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경한 남자-

 

해가 뜨는 시간이 점점 일러진다. 봄, 여름이 싫은 건 아니지만, 새벽 런닝은 어두워야 뛰는 느낌이 살았다. 운동화 하나에 트레이닝복을 입은 간편한 복장을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기 시작한다. 새벽 6시가 되지 않은 이른 시간. 정해진 루트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발 닿는 대로 뛴다. 하루에 왕복 10km는 뛰는 것이 그의 루틴이었다. 짙은 갈색머리, 더워보이기도 하는 풍성한 웨이브 머리가 걸음마다 풀썩인다.

 

"아으."

 

찌뿌둥한 몸을 쭉 늘인다. 쿵쿵거리는 심장의 박동이 전신에 느껴질때쯤 흰 입김과 함께 숨을 고른다. 발 닿는 곳마다 뛰다보니 잘 모르는 주택단지 앞까지 뛰어왔다.

 

"멀리도 왔네."

 

한참 달리고나면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폐에 찬 공기가 들어차는 감각도 좋았고 쓸데없는 생각을 잊고 머리를 새로 시작하는 느낌도 좋았다. 외투에서 핸드폰을 꺼내본다.

자신이 새벽에 일어나는 걸 아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주말 이 시간쯤만 되면 뭐 하자고 떠들어대던 녀석이 요즘따라 조용하다. 싫은 것 까지는 아니었지만, 가끔 귀찮을 때도 있었다. 핸드폰이 조용한 걸 보니 오늘은 약속을 잡지 않을 생각인가보다.

 

"남지나가 그렇게 좋나."

 

다시 집까지 뛰어갈 준비를 한다.

 

일반인이 가장 오지 않을 법한 학원, 목 좋은 자리에 위치한 홈플레이트 야구 아카데미, 대개 어린 초등학생들을 지도하는 아카데미지만 리틀야구는 졸업했을 법한 남학생이 안에서 잡일을 돕고 있었다.

 

"소현일은 요즘 왜 안오냐?"

"걔 여자친구 생겼어요. 놀고 있겠죠 지금."

 

다른 코치 한 명이 아이들을 지도하는 동안 야구공이나 장비, 매트 등을 정리하고는 굴러다니는 상자에 앉아 남은 야구공을 쥐어본다. 여자친구라는 말에 코치가 흥미가 도는 듯 리아를 쳐다본다.

 

"야구하는 놈들은 여자를 조심해야하는데."

"이제 선수도 아닌데요 뭐."

"그냥 남자도 여자를 조심해야해. 너 아는애냐?"

"네. 우리반."

"괜찮냐?"

"에. 뭐. 나쁘지 않아요. 애도 싹싹하고 네."

"넌 안 사귀냐? 고등학생이나 돼서"

"다 별로...."

 

홈플레이트 야구 아카데미, 초등학생 때부터 리아와 현일이 다녔던 야구 아카데미였다. 한 팀에서 같이 은퇴한 투수 윤성희와 내야수 김대진 두 명이서 차린 아카데미였고 갓 개업한 시절부터 6년간 현일과 리아는 이 곳을 다녔었다. 리아는 중학생이 되며 야구를 그만뒀고, 현일도 중학 야구부에 가며 아카데미 자체는 다니지 않게 되었지만, 주말이나 시간이 비면 찾아와 소일하거나 이야기하고는 했다.

점심시간을 앞둔 애매한 시간, 리아도 슬슬 일어나 갈 준비를 한다.

 

"가보겠습니다. 코치님."

"그래. 나중에 소현일이도 데리고 오고."

 

11시 40분, 9시에 도착했으니 3시간 정도는 잘 보냈다. 가끔 자신도 방황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집에 있어봐야 별달리 할 것도 없었다. 날도 맑고 바람도 알맞은 좋은 날, 아카데미 근처 공원에서 산책을 한다.

 

"건물 되게 많이 올라갔네."

 

처음 아카데미에 왔을때만 해도 어수선한 분위기였는데 요즘은 사람도 늘었고 높은 건물들도 솟았다. 생각해보면 처음 온 것이 10년 다 되어간 일이니 변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큰 호수 하나를 두고 산책하는 사람들이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배드민턴이나 농구같은 걸 하는 사람들, 하여튼 사람들이 많다. 이 곳도 자기 집과는 걸어서 꽤 되는 거리지만, 이동 반경이 넓은 리아에게는 다 옆동네 같은 곳이었다.

나른하니 좋다. 소현일이 어디 가자며 귀찮게 하지도 않고, 가끔은 이렇게 여유를 즐길 필요가 있었다. 자유, 불편하긴 해도 좋은 단어였다.

 

"응?"

 

산책하는 사람들 중 익숙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평소의 이미지와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지만, 스친 얼굴이 분명 아는 사람이었다. 인사라도 할까 하는 생각에 리아도 달리기 시작한다.

 

"야!"

 

자신이 소리치며 부르자 뒤를 돌아보지만, 어째서인지 속도를 더 올린다. 무슨 도둑도 아니고 뜬금없는 추격전에 사뿐사뿐 걷던 리아가 속도를 높인다. 100m도 못가서 추격전은 끝나고 만다.

 

"야! 왜 도망가?"

 

리아가 어깨를 확 붙잡고 도망가던 아이를 제지한다. 달랑거리는 땋은 머리가 호흡에 맞춰 풀썩거린다.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마른 숨을 크게 내쉰다.

 

"왜...."

"인사나 하려고."

 

몇 걸음 뛰었다고 숨이 넘어갈 기세의 채리에 비해 리아는 방금 전까지 쉬다 온 듯 편안했다. 대답할 기력도 없어보이는 모습에 우선은 벤치에 끌어앉힌다.

 

"너 그렇게 뛰면 숨 넘어간다."

"얼마...뛰지도...않았어...."

"물 좀 사올까?"

 

채리는 고개를 털듯 흔든다. 그래 그래라 하며 리아가 고개를 뒤로 넘긴다.

 

"옷 이쁘네."

"뭐."

 

평소의 교복차림과는 다른 화사한 분위기, 조용한 이미지에선 상상할 수 없는 연분홍빛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리아는 나름 칭찬으로 한 소리였는데, 채리의 반응은 날카롭다. 그녀의 반응을 보고는 옷은 더 캐묻지 않기로 한다.

 

"운동하던거야?"

"응."

"살 빼게? 말라서 뺄 것도 없잖아."

"알 바 없잖아."

 

리아의 무신경한 한 마디에 채리의 반응도 날카로워진다. 다만 어렴풋 평소와 반응이 다르다는 것만 짐작한 리아가 안좋은 일이 있나보다 하며 넘길 뿐이었다.

 

"근데, 왜 여기있어?"

"나?"

"집이랑 멀지 않아? 학교 근처에 살잖아."

 

공원은 학교가 있는 민곡동과는 지역구만 같다 뿐이지 꽤 먼 거리였다. 지하철로는 한 번 갈아타야했고, 버스를 타도 한 번에 올 노선이 없는 곳이었다. 학교의 누군가가 알아볼까봐 집 근처에서도 조금 떨어진, 지우시와 길 하나 건너 수준으로 인접한 공원에서 달리고 있었는데 리아를 보고 말았다. 다른 애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지만, 불편한 건 매한가지였다.

 

"나 예전에 운동하던 아카데미가 이 근처에 있거든, 인사 할 겸 들렀다가 집 가기는 애매하고 그래서 산책이나 할까 하고."

"운동? 아 야구 했다고 했지."

"응."

 

아직도 숨소리를 뱉는 채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를 하는 리아가 신기하기만 하다. 체력이 이렇게나 다른 걸까?

 

"너는 운동 좋아해?"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냥 하는거지. 달리기던 웨이트던.... 너도 좋아하니까 하는 거 아니야?"

"그런 건 아니야. 오늘 처음 나온거고."

 

혹시나 해서 떠보았지만 채리는 역시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고보니 지나는 소현일이랑 야구보러 간다던데. 너는 안 갔어?"

"아 그랬냐? 아직 출발 안했을 거 같은데?"

"아냐. 일찍 가서 쇼핑몰이랑 뭐랑 구경한다고 그랬어. 아니 그게 아니고, 너는 안 가? 야구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당연히 리아도 같이 갈 거라고 생각한 걸까? 리아가 공원에서 산책하고 있는 것이 신기한 듯 했다.

 

"나도 좋아하긴 하는데, 걔는 보통 가족들이랑 같이 가서. 나는 집에서 보는게 좋아."

"그러면, 부모님 대신 지나랑 간 건가?"

"따로 갔겠지. 걔네 부모님도 야구 엄청 좋아하는데. 너는 야구 알아?"

"아니. 근데 지나도 야구 한 번도 안 봤을 걸?"

 

뭔지도 모르면서 야구를 보러 간다. 리아는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정도 짐작가기 시작했다.

 

"운동하는거 좀 도와줄까?"

"달리기만 할거야. 근육이니 뭐니 이런 건 잘 몰라. 별로 관심도 없고."

"달리기는 왜 하는건데? 뭐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냥 하는 거라고."

"그냥이 어디있어."

 

여자애라 그런걸까? 대화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리아는 무신경한듯 무관심한듯 그러려니 하지만, 채리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스트레스였다.

 

"어디 가서 점심 먹을래?"

"집 가야해."

"바래다 줘?"

"아냐. 갈게."

 

평소와 확실히 다른 반응, 어딘가 예민하기도 하고 까탈스럽기도 한 느낌이 다른 사람 같았다. 안 좋은 일이 있나보다 하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고 무슨 일 있냐고 캐묻는 것도 이상했으니, 일단 내버려두기로 한다. 벤치에 앉아서 자신과는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걸 지켜보다 리아도 일어선다.

 

리아와 얘기하는 통에 별로 뛰지도 못했지만, 트레이닝복 안에 받쳐입은 흰 티는 열기에 젖어있었다. 트레이닝복과 티셔츠, 속옷까지 모두 벗고 욕실로 들어간다.

나리아, 예상은 했지만 무신경한 녀석이었다. 몇 걸음 뛰지도 않았는데 숨은 차고 땀, 열기, 가쁜 숨 때문에 얼굴도 엉망인데 신경 안쓴다는 듯 얼굴을 들이민다. 그러면서 운동을 하는 이유가 뭐냐니, 그런 걸 뭐하러 물어본단 말인가. 말라서 뺄 것도 없다니. 마르단 걸 알고는 있지만 그런 것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채리는 한 걸음 떨어져 욕실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본다. 2차성징이 오긴 한 건지 의심갈 정도로 밋밋한 몸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아까의 수치를 본 것이 그나마 나리아여서 다행인 수준이었다. 다른 녀석이었으면 부끄러워서 도망쳤을 것이다.

타월로 몸을 닦고 머리를 말린다. 밖에 나갈 때는 머리를 땋고 머리띠를 했지만, 이제 나갈 계획도 없었으니 풀어헤친 채로 집 안을 돌아다닌다. 트레이닝복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세탁을 돌린다. 다 된 빨래는 탁탁 털어 건조대에 널어놓고 바닥에 드러눕는다.

 

"운동 해야하는데."

 

100m도 못가서 숨이 차는 건 역시 보기 싫었다. 그 녀석이라면 괜찮겠지 하며 핸드폰을 들어올린다.

 

"진짜로 운동하는 거 도와 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