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관계는 싫어-

 

현지의 방도 변하기 시작했다. 벽의 끝에서 끝까지 설치되어있던 커다란 책상에 담서의 자리가 생겼고 컴퓨터가 한 대 더 설치되었다.

 

"성능은 이 정도면 되지?"

"저는 컴퓨터는 잘 몰라요."

 

중지 말로는 자기가 쓰던 컴퓨터라고 하는데, 담서가 보기에는 현지의 컴퓨터와 별 다를 것도 없었다. 모니터도 키보드나 마우스도 다 중지가 쓰던 걸 다시 설치한 수준이지만, 담서가 보기에는 다 희한한 물건들이었다. 키보드는 무지개빛이 돌고 마우스는 무선, 모니터도 담서가 아는 전자기기 브랜드가 아닌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컴퓨터 기사처럼 어디다 선을 꽂고 어디다 뭘 꽂고 혼자 뚝딱거리던 중지가 컴퓨터를 켜보고 몇 가지 테스트를 마친다. 이제 끝인가 싶었는데 다른 상자 하나를 가져와 검정 판 같은 걸 또 설치한다.

 

"자. 해 봐."

"이게 뭐에요?"

"타블렛, 몰라?"

"컴퓨터로 그림 그리는 도구야."

 

현지가 타블렛 펜을 쥐고 시범을 보인다. 그림 프로그램을 켜고 검은 바닥에 선을 긋자 검은 선이 같이 생긴다. 평생 컴퓨터 부품이라고는 마우스, 키보드만 봐 온 담서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거로 그리면 돼. 일단 적응 좀 하면 내가 뭐 그릴지 보내줄게."

"네."

 

자신의 자리에 앉은 담서가 가벼운 펜터치로 이런 저런 캐릭터를 그려본다. 종이와는 다른 미끄러운 감촉이 어색했지만, 종이에 그리는 것과는 다른 편리함이 매력적이었다. 신세계를 엿본 듯 컴퓨터에 익숙한 현지가 설명하는 이런 저런 기능을 시험해본다.

 

"대단하다...."

"그 정도야?"

 

터치 한 번에 색이 입혀진다던가 잘못 그은 선을 한 번에 지울 수 있다던가 하는 기초기능 하나 하나에 놀라는 모습이 재미있다. 자기가 한 건 없지만, 담서의 어수룩한 모습을 보는 것에 묘한 뿌듯함도 느끼고 귀여움도 느껴졌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하루에 세 시간 정도는 그림에 매진했다. 본바탕이 좋은 만큼 설정을 몇 번 만지고 미끌거리는 감각에 적응하자 준수한 그림이 나올 때까지 일주일 정도 시간이 걸렸다. 펜그림과는 색다른 감각이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면 되나요?"

 

그레이도 아닌 순수 흑백의 모노크롬 그림이지만, 꽉꽉 들어찬 밀도감이 가득한 일러스트 두 장을 중지에게 전송한다.

 

"커버도 아니고 속 일러스트에 이 정도 일러스트 쓰는 사람 나 밖에 없을 거야."

 

자기 방에서 일러스트를 보고 만족한 중지가 지갑을 들고 현지 방으로 쳐들어온다.

 

"자. 5만원, 절반은 타블렛 값으로 조금씩 깎을거야."

"안 주셔도 되는데."

"받아."

"네."

 

빨리 받으라는 압박에 담서는 5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냉큼 받는다. 중지가 방 밖으로 나가자 지폐를 잘 접어 마우스패드 아래에 꽂아넣는다.

 

주말 오전, 아직 중지는 드러누워 자고 있었고 현지와 담서만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 후였다. 풀려가던 날씨는 완연한 봄에 접어들었고 집 안에서 바라보는 창 밖은 햇살을 쐬고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담서야. 쇼핑 갈래?"

"응?"

 

보통은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에게 하는 말이지만, 이 집에서는 반대다. 마침 배구 연습도 없는 주였으니, 주말 일정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쇼핑이라, 담서와는 거리가 먼 생활이었지만, 호기심이 동한다.

이젠 외투를 입지 않아도 되는 날씨, 담서는 얇은 셔츠를, 현지는 펑퍼짐한 후드티를 입고 외출한다.

 

"뭐 사게?"

"그냥 가는 거지. 옷 같은 거 좀 볼까?"

 

현지의 동네에도 나름 상가가 올라가고 있지만, 역시 본격적인 쇼핑을 위한다면 민하역의 상가나 지하철을 타고 인접한 지우시의 백화점으로 가곤 했다. 현지도 직접 다니는 쇼핑과는 연이 없었지만, 여고생인 담서가 옆에 있다보니 괜찮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고보니 지우시는 갈 일이 없었네."

"그런가? 나는 자주 가는데."

 

생각해보면 달리 갈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담서가 원래 살던 곳은 지우시와도 거리가 꽤 있었다.

민하구청역에는 사람이 적었지만, 두 정거장 뒤의 지우시청역엔 시간대와 날짜를 가리지 않고 항상 붐볐다. 길이라도 잃을까 현지가 담서의 손을 꼭 잡아준다. 은근슬쩍이지만, 너무 티나는 모습에 담서도 현지의 손을 꼭 끌어안는다.

두 사람은 서로의 간격이 좁아지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단 걸 느끼고 있었다. 다른 내성적인 커플들에 비하면 스킨십이란 점에서는 이미 입맞춤 빼고는 다 해봤다고 봐도 될 정도로 밀착하고 있었다. 한 집에 살다보니 서로에 대한 신비감은 줄어드는 대신 편안함이 그 자리를 채운 덕이었다.

 

"아 맞아. 담서야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응?"

 

여성의 본능에 따라 쇼핑몰에 들어가서 굳이 사지 않을 물건도 흘끗 흘끗 들여다보고있는 담서에게 현지가 묻는다. 1층의 명품 핸드백에 눈길을 주던 담서가 고개를 돌려 현지를 바라본다.

 

"혹시 만화 그려볼 생각 없어?"

"응?"

 

현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두 사람이 쇼핑을 할 만한 곳은 4층, 5층까지 올라가야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며 올라가는 동안 나누는 잡담이 머릿속에 남는다.

 

"내가 글이랑 콘티, 네가 그림. 어때?"

 

만화, 그림을 그리는 담서도 항상 생각은 했었다. 어릴 때부터 만화책이나 그림 같은 걸 따라 그리던 담서의 본바탕에도 창작이라는 세계에 대한 흥미가 깔려있었다. 그러고보면 현지는 항상 무언가를 쓰거나 세계관을 구축하고는 했다. 어떤 것은 한없이 가볍고, 캐릭터 하나 둘 정도의 물건이지만, 어떤 것은 담서 자신의 눈에는 밀도있고 자세한 설정집처럼 보이기도 했다.

 

"음, 그럴까?"

"재밌을 거 같아."

 

가벼운 웃음과 함께 승낙한다. 현지 입장에서는 담서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의 세계를 구체화하고싶단 생각이 있었고, 담서는 무언가 공유할 수 있는 세계를 원했다. 서로의 원초적인 심상이 구체화되어가고 있지만, 그 소통은 참 간단하고 단순했다.

백화점마다 놓인 코너 옷가게들을 둘러본다. 혼자서 쇼핑하는 사람보다는 남녀 커플이 많았지만, 분홍머리인 현지의 개성적인 모습에 여성 치고는 아주 키가 큰 담서의 듀오가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담서 너는 어떤 옷이 좋아?"

"옷? 글쎄. 신경 쓴 적이 없어서."

"적당히 스타일이라도."

 

담서는 코디라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보통은 교복, 아니면 간편한 티셔츠에 청바지 정도가 코디의 전체였고 사복 입고 꾸며봐야 달리 나갈만한 곳도 없었다. 그에 비하면 현지는 항상 빅 사이즈의 풍성한 옷이나 부들부들한 사복을 입는 걸 보면 코디까지는 몰라도 취향은 확고한 편이었다. 지금도 여성복매장, 남성복매장을 가리지 않고 본인 취향의 옷을 찾아보고 있었다.

담서는 현지의 옷을 자신이 입어 본 걸 상상한다.

 

"이런 거 어때?"

"아니."

 

영 아니었다. 현지야 체격이 작고 동글동글한 이미지였으니 저런 걸 입으면 햄스터처럼 귀엽게 느껴졌지만, 자신이 입은 걸 상상하니 장롱 아래 먼지가 뭉쳐진 것처럼 느껴진다. 담서의 칼대답에 현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옷걸이에 걸어놓는다.

 

"나는 너무 튀는 건 좀."

"그래?"

 

그래도 담서보다는 옷 쇼핑을 자주 해본 현지가 큰 매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옷들을 구경한다. 그 사이에 담서는 다른 사람들의 코디를 살펴본다. 평범한 자신은 꾸미다 만 느낌이 들 정도로 개성적이고 화려한 모습들이 담서의 눈을 어지럽힌다.

 

"이런 건 어떠려나."

 

자기 취향의 옷을 잔뜩 들고 온 현지가 옷 하나를 들고 태그를 확인하는 담서에게 다가온다. 손가락에 옷걸이 하나씩, 3벌이나 되는 상의를 들고 온 현지가 담서의 옷을 들여다본다. 진한 커피색의 후드티, 그것도 반팔이었다.

 

"마음에 들어?"

 

옷이 마음에 드냐는 말이 왠지 부끄럽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인다. 별 것 없는 디자인이지만 색감이 담서의 취향에 꼭 맞았다.

 

"한 번 입어봐."

"응."

 

현지는 원래도 빅사이즈를 즐겨입었고, 체격탓에 뭘 입어도 사이즈 표기만 맞으면 어울리지 않는 적이 없었지만, 담서는 워낙에 키가 크고 가슴이 큰 덕에 입어보지 않으면 어디가 맞고 어디가 빠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담서가 옷을 들고 피팅룸으로 간 사이 현지도 옷을 한 벌 챙겨서 옆 칸으로 들어간다.

입던 티셔츠를 벗고 후드티를 입어본다. 청바지와 머릿결 모두 어두운 색이어서 커피색의 후드티가 튀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가슴부분이 팽팽하긴 했지만, 그건 어느 옷을 입어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후드를 손으로 정리하자 밸런스가 맞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반팔 아래의 흰 피부에 서늘함이 느껴진다.

 

"어때?"

 

그래도 옷을 잘 모르는 자기 평가보단 현지의 평가가 좀 더 정확할 거라고 생각한 담서가 피팅룸 밖으로 걸어나가본다.

 

"짠."

 

팔을 벌리고 옷을 갈아입은 모습을 담서에게 보여준다. 옷을 얼마나 빨리 갈아입었는지, 부들부들한 옷에 문대진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솟아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 모양인지 킥킥거리고 있었지만, 팔을 벌린 모습은 머리보단 자신이 갈아입은 바닐라색의 후드티를 보여주고 싶은 듯 했다.

 

"뭐야?"

"이쁘지?"

 

자기 옷이 어떠냐고 물어보려했는데, 현지의 애교와 포즈에 어울린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밝은 톤이 현지와 꽤 잘 맞았다.

 

"커플티...까지는 아니어도 한 번 맞춰보고 싶었어."

"그러면 나도 이거로 살까."

 

현지의 천진한 웃음을 보니 옷이 더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반팔을 입기에는 아직 쌀쌀한 날씨, 구매한 옷들을 쇼핑백에 접어 현지가 들고 다닌다.

 

나온 김에 점심도 먹고, 영화도 한 편 보고, 다른 매장들도 구경하다보니 두 사람 모두 진이 빠진 채 벤치에 앉아 널브러진다. 익숙한 사람이라면 내내 집 밖을 돌아다녀도 멀쩡하겠지만, 쇼핑은 배구 할때의 체력과는 다른 듯했다.

예상했던 그림과는 다르지만, 텐션이 내려앉은 지금 현지가 자신의 가방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낸다.

 

"자."

"이게 뭐야?"

"열어 봐."

 

베이지색의 상자를 열자 부드러운 녹색의 가죽지갑이 나타난다.

 

"지갑?"

"선물."

 

베시시한 웃음에는 쑥스러움과 즐거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거 안 해줘도 되는데."

"그렇게 비싼 건 아니니까. 너무 신경쓰지 말고...너 카드 없던 것도 그렇고, 저번에도 지폐 마우스패드 아래 두는 거 보니까 지갑 없는 게 생각나더라고. 그래서. 선물."

"고마워."

 

담아둘 만한 건 없지만, 지갑을 자신의 가방 안에 집어넣는다.

 

"아껴 쓸게."

"지갑을 아껴 쓰는 사람이 어디있어."

 

황당한 한 마디에 현지가 담서를 놀린다. 그런 모습마저 귀여워보이기에 담서 역시 따라 웃는다.

 

"그리고 한 마디만 더."

"응?"

 

수 많은 커플들 사이에서 껴안는 모습 정도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지만, 담서와 현지에게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자신에게 와락 안긴 현지를 받아주지만, 놀란 손은 그를 두드려줘야할지 떼어내야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애매한 관계는 싫어."

"응?"

 

현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진지했다. 주변의 소음이 점점 멎어들어간다. 오롯이 현지의 목소리만이 담서의 귀에 들린다.

 

"좋아해."

 

담서는 말을 잃는다. 항상 장난스러운 현지의 진지한 고백이 담서의 입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한 번, 확실하게 해두고 싶었어.... 남자친구라고 해도 괜찮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응."

 

현지처럼 로맨틱한 말을 준비할 순 없었다. 그렇지만, 한 글자의 짧은 한 마디에도 현지는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