상상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 방에는 들어가지 않은 담서도 거실 소파에 앉아 현지의 방을 잠깐씩 쳐다본다. 담서라고 마냥 어린애는 아니었다. 오히려 남들이 없을 땐 현지를 습관처럼 끌어안을 만큼 스킨십의 온기에 목말라있었고 부적절한 행위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남자라고는 해도, 작고 귀여운 현지를 끌어안거나 가까이서 마주보면 느껴지는 도파민의 오롯한 감각이 좋았다. 그래도 얼굴 맞대고 잠을 자도 되는걸까.

 

저녁도, 간식도 어떻게 먹었는 지 모를 만큼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밤 10시, 11시, 12시가 될 때까지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나마도 중지가 베개를 들고 걸어나오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켜줘야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녁 먹고 바로 침대에 방향제와 탈취제를 잔뜩 뿌려놓았다. 그 덕에 부드럽고 달콤한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 올라 와."

"아냐. 바닥에서 잘게."

 

혼자 쓰기엔 넓은 침대에 먼저 올라간 현지가 담서를 침대 위로 부르지만, 담서는 침대 아래 바닥에 자신이 쓰던 베개를 내려놓는다.

 

"아냐. 올라와도 돼."

"그래도 네 침대고...."

"내가 아래서 잘게."

 

이미 이성이 마비된 두 사람은 대뜸 침대를 버리고 바닥을 차지하기 위해 옥신각신한다.

 

"나는 키도 작아서 괜찮아. 좁아도 잘 수 있어."

"나도 집에서는 바닥에서 자서 익숙해. 응."

"아니 그래도."

"네 침대인데."

 

결국 잠깐의 정적이 남는다. 우스운 논쟁이란 걸 깨달은 두 사람은 침대 위로 올라간다. 그러면서도 침대의 끝에서 드러눕고는 서로를 꿈뻑꿈뻑 바라본다.

거리감은 금방 좁혀진다. 밤을 채우는 대화, 웃음, 사랑 끝에 먼저 현지가 잠이 들었을 때엔 담서는 그의 얼굴 한 칸 앞에서 현지의 앞머리를 넘겨주고 있었다.



사실 이게 올라온건 8화여도

지금 쓴 건 17화까지 썼고

한 1/3에서 절반 사이정도까진 쓴거같은데

매일매일 지금이라도 관두고 그림 그리는게 맞는지 아닌지 계속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