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을 받는다면-

 

"담지야.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주말이지만 요모의 모친은 출근, 담지의 모친도 자리를 비웠다. 요모의 집에 담지가 눌러 앉아 있는 건 익숙한 광경이었다.

 

"갑자기?"

"곧 있으면 생일이잖아. 누나가 사 줄게."

"내 생일 알아?"

"2주 뒤 토요일."

"알긴 아네."

 

요모가 삐딱한 자세로 소파에 누워 있는 담지의 허벅지를 때린다. 담지는 그러고도 다리만 굽혀 요모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 준다. 요모는 옆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쇼핑몰을 구경한다.

 

"별로 갖고 싶은 거 없는데."

"너, 여자 친구가 선물해준 데도 그럴 거야?"

"여자 친구 없거든."

 

사춘기 초등학생이 이거 사달라 저거 사달라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담지는 삐딱해도 너무 삐딱했다. 그래 봐야 요모 눈에는 초등학교 5학년생의 귀여운 투정이었다.

 

"배담지, 빨리 갖고 싶은 거 말해."

"선물은 주는 사람이 생각해야지. 그걸 받는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어디 있어?"

 

담지의 말이 틀린 것도 없었다. 요모는 머리를 긁적이며 애들이 좋아할 법한 선물이 뭐가 있나 검색해 본다.

 

"인형 어때? 이거 예쁘다."

"제발."

 

당연히 담지 취향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괜히 놀려본다.

 

"담지 키가 몇cm지?"

"150cm...조금 안 되는데."

"이거 인형 160cm짜리야."

"싫다고."

"싫으면 선물 뭐 받고 싶은지 빨리 말해. 이리로 와."

 

요모는 자기 허벅지를 툭툭 두드린다. 저게 뭘 의미하는지 알지만, 담지는 애 취급당하는 느낌에 잠깐 망설인다. 그래도 자기 아니면 누가 놀아주겠나 싶어 요모의 허벅지에 머리를 뉘인다.

 

"담지 너는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을 거 같은데. 선물 준다는 애 없어?"

"별로, 신경 안 써."

"나쁜 남자네."

 

요모는 한 손으로 담지의 검은 머리카락을 휘감는다. 검은 체스말처럼 새까만 흑발, 물 속에 손을 넣은 듯한 부드러운 머릿결, 반대로 흰 체스말처럼 새하얀 피부. 아직 미성숙한 몸과 얼굴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헷갈리게 할 정도였다. 요모가 보기에도 담지는 인기 많을 미소년 타입이었다.

요모의 아랫집에서 엄마와 단둘이 사는 탓에 철이 빨리 든 건지 또래 애들 치곤 현실적이고 어른스러운 면도 있었다. 그 탓에 요모는 담지와 이야기하다보면 놀려주고 싶은 것도 있었다.

담지도 요모를 잘 따랐다. 가끔 요모가 장난을 치면 바보취급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평소에는 누나라는 호칭까진 붙여주고 하라는 대로는 다 하는 편이었다. 요모의 부친은 지방에 거주중이었고, 모친도 오후에 출근해 밤늦게 들어오는 터라 심심하면 담지를 불러 놀아주거나 밥을 먹거나 했다.

 

"반대로 누나는 선물할 거면 뭐하고 싶은데."

"푸키몬 인형 같은 건 어때?"

"난 인형은 안 좋아해. 게임이면 모를까."

 

담지가 푸키몬을 좋아한다는 건 요모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자애와 여고생의 시선에는 꽤 틈이 있었다. 인형이란 말에 질색하는 담지를 보며 요모가 웃는다.

 

"아니면 남자 친구한테는?"

"남자 친구한테?"

"누나도 고등학생인데 남자 친구 사귄 적은 있을 거 아니야."

 

담지는 몸을 돌려 요모의 배에 얼굴을 묻는다. 다리를 쭉 뻗는 걸 보니 나른한 저녁이 그의 눈을 누르는듯했다.

 

"남자 친구 있던 적 없는데."

"모솔."

"모솔인 게 어때서?"

 

자기보다 여섯 살 어린 남자애여도, 모솔이라는 소리에 발끈하게 된다.

 

"누나 인기 없어?"

"내가 무슨 아이돌이니? 인기가 있네 없네 하게. 그리고 원래 사랑은 그런 거로 정해지는 게 아니거든?"

"뭐래. 모솔이면서."

"야."

 

담지의 말에 말리는 느낌이 들자 요모가 결국 입을 다문다. 요즘 애들은 다 이러나 하는 나이 든 의문을 품는다.

 

"그러면 남자 친구 있다 치고."

 

담지도 말꼬리를 놓을 생각이 없다.

남자 친구가 있는 셈 치고 고민해 보라는 말에 한 사람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감정이 미묘하다. 그에게 어울리는 물건이 뭐가 있을까? 평범한 남자랑은 다를 거란 생각이 든다.

 

"내 취향이면 커플링도 끼워 보고 싶고, 아니면 커플티도 입혀보고 싶고."

"그건 누나 선물이잖아."

"그런가?"

"받는 사람이 뭐 좋아할지를 생각해야지."

 

아마 담지도 모솔일 텐데 자신에게 되려 조언을 한다. 그치만 요모 생각에도 담지의 말이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뭘 선물해야 좋아할까? 생각해 보면 좋아한다고 생각만 했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가 분홍색이고, 얼굴이 예쁘고, 부끄러움을 탄다는 것 말고는 뭘 좋아하는지, 취미가 뭔지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야기를 섞은 적은 많아도 개인적인 무언가를 공유한 적은 없었다.

 

"체스?"

 

공통점은 하나밖에 없었다.

 

"갑자기?"

"같이 하면 좋잖아."

"누나 취향 특이해."

 

있는 셈 친 가공의 남자 친구가 특별한 사람이니 선물도 특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야. 여자 친구한테 받고 싶으면 뭐 받고 싶냐고."

 

아예 낮잠이나 자려고 눈을 감은 담지의 머리에 한 가지 물음표가 띄워진다. 그래서 물어 봤다. 여자 친구한테 선물을 받으면 뭘 받고 싶은지. 그래서 물어 봤다?

머릿속에서 이어진 하나의 결론에 담지의 눈이 뜨인다. 놀랄 만한결론에 잠이 확 가신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선물하려고?"

"뭐?"

 

요모는 그제야 자기 말을 되짚어본다. 물론 고등학생 남자애의 선물을 초등학생 남자에에게 진지하게 질문한 건 아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말에 그런 것이 베어 있었구나 하고 느낀다.

 

"그거랑 상관없잖아. 어쨌거나! 선물 사 줄 거니까 생각해 놔."

"내가 덤이야. 아니면 그 사람이 덤이야."

"덤 같은 소리 하네."

 

예사롭지 않은 예리함으로 담지가 쏘아붙인다. 평소에도 마음을 놓고 얘기하다 보면 담지의 페이스에 말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오늘은 찔리는 느낌이 평소보다 강하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내가 사 올게."

"집에 있어."

"누나는 맛 없는 거 골랐을 거 같아."

 

자리에서 일어난 담지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나갈 준비한다. 누워 있던 요모는 자기 지갑에서 체크카드 한 장을 꺼내준다.

 

"자. 카드."

"됐어."

"가져가."

 

요모가 카드를 거두지 않자 담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얇은 외투를 걸친 담지가 집 밖으로 나간다.

요모와 담지가 거주하는 투룸은 일가족이 살기에는 넓지 않은 곳이었다. 이웃들도 신혼부부라던가 둘이 거주하는 대학생, 대개 그런 사람들이었다. 집이 넓지 않아 생기는 단점이라고 한다면 역시 혼자 있을 때의 압박감이 강하단 것이었다.

 

"진짜. 애 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동생 같은 애를 붙잡고 여자 친구니 남자 친구니 한 것이 확 부끄러워진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선물할걸 담지한테 물어 봤다고? 그럴 의도는 없었다. 담지와 현지는 비슷한구석이 있긴 했어도 역시 다른 면이 더 많았으니까. 현지가 따뜻하다면 담지는 차갑고 시크한 편이었고, 현지가 어린애 같은 면이 있다면 담지는 또래에 비해 어른스러운 편이었다. 굳이 따지면 현지보다는 담서에 가까웠다.

홍담서, 현지를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그 이름이 또 떠오른다. 1학년 때는 서로 서먹서먹한 느낌이었는데 반이 갈리자마자 두 사람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진 것 같았다. 둘 사이가 어떻게 변한 건지는 몰랐다. 어쩌면 담서라는 이상적인 여자에게 괜한 경계심을 품어서 그렇게 보이는걸 수도 있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도 현지와 아무 관계가 아니면서 무슨 경계심을 갖는 걸까? 좋아한다면 고백하면 되는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면...."

 

감정은 복잡하다. 현지가 자신에게 관심도 없다면 짝사랑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었다. 거절당하는 게 무섭기도 했다. 현지의 취향에 대해 아는 거라고 해 봐야 아이돌 가수 시린을 좋아한다는 것뿐이었고 그마저도 키가 크고 몸매가 좋은 시린은 담서와 닮으면 닮았지 자신과는 영 딴판이었다. 마침 시린도 검은 장발이기도 했고. 또 담서가 머리에 떠오른다.

 

"아 진짜."

 

짝사랑의 부끄러움이니 차이는 두려움이니 하는 것보다 가장 큰 감정은 따로 있었다.

만약, 현지와 담서가 서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면, 그사이에 끼려드는 자신은 나쁜 사람이 될 것이 분명했다. 굳이 현지를 흔들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담서와 싸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치만 두 사람의 관계가 예상했던 것이 맞다면,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악인이 되는 것이다. 한발 늦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데도 자신이 언젠가는 현지에게 고백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빨리 오길 바라면서, 오지 않길 바라는 날이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교복을 입고 있는 여학생들이 보인다. 교복을 입었다는 거 빼고는 키도, 얼굴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시간을 생각하면 중학생보단 고등학생일 가능성이 컸다. 고등학생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이스크림 몇 개와 간식거리 과자를 조금 담아 계산대로 간다. 무인 계산대에 서서 주머니를 뒤진다. 연요모, 체크카드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는 다시 집어넣는다. 계산은 엄마가 자신에게 줬던 카드로 하고 가게를 나선다.

저녁은 낮보다 짧다. 밤보다도 짧다. 늦은 낮에 출발한 것 같은데 금세 가로등이 켜지고 하늘빛이 바뀐다.

 

"짜증 나."

 

도로에 굴러다니는 자갈을 발로 툭 걷어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