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스 마이너스-

 

금요일, 늦은 시간이 아니면 민하역 근처는 학생들로 북적거린다. 꼭 학생만 있는 건 아니지만 늦은 밤 전까지는 주변의 학생들이 거의 다 모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민하구의 오랜 번화가이기도 했고, 채리가 사는 진옥동도 재개발이 진행되어 깔끔한 상권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역시 구의 중심은 민하역 거리였다. 채리는 사람이 많은 곳을 내켜하진 않았지만, 지나의 손에 끌려 넷이서 이 곳을 찾아왔다.

오해의 꼬리가 꼬리를 물은 네 사람의 관계였지만, 결과적으론 처음 제안한 현일은 지나와 같이 다닐 수 있어서 좋았고, 채리가 보기엔 지나도 현일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리아는 끌려다니는 것이 귀찮아보였지만, 그래도 채리가 조용한 편인 채리와 같이 다니는 것이 나은 듯했다.

지나가 보기에는 리아가 부끄러움을 타서 채리와 같이 있어도 별 말을 안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오해였다.


"야! 소현일! 저거 해 줄 수 있어?"


시끌시끌한 소리와 네온의 선명함이 가득한 오락실의 1층, 이미 2층, 3층의 게임은 죄다 즐기고 내려온 지나가 철망에 걸린 인형 하나를 가리킨다.


"뭐야 이게?"

"고미양 몰라?"


지나는 자기 몸집만한, 땡그란 눈을 가진 고양이 같은 인형을 가리킨다. 1층을 차지한 기계는 거의 다 인형뽑기같은 것들이었고 입구에 마련된 부스에서는 사람들을 홀리듯 큼직한 인형들이 걸려있었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거야?"

"만 원 내시고 투구하셔서 표기된 점수 이상이시면 저희가 인형 지급해드려요."


사근사근한 인상의 직원이 룰을 설명해준다.


"그러면 이 인형은 몇 점이에요?"

"200점 넘기시거나, 아니면 120km 넘기시면 저희가 드려요. 이게 제일 좋은 A상."

"120km면 빠른거야?"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는 현일 옆에 구경삼아 선 채리가 리아에게 묻는다.


"일반인이면 절대 못하지."

"너는?"

"나도 안돼."


5천원을 받은 직원이 기계를 세팅하고는 마이크를 쥔다. 생각보다 본격적인 진행에 리아, 채리는 물론 인형뽑기를 하고 있던 몇 사람들도 주변에서 구경하기 시작한다.


"총 5번을 던지셔서, 200점을 넘기시거나 120km를 넘기시면, a상의 인형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학생이에요?"

"학생입니다."

"옆에는 여자친구에요?"


익살스런 웃음을 띈 직원이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다. 여자친구냐는 물음과 주변 사람들의 흥미어린 관전에 잔뜩 업된 현일이 빵긋한 미소로 지나를 쳐다본다. 대책없이 텐션이 올라간 지나 역시 빙긋빙긋 웃으며 현일과 직원쪽을 바라본다.


"여자친구면 10점 깎아드릴게요."

"자기야!"


10점이란 말에 지나가 바로 입에 손을 모으고 현일을 자기라고 부른다. 황당한 콩트에 리아와 채리가 피식 웃는다.


"좋습니다. 우리 학생, 여자친구의 선물을 타갈 수 있을지...1구 준비해주세요."

"입이 귀에 걸리겠다. 쟤."


나름 폼나는 자세를 잡은 현일은 1구를 던지려한다. 무릎을 들어올려 와인드업하자 주변 사람들도 긴장감에 숨을 죽인다.


"오, 50점! 108km! 어쩐지 몸이 좋더라고. 운동했어요?"

"헬스 자주 합니다."

"50점 맞추기 어려운데, 이대로만 맞추면 되거든요? 2구!"


스크린의 타자와 스트라이크 존을 보고 현일이 다시 공을 던진다. 이번엔 살짝 빗나가는 공 20점이다.


"아. 집중해야할 거 같은데, 합계 70점! 130점 남았어요."

"참 나."


현일의 피칭을 보며 리아가 피식 웃는다. 그 이후 이어진 피칭은 3구 40점, 4구 40점, 구속은 100km 언저리를 해메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 제구가 되게 좋아요. 100점도 못 넘기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50점 맞추면 인형 받을 수 있어요. 자 여자친구! 남자친구한테 응원!"

"너 못 맞추면 죽어!"

"그러면 맞추면! 맞추면!"

"맞추면 네가 해달란 거 생각 좀 해볼게!"

"오! 뭔진 몰라! 뭔진 모르는데 하여튼 맞춰야 할 것 같아요!"


잔뜩 텐션이 오른 지나는 무조건 맞추라며 성화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현일은 자신 있다는 듯 마지막 야구공을 손에 쥔다. 186cm, 압도적인 신장의 현일이 무릎을 들고 와인드업한다.

눈 앞의 공기를 찢는 묵직한 소리에 마이크를 쥔 직원이 순간 움찔한다. 스크린에 찍힌 200점의 스코어 그리고 붉은 그라데이션으로 불타고 있는 137km의 구속에 주변 남자들이 순수한 탄성을 내지른다.


"137km? 아니 이거 뭐야?"

"처음부터 따면 재미 없잖아요."


200점도 120km도 넘긴 현일의 기록을 남기며 직원이 고미양 인형을 지나에게 건네준다.


"학생 남자친구한테 잘해야겠어요. A상 딴 사람 여기 2년 아르바이트하면서 처음 봤는데."

"잘했어!"

"야. 가자."


볼 일 다 봤다고 생각한 리아가 채리를 끌고 먼저 오락실 밖으로 나간다. 신기록이라며 사진까지 한 방 남긴 현일과 지나가 뒤따라 걸어온다. 몸통만한 인형을 꽉 끌어안은 지나가 앞이 안보이는 지 계속 고개를 빼꼼거리며 한 걸음씩 내딛는다.


"나 카페 가고 싶은데...채리 너 노래방 간다고 했지?"

"응?"

"노래방 끝나면 티썸으로 와."


채리는 생각도 못했는데, 지나가 현일을 끌고 티썸 카페로 사라진다. 번화가 한 가운데 남겨진 채리와 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니까 쟤는 지금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거지?"

"아마."

"소현일 쟤는 입이 귀에 걸렸네 아주.... 노래방 갈 거야?"

"응."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만큼 지천에 널린 것이 코인 노래방이었다. 채리는 보통 다른 동네의 코인 노래방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는 했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리아를 끌고 아무 노래방으로 들어간다. 지하로 내려가자 좁은 복도에 여러 노랫소리가 섞여 들린다.


"한 시간이요."

"8번방으로 가세요."


둘이서 한 시간, 노래방에 자주 오지 않는 리아는 얼마나 긴 시간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깔끔한 방에 들어온 채리가 리아에게 리모콘을 건넨다.


"먼저 해."

"나 노래 잘 모르는데."

"괜찮아."


평소엔 노래방에 와도 마이크를 잘 쥐지 않지만, 그래도 둘이 왔는데 채리보고만 부르라고 하는 게 더 이상했다. 어쩔 수 없이 리모콘을 건네받은 리아가 자주 부르는 노래를 바로 선곡한다. 조명이 꺼지고 앉은 자세에서 무선 마이크를 쥐고 간주를 듣는 동안 채리가 상체를 조금씩 흔들기 시작한다.


"Since I don't have you 내게 돌아와. 너없이 단 하루 조차도 난 살수가 없어."


노래를 듣던 채리는 현일보다 평범해보이는 리아의 목소리가 멋있다는 걸 느낀다. 부드럽달지 안정적이랄지, 고음을 지르면서도 편안함이 느껴졌다. 화면에 눈을 고정하면서 리모콘을 받는다. 간주가 흐르는 동안 채리가 리아를 잠시 쳐다본다.


"아이돌 노래, 선곡해도 돼?"

"어? 해. 뭘 허락을 받아."


채리 본인이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선곡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노래방에 왔는데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다. 리아라면 이상하다고 웃지 않을 것 같단 점도 선곡의 이유였다. 리모콘을 건네받은 채리도 꾹꾹 버튼을 눌러가며 노래를 선곡한다.

 

"세상은 커녕 그 무엇도 구할 수 없던 우린 이제 서로를 구해볼까 해. Woo woolf 크게 소리쳐 ‘mayday야’ 온 세상이 너를 버려도 나는 여기 있어."

 

리아는 처음 들은 노래지만, 채리가 했던 것처럼 몸을 까딱이며 호응해준다. 아는 노래라면 조금 따라 불러볼텐데, 그러지는 못했다. 조용해서 느끼지 못했던 채리의 또렷한 목소리가 울린다.

그러고도 두 사람은 너무 신을 내진 않으면서도 노래를 번갈아 부른다.


"비가 내리는 날엔 우리 방안에 누워 아무 말이 없고."

"Feel my rhythm Come with me 상상해 봐 뭐든지. 노래를 따라서 저 달빛에 춤을 춰 바로 지금 Play my rhythm."

"천진난만한 이런 기분도 신이 나서 날아갈 정도로 웃었던 날도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키울 수 있도록."


"니가 맘에 든다고 하루 종일 보고 싶다고 Would you be my love? 반해버렸으니까."

 

두 사람이 노래방엔 사랑노래가 참 많구나 하고 느낄때 즈음 리아가 먼저 일어난다. 끊지도 않고 계속 노래를 불러대니 목이 타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화장실 갔다오고 물 한 병만 사올게."

"응."


노래를 하던 채리를 두고 잠시 자리를 비운다. 사랑이니 연애니 자주 생각하진 않았는데, 자기가 부르는 노래도 대부분이 사랑노래였다. 보통의 남녀라면 둘이서 사랑노래를 부르다가 묘한 기류라도 흐를 법한데, 리아는 채리에게 그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나쁜애는 아니지만, 그런 매력을 느낄만한 상대가 아닌 것만 같았다. 싫지는 않았지만 그랬다.

얇은 페트병에 든 물을 하나, 아니 한 개 더 집고는 좁은 복도를 지나간다.


"금요일에 혼자서 노래방 오고 진짜 안쓰럽지 않냐."


복도 건너편에서 들리는 여학생의 목소리.


"아냐. 아까 다른 남자애도 있던데?"

"꼴에 남자친구는 있구나."

"찐따끼리도 짝은 있나보지."

"찐따커플."

"야. 니들 뭐냐?"


들었는지 모르는지 복도 반대편으로 걸어가던 일행을 리아가 불러세운다. 들었다는 걸 들켰단 걸 알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들었나봐."

"민곡고냐? 그냥 들어가."


남자애 둘과 여자애 둘, 네 명이 좁은 복도에서 뒤돌아보지만 리아도 신경쓰지 않았다.


"야. 지지배 너는 귀에 피어싱 뜯어버리기 전에 조용히 해."

"근데 넌 뭐냐?"

"내가 물어야 하는 거 아니냐? 너네 누구냐? 남의 방 앞에서 헛소리하고."


남학생 중 한 명이 리아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채리만 씹고 넘어가려던 일행은 싸움이 날 것 같은 분위기에 자리를 피하려는듯 했지만, 리아도 남학생도 물러 설 생각은 없어보였다. 리아는 리아 나름대로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고, 반대의 남학생은 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냥 조용히 들어 가라고."


 

먼저 멱살을 틀어 잡힌 건 리아였다. 교복 셔츠가 말려들어간채로 벽에 밀린 리아의 목이 조여들어갈수록 그의 표정도 일그러진다.

 

 

크림치즈시트와 당근, 시나몬 향이 가득한 케이크가 포크로 찍힌다. 벽 쪽 자리에 앉은 지나가 자기 몸통만한 고미양 인형에 기대어 케이크를 먹는다.

 

"방채리랑 너는 언제 만난 거야?"

"초등학교 3학년 때, 내가 전학왔거든."

"전학? 어디서?"

"전라남도 장흥."

 

장흥, 도시에서만 살던 현일은 어림짐작하기도 먼 곳이었다.

 

"얼마나 먼 거야?"

"여기서 차타고 안 막혀도 6시간은 가."

"그럼 사투리도 써?"

"그라제."

 

지나는 부모님의 억양 정도를 빼면 표준말만 쓰고 자랐지만, 현일의 순수한 물음에 친척 흉내를 내본다. 본인도 어색했는지 바람빠지는 웃음 소리와 함께 케이크를 들어올리던 손이 멈춘다.

 

"그 때는 애들끼리 이미 친해서 좀 겉돌았는데, 채리가 집 근처에 살아서 같이 다니다보니까 친해졌지."

"하긴, 너네 둘 보면 뭔가 성격이 달라보이는데도 맨날 같이 다니더라고."

"채리는 숫기가 없어서. 나중엔 시비거는 애들도 많았고."

"시비?"

"그런 일이 있어."

 

아무 일도 아니라며 싱긋 웃는 지나가 케이크 위의 당근 조각을 포크로 쿡 찌른다. 당근 뿌리와 몸통이 빠그라지며 그릇으로 떨어진다.

 

"나리아 걔는 쪼끄매가지고 괜찮나 몰라?"

"뭐가?"

"채리도 작아가지고 괜히 삥뜯고 그런 애들 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저번에 사고나서 상가 상인회에서 막 돌아다니잖아."

 

달달한 음료수와 케이크를 앞에 둔 지나처럼 난생 처음 먹어보는 쉐이크를 입에 가져다대며 현일이 말한다.

 

"그리고, 있어도 별로 걱정 안해도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