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5화: https://arca.live/b/lovelove/66154574)

(2화: https://arca.live/b/lovelove/68452137)

(3화: https://arca.live/b/lovelove/70781308)

(4화: https://arca.live/b/lovelove/72747617)

(4.5화: https://arca.live/b/lovelove/74333417)

(5화: https://arca.live/b/lovelove/80371699)

(6화: https://arca.live/b/lovelove/83188625)

(7화: https://arca.live/b/lovelove/85138554)

(7.5화: https://arca.live/b/lovelove/85144070)

(7.9화: https://arca.live/b/lovelove/94870502?p=1)

(8화: https://arca.live/b/lovelove/94871307?p=1)

(9화: https://arca.live/b/lovelove/94872221)

(9.5화: https://arca.live/b/lovelove/94886113)

5월의 끝이 다가오기 시작한 5월 20일이다.
그간 참 많은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 업무가 꽤 많이 밀려 있었다. 진로상담과 같이 학생들 관련된 건 미리 해놓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다음달까지 격무에 시달릴 뻔 했다.

오늘도 종례를 위해 교실로 들어선다.
체육대회가 있다보니 다들 들뜬 채로 반티관련 토의를 하는 중인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체육대회이기도 했지.
청문회 때문에 출근을 못하다보니 잊고 있었다.

"뭐하나 했더니 반티 고르고 있었구나. 그런데 어떡하냐. 그거 쓰더라도 여름방학 교류회에서나 쓸 수 있을 텐데."

"에이, 거짓말 하지 마세요 ㅋㅋㅋ"

"아니, 그렇게 될 걸? 
체육대회는 꽤 이전에 형평성 문제 때문에 복장을 체육복으로 통일했거든. 예전에 누가 반티에다 무허가 지원장비를 숨겨서 쓴 게 문제가 됐나봐. 
그래도 교류회에선 입을 수 있잖아. 그런데 너네 이거 한 번 입고 버릴 거로 고르진 마라."

5분 정도 토의한 끝에 반티는 대강 결론이 났다.

"대강 결론이 난 거 같으니 종례하자. 체육대회가 곧 있다보니 다들 들떠 있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공부를 손에서 놓거나 하진 말고. 알겠지? 그리고 아직까진 조기 귀가령이 유효하다보니 야자 일정은 아직 잡힌 바가 없으니까 별도로 말이 있기 전까진 현재처럼 하교해도 될 듯 하다."

"그런데 학교 나와서 다른데로 가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러면 조기귀가는 의미 없지 않나요?"

"그러게 말이다. 높으신 분들 의중이란 게 알다가도 모르는 거라 이해가 안될 때가 많긴 해. 
오늘은 여기까지. 
청소는 대강 쓸기만 하자. 다 끝나면 올라와서 끝났다 하고 가고."

녀석들, 금요일이라 그런지 하교가 참 빠르다. 
하긴 나도 제자들 나이대에 저랬으니 이해는 간다. 나도 일 마치러 교무실로 올라가야겠다.

교무실에 올라가니 내 옆자리에 있던 김 선생님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퇴근을 서두르고 있었다.

"하 선생님, 오늘도 시간 외 근무입니까?"

"예, 할 일이 좀 많네요. 그래도 오늘이면 다 끝날 거 같습니다."

"이야 행정업무 꽤 많이 밀렸던데 진짜 힘들겠다 그죠?"

"아 조용히 하십쇼."

"아 예예, 수고하십쇼. 전 갑니다 ㅋㅋㅋㅋ"

하..김 선생님을 내가 몇 번 놀렸더니 사람 놀리는 게 물이 오른 듯 하다. 
뭐, 어쩌겠나. 놀린 내 잘못이지. 
업무에 집중하자. 시간이 촉박하다.

그렇게 밀린 업무를 처리하려고 데스크탑을 켠 순간 몇몇 쉬운 업무를 제외하곤 대부분 처리가 되어 있었다.
김 선생님이 우리 반 부담임이기도 했고 당시에 내가 청문회로 바빴다보니 나 없을 때 업무 처리를 해놓은 모양이다.
감사인사라도 해야겠다.

"김 선생님, 다름이 아니라-"

"아 보셨구나 ㅋㅋㅋㅋ 한동안 바쁠 거 예상하고 어느 정도는 해 뒀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에이 뭐 그런거 갖고 그러십니까 ㅋㅋㅋㅋ 서로 돕는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밥이나 사십쇼."

"예. 나중에 사도록 하죠."

"예 들어가십쇼."

"예."

4시 10분, 행정업무가 마무리가 되어갈 때 쯤 서현이하고 승재 두 명이 올라와서 청소 끝났다고하고 하교했다. 
저 둘,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나 보다.
학기 초부터 붙어다니더니 지금은 거의 부부같다. 저 두명을 보다보면 예전의 나와 수림이가 보이는 것 같아서 그런지 저 둘을 보면 흐뭇한 감정이 올라오곤 한다. 

그렇게 감사와 추억에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일은 다 끝났고, 당분간 나를 건드릴 사건이나 사람도 없을 테니 주말을 만끽할 생각으로 꽤나 행복하다.
집에 도착했을 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대강 씻은 후 한 동안 못 읽은 논문을 읽으려고 책꽂이에 손을 뻗은 순간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떨어진 물건을 대강 살펴보니 예전에 특기대 소속으로 복무하던 당시 받았던 군번줄이었다.
당혹스럽다. 그때 그 시절 물건은 이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꼴도 보기 싫어 다 태우거나 분자 단위로 분해해서 처분한 줄 알았는데.

"아, 젠장. 그 시절 물건은 다 처분한 줄 알았는데. 
넌 구질구질하게 내 근처를 맴도는구나."

생각해 보니 악연과 인연이 시작된 때가 11년 전의 5월 20일이었다.
아직도 5월 20일 오후 4시만 되면 그 순간이 떠오르곤 한다.

.
.
.

5월 20일, 연도 불명, 서울, 비상고등학교 1학년 교실.
한국 표준시 기준 15:30.

"종례하자. 
곧 있으면 모의고사 있으니까 다들 준비 잘 해라. 여러모로 분위기가 뒤숭숭한 건 알지만 너희들도 너희들 나름대로의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하니까,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자. 알겠지?
오늘은 여기까지. 청소는 대강 쓸고만 가라."

그날도 여느 때처럼 종례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입시의 압박이 작게나마 한 걸음 다가오고 있는 것을 빼면 평범한 일상이었다.
다만 그 날이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려오다보니 어느 새 학교에서 꽤 떨어진 사거리까지 왔다. 학교가 서울 중심부에 있다보니 가끔 사거리를 경유해 하교하다보면 사람들이 항상 붐비던 모습이 종종 보였지만 유난히 오늘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사거리의 보행자 신호등이 모두 초록색으로 전환된 순간, 일은 발생했다.

5월 20일, 연도 불명, 서울, 비상고등학교로부터 조금 떨어진 사거리.
한국 표준시 기준 16:00.

모든 차들이 멈춰선 순간, 차도에 서 있는 몇몇 검은 밴에서 총기류와 폭탄 조끼로 무장한 테러범들이 내렸고, 이 말을 시작으로 그 사람들은 총격을 시작했다.

"공화국 만세!"

이 말이 들리자마자 미친듯이 근처 상가로 도망갔다. 아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비상계단을 통해 5층쯤 올라갔을까, 총격이 가해지는 소리와 사람들이 비명 지르는 소리가 대피한 건물 벽을 뚫고 내 귀를 찢었다.

난 그저 비상구 옆에 웅크린 채 떨며 총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난 나 자신도 지키기 버거웠고, 바깥에 있는 모두를 지키기엔 힘이 너무 모자랐다.
너무 무섭다. 누군가가 와서 여기 있는 모두를 도와줬으면 좋겠다.

총격이 시작된 지 10분째, 총소리하고 폭음, 비명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건물 안으로 대피한 사람들을 쏘는 모양이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위험해진다.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누군가가 5층으로 올라왔다.
다행히 군인이었다. 그 군인은 생존자를 찾아낸 게 기쁜 듯 안도한 표정을 하고 내 방향으로 달려왔다.

"괜찮니? 박 상사님! 생존자가 있습니다!"

"알겠다. 발견한 생존자부터 빨리 대피시켜. 시간이 없다. 곧 있으면 초능력자 부대ㅡ"

순간 굉음과 함께 군인의 무전이 끊겼고, 그 군인은 곧바로 나를 데리고 2층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폭발로 인해 무너져 내려서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대신 그 군인분은 나를 2층에서 지상으로 내려주셨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400m정도 직진하면 헬기가 대기하고 있을 거야. 가자."

군인분의 엄호 아래 헬기가 대기하고 있는 곳까지 거의 도착했다. 그렇게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한 순간, 어떤 여학생 하나가 파편에 깔린 채 우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이 깔려 있어요. 도와줘야 할 거 같은데.."

"안타깝지만 저 사람은 못 살려. 내 외골격 장치로 완전히 들어올리기엔 무게가 너무 무거울 뿐더러 설령 저 파편을 들어 올려도 저 사람 살릴 수 있단 보장이 없어."

"그럼 저라도 할 겁니다."

"야! 안된다니까! 너 거기서 머뭇거리다가 테러범들한테 죽어 인마!"

난 군인의 말을 무시하고 도움을 청하는 여학생에게로 달려갔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양심에 따른 것도 있었지만, 가망이 없단 말을 들었을 때 저 사람의 운명을 남이 함부로 결정하게 두지 않겠단 생각이 나를 움직였던 것 같다.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여긴 왜 오신 건가요..?"

"꺼내주려고 왔어요."

"그냥 가세요. 여기서 저 때문에 고생하는 것 보단 차라리ㅡ"

여학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 가방을 내려놓은 채 이미 파편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편을 잡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철근에 오른쪽 쇄골이 꿰인 채 거대한 크레이터로 추정되는 폐허에 철근과 함께 박혔다.
철근이 박힌 것으로 인한 고통의 와중에도 겨우 눈을 떠 앞을 보니 내 앞에 북한군의 것으로 보이는 군화가 불붙은 채 내 눈 앞에 멈춰서 있었다.

"다 뒈딘 줄 알았는데 아직 살아있는 간나가 있었구만 기래. 용기가 참 가상하긴 하다만, 반동놈을 살려둘 순 없지. 잘 가라."

그러고 그 테러범은 가지고 있던 권총의 탄창에서 탄 하나를 꺼내더니 순식간에 고열을 흘려넣어 격발했다.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나는 줄 알았다. 저 탄두는 분명 내 전두골을 뚫고 후두골로 나올 게 뻔했으니까.
그러나 마지막을 직감하고 눈을 감은 순간 격발된 탄은 내 피부 위 2mm에서 튕겨져 나와 정확히 발사된 시작점으로 향했다. 
탄은 정확히 시작점에 위치한 탄피 바닥을 뚫고 테러범의 엄지손가락을 꿰었다.

자신이 쏜 탄두에 맞은 게 당황스러우면서도 꽤 분했는지, 그 테러범은 왼팔을 달군 채 나를 지지려고 달려들었다.

"이 간나새끼..."

나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테러범 녀석이 달려들어 주먹을 내지른 그 순간, 바로 왼팔로 주먹을 막은 다음 몸을 날려 테러범을 넘어뜨렸다.
그러자 테러범은 바로 전술조끼 왼쪽에 꽂힌 칼을 꺼내 내 목을 찌르려 들었지만 아까 전처럼 빗겨나가 땅에 박혔고, 테러범은 땅에 꽂힌 칼은 버려두고 왼팔을 다시 달궈 나를 타격했다.

그렇게 손과 발이 오가며 싸움을 이어나가던 중, 테러범이 나를 때려눕히고 결정타를 먹이려던 그때, 내가 싸우고 있던 크레이터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테러범은 머리가 뚫린 채 내 위에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땐 아까 그 군인이 교복 상의 일부를 절개한 채 상처에 거즈를 밀어넣고 있었다.

"구하러 오셨군요."

"너가 아까 폐허로 달려갔을 때 나도 마음의 변화가 생겼거든. 국민을 보호하도록 임무를 받은 사람이 임무를 팽개칠 순 없잖아?
지금 출혈이 심하니까, 무리해서 움직이진 말고. 알겠지? 내가 너 발견했을 때 의식을 잃었었어."

테러범을 겨우 쓰러뜨리고 군인의 부축을 받으며 크레이터를 빠져 나왔을 때는 해가 폐허가 된 시가지를 지나며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지럽다. 아까 쇄골에 박혔던 철근 때문에 출혈이 심했던 건지 아무래도 얼마 못 버틸 거 같다.
그래도 내가 구하기로 한 사람은 구해야 한다.

여학생이 깔려있던 파편으로 다시 가보았다.
여학생은 여전히 파편에 깔려 있었고, 탈진해 있었다보니 지금 당장이라도 빼내지 않는다면 탈수로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일단 파편부터 치워야 한다.

"잘 들어, 파편 무게가 상당히 무겁기 때문에 파편을 완전히 들어올리진 못하고 사람 빼낼 수 있는 틈만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 거 같다. 내가 파편을 조금 들어올리면 넌 저 여학생을 빼내줘. 할 수 있지?"

그 군인이 파편을 들어올리려던 순간, 난 왜인지 모를 자신감 때문인지, 아니면 능력을 깨우쳤단 사실을 알게 된 것 때문인지 그 군인을 제지하고 대신 파편을 들어올렸다.
놀랍게도, 그 무거웠던 파편은 종이 뒤집듯 가볍게 뒤집혔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땐 초능력을 완전히 각성하지 못했던 탓인지, 벡터의 조작을 수치화해서 한다기보단 무작정 힘을 가하는 방식으로 초능력을 사용중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여학생을 구하고 착륙지점에서 헬기에 올라탔을 때, 그 군인이 여학생이 실린 들것을 올린 뒤 마지막으로 헬기에 올라타고 나에게 헤드셋을 씌워준 뒤 입을 열었다.

"너...초능력자였구나."

"저도 방금 알았어요."

"하긴, 내 주변인들 이야기 들어보니 그럴만 하겠더라."

"그나저나 이 헬기는 어디로 향하죠?"

"국군수도병원. 서울 대부분의 병원이 꽉 차서 현재는 가까운 군 병원으로 환자들을 이송중이야.
그나저나, 통성명도 제대로 한 번 못했네. 너 이름이 뭐냐?"

"하민수요."

"그렇구나. 난 김상현 중사라고 한다ㅡ"

그 순간 출혈 때문인지, 아니면 긴장이 풀린 탓인지 난 헬기에서 그대로 뻗어버렸고, 다시 일어났을 땐 국군수도병원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전화 기록을 확인했을 땐 거의 100건 넘게 부재중 전화가 왔었고, 대부분 부모님이 건 것이었다.
일단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현재 상황을 말씀드렸고, 난 괜찮을 거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남은 불안함을 해소하고 싶었던지, 난 어느새 몸을 바깥으로 이끌고 있었다.

병실 근처의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밤공기를 느끼던 중, 그때 그 여학생이 나를 알아본 건지, 내가 앉은 벤치로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그땐 감사했어요."

"제가 하려던 일을 했을 뿐인데요. 다리는 괜찮으신가요?"

"네. 다행히.."

"그런데 혹시 이름 좀 여쭤봐도 될까요? 적어도 저 구해주신 분 이름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하민수입니다. "

"전 한수림이라고 해요."

이 말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러던 중 같은 학교를 다니며, 같은 학년이란 것 까지 알게 되었다.
일단은 퇴원하고 나서 학교에서 보자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각자의 병실로 돌아갔다.
그날, 나와 수림이의 이야기와 앞으로 닥칠 악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