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참 나."


목을 비틀린 리아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멱살을 잡고있는 손목을 쥔다.


"너네 방채리랑 아는 사이야?"


손목의 피부, 근육, 신경 그리고 뼈까지 쥐어 터뜨릴 기세로 조이는 압박감에 멱살을 쥔 손의 힘이 풀린다. 한참 작아보이는 남학생의 작은 손에 손목이 비틀리자 얼굴도 덩달아 일그러진다.


"아는 사이면 인사나 하지 왜 문 밖에서 헛소리하는데."

"야. 그만해."

"내가 왜."


멱살을 틀어쥔 손이 완전히 풀렸지만 리아는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일행 중 한 명이 말리지만, 리아는 시비에 걸리고도 안녕 하고 보내줄 만한 성격이 못되었다. 남학생의 손가락이 까딱거리며  손바닥이 쥐어질듯 말듯 펴지자 리아는 그대로 왼손으로 남학생의 오른손을 깍지끼듯 쥔다.


"끄윽, 아아악!"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자 토마토를 으깨듯 손목이 점점 꺾이고 손이 조여들어간다. 남학생은 꼴사나운 비명을 참으려 했지만 리아의 싸늘한 짜증이 그의 손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조이는 악력엔 별 수 없었다.

리아도 자신이 짜증을 내는 이유는 잘 몰랐다. 짜증이 났고, 해소하고 싶었다. 그것 뿐이었다. 어쩌면 짜증 자체가 리아의 마음 어딘가에 고여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뭐야? 리아야."


실루엣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에 채리가 문을 열고 나와본다. 익숙한 얼굴이지만 굳이 눈을 맞추진 않는다. 채리가 나오자 리아가 허리를 숙인 채로 그와 눈을 마주한다. 평소의 서글서글한 웃음을 잃은 싸늘함이 채리의 눈에 꽂힌다.


"방채리. 아는 애들이야?"

"아니, 어? 아니."


채리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본 리아가 손을 푼다.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남은 빨간 자국이 리아의 감정이 얼마나 식었는지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직 노래방의 시간은 남아있었지만, 간주는 흐르지 않았고 노래가 나오지 않으니 전등은 켜져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상황에 말을 잃은 채리와 짜증이 가시지 않은 리아가 마이크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누구야? 모른다는 소리 하지 말고."

"중학생 때."

"괴롭히던 애들?"


눈치 없고 관심 없는 리아도 이런 상황이면 추측이 어렵지 않았다. 내성적이라고도 생각했고, 따로노는 분위기도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저런 소리를 들었으면 연상되는 건 하나였다.


"괴롭히던 애들...이라기보다는 보통 다 그래. 지나 빼고."


채리는 고개를 숙인 채 얘기한다. 담담한 목소리가 이 상황이 그녀에겐 특별함이 아니라 일상임을 이야기한다.


"나 참."

"싸우지 마."

"응?"


켜져있는 마이크도 채리의 목소리를 잡지 못한다. 리아의 귀에만 들린 말에 리아가 고개를 돌린다. 푹 숙인 채리의 눈에 리아만 볼 수 있는 쓸쓸함이 비친다. 지나도, 현일도 볼 수 없는 쓸쓸함이란 걸 리아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아니, 싸우려고 한 게 아니고 그런 말을 들었는데...."

"그래도, 싸우지는 마."


채리는 고개를 돌려 리아를 바라본다. 미소는 아니었지만, 방금 전의 싸늘함은 없는 평소의 눈빛에 채리 자신의 눈동자를 돌리지 않는다.


"내 친구여도 주먹질하고 싸우는 건 싫어. 화내는 것도 싫고. 나도 이상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니까."

"알았어."

"그리고 너는 웃는 게 더 보기 좋아."

"응?"

"너 화 낼때 표정 되게 무서워."


본인 나름대로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은 걸까? 대뜸 표정 칭찬을 받은 리아가 물음표를 띄운 얼굴로 채리를 바라본다. 오히려 이상한 말 했냐는 듯 땡그란 눈으로 채리가 리아를 바라본다.


"노래 남은 거 하자."

"응."


 

삑삑거리는 기계음, 그리고 꺼지는 조명, 노랫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방금 전의 미소를 되찾은 리아도, 놀란 가슴을 진정한 채리도 노래를 부른다.

 

 

"왜? 나리아 싸움 잘 해? 내가 싸워도 이길 거 같은데."

 

시비가 걸려도 리아가 있으면 괜찮을 거란 이야기에 지나가 궁금증을 띄운다.

리아는 다른 남자애들에 비하면 키는 자신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작았고, 체격도 작은 편이었다. 물론 거구인 현일과 붙어다녀 더 작아보이는 것도 있겠지만, 객관적으로도 남자 애들끼리 키 순으로 서면 맨 앞에 설 만큼 작았다.

 

"큰일 나. 운동하는 애한테 싸움 걸면."

"운동?"

"걔랑 나랑 야구 했거든."

"야구? 그래서 공 던진거 한 거야?"

"공 던진 건 너가 해달라며."

"아. 맞네."

 

옆에 앉은 고미양도 황당한 표정으로 지나를 쳐다본다.

 

"나는 작년까지, 걔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그런데 아직까지도 아카데미 가서 운동도 하고 일도 도와주고...중학교 야구부에서도 운동은 같이 한 적도 있어."

"그래서 싸움 잘 해?"

"어지간한 양아치 고등학생보단 나을 걸? 걔 팔은 얇은데 악력이 진짜 세. 팔목힘도 진짜 좋고"

"오."

 

현일의 입에서 인정이 나오자 지나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싸울 생각도 없지만,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하여튼 성격이 좀...."

"성격이 왜? 전화해서 채리한테 짜증내면 나한테 죽는다고 그래."

"큭큭, 슬슬 올 때 됐는데."

 

한참 웃고 떠들다보니 창 밖 모습이 실루엣으로 변한다. 노을보단 조명과 간판의 불빛들이 더 선명해져간다.

 

채리와 지나는 민하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황림역에서 내린다. 평소에는 민하구청에서 내려 큰 길을 따라 걷지만, 민하역에서 갈아타지 않으려면 황림역에서 내려 두 사람의 집 방향으로 걸어야했다. 두 사람 모두 초등학생 때 걸었던 길을 같이 걷는다.

 

"그래서, 어때?"

"뭐가?"

"소현일. 둘이 같이 있었잖아."

 

리아가 어땠냐고 물어봤던 것처럼, 이번엔 채리가 지나에게 어떠냐고 물어본다. 두 팔로 안기에 버거울 정도로 큰 고미양 인형을 든 지나가 새초롬한 표정을 짓는다.

 

"괜찮아. 젠틀하고, 잘생기고. 나 한테 관심도 좀 있나?"

"큭큭, 잘 됐네."

 

지나도 고미양 인형만을 생각해서 여자친구 흉내를 낸 것은 아니었다. 채리보다는 흐름을 탈 줄 알고, 즐길 줄도 알았지만 그저 분위기 하나만으로 현일에게 그런 응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지나도 알고 있었고, 채리도 어렴풋 느끼고 있었다.

 

"너 처음 봤을때도 현일이 괜찮다고 얘기 했잖아."

"음. 그랬지. 뭐, 나리아가 너한테 관심있다고 해서 겸사겸사 내가 걔 자주 끌고 다녔지만."

 

지나는 항상 솔직하고 당돌했다. 입학식 첫 날에 현일을 보고는 채리에게 괜찮지 않냐며 떠들어댔던 걸 기억한다.

시원할 정도로 쭉 뻗은 다리, 안기면 든든할 것 같은 체격과 안심되는 큰 키, 게다가 얼굴도 만화 주인공같은 미남이었으니, 여자애들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지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어쩌면 마음에 담아두기만 하는 것은 어려워 채리에게 전한 것일지도 몰랐다. 

 

"재밌는 거 하나 가르쳐 줄까?"

"뭐?"

 

평소엔 지나가 묻고 지나가 떠들고 채리가 대답하는 대화에서 오늘따라 채리의 질문과 대화가 많다.

 

"지난 주 토요일에 내가 리아 만났다고 했잖아?"

"응."

"사실 그 때 현일이가 불러서 나갔어."

 

채리의 폭탄발언에 지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뭐야? 왜?"

 

안 그런 척 하면서도 현일이 채리에게 관심을 보였단 얘기를 듣자 지나의 표정이 달라진다. 긴장인지 불안인지 모를 흔들림과 웃음이 섞인 지나의 처음 보는 표정에 예상했다는 듯, 채리도 장난스러운 미소로 화답한다.

 

"왜, 걔가 나 좋아한다고 했을까봐?"

"진짜야?"

 

농담삼아 떠봤는데 지나의 극적인 반응이 그녀의 속마음을 유리창마냥 비춰주고 있었다.

 

"그건 아니고...음...말 해줘야 하나?"

 

평소에 지나가 자신을 놀려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채리는 뻔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으로 지나를 놀린다.

 

"빨리 말해봐! 뭔데?"

"하하. 토요일날 걔가 불러서 나갔는데, 나한테 그러더라고."

 

채리는 지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준다. 현일이 자신을 몰래 불렀고, 자신이 지나와 친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는 둘이 같이 있을 기회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단 것까지 낱낱이 분다. 순간 천당과 지옥을 오가던 지나의 표정에 오묘한 분홍빛이 돈다.

 

"아. 뭐야? 그 자식."

"큭큭, 그 자식이라니."

 

짜증나는 척을 하면서도 퍼지는 미소가 숨겨지지는 않는다.

 

"잠깐만, 그러면 나리아 얘기는 뭐야?"

"네가 물어봐서, 둘러대다가. 응."

"그럼 그냥 같이 있던거야?"

"그렇지."

 

지나는 자신의 크고 황당한 오해를 깨닫자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힌다. 속았다는 느낌에 약도 오르고, 그러면서 현일도 자신에게 관심이 있단 생각에 기분이 좋기도 하고, 복잡한 얼굴이 표정을 마구 흔들어놓는다.

 

"혹시 나리아 걔가 너한테 이상한 짓 안 했어?"

"안 했어."

 

당황을 수습하기 위해 채리에게 리아에 대해 캐묻지만, 채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며 잘라 끊는다. 정말 아무 일도 없던 건 아니었지만, 지나가 말하는 이상한 짓이 그런 쪽은 아니란 걸 채리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일이 있었단 걸 얘기하면 지나가 또 난리를 칠 것이 뻔했다.

 

"잘 가."

"응."

 

지나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그녀를 배웅한다.

 

지나가 현일과 잘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은 좋은데, 아쉬운 느낌도 숨길 수 없었다. 현일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품었다던가, 지나에게 질투가 난다거나 하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마치 사는 세계가 다른 것만 같은 단절감이 채리의 고독감을 키워갔다.

집에 가면 혼자인 걸 알았다. 그래도 집에 갈 것이지만, 괜히 가는 길을 빙빙 돌아가게 만든다.

모두 키가 컸다. 현일도, 지나도, 담서도. 그리고 자신과 현지, 리아는 작았다. 키가 작으면 겉도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쓸쓸함이 남는다. 그리고 집까지 가는 길, 평소라면 지나갈 일 없는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건너간다. 공원처럼 조성한 아파트 단지 내부, 뜨문뜨문 놓인 가로등 불빛 아래에 다른 세계의 사람이 있었다.

 

"채리?"

"담서 선배?"

 

편한 트레이닝복에 티셔츠를 입고 있어도 늘씬한 다리와 어마어마한 몸매가 드러난다. 20cm는 차이나는 신장차이,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자신과 담서의 심한 대비가 신경쓰인다.

 

"선배, 여기 사세요?"

"너는?"

"저 위로 올라가야해요. 가로질러 가는게 빨라서." 

 

여기 사냐는 말에 담서는 흠칫 놀란다. 맞다고 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도 하나씩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지."

"현지 선배랑 가까이 사네요."

"현지 여기 사는 거 아니?"

"와 봤으니까요."

 

중지도 알고, 집에도 와 봤다. 채리와 현지는 어떤 관계일까?

 

"얘기 좀 할까?"

"네."

 

현일과 지나, 담서와 현지. 키 차이. 머릿속이 복잡해졌던 채리도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담서는 채리와 함께 벤치에 앉는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나왔다가 채리를 마주한 것이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며 채리의 눈을 바라본다. 이번엔 채리의 시선에게서 도망치지 않는다.

 

"3년 전이에요. 제가 1학년이고, 선배가 2학년일때. 학교 근처였고, 제가 3학년 남자들한테 지갑을 뺏긴 적이 있었죠. 그 때, 학교 뒤에서 현지 선배가 우물쭈물대면서 지갑을 줬었어요."

 

채리와 현지의 미묘한 분위기, 그리고 현지의 또 다른 과거. 담서는 그것을 알더라도 현지를 감싸안을 수 있었다. 아니, 그의 싸늘한 흔적을 감싸안기 위해서라도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헤집는다. 이 이야기가 끝나면 현지와 담서에 대해 더 알 수 있을까? 현지처럼 변할 수 있을까? 잠깐 뜸을 들인 채리는 3년 전의 이야기를 풀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