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빈츠는 1916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6년 뛰어난 공부 실력과 매우 높은 IQ(165)라는 것 덕분에 4학년에서 월반하여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중학교에서 1번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고 하며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바로 스킵하고 영국에서 알아주는 대학교인 옥스퍼드 대학교 의대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1940년 의료 봉사를 한반도로 가기로 결정하고 한국어를 배우다 1942년 1월 2일 영국을 떠나 같은 해 8월 32일 해주에 도착하였다. 그는 황해도지사를 만난 다음 의료 봉사를 하고 싶다고 말하자 지사를 만난 다음 의료 봉사를 하고 싶다고 말하자 도지사는 빈츠를 마차에 태워 재령군 동영면으로 이동시켜주었다. 1942년 9월 4일, 동영읍에 도착한 그는 가장 먼저 알바를 뛰었다. 그는 그림을 그려 돈을 벌었으며 그는 곧 동영읍에서 4번째로 돈이 많은 부자가 되었다. 1946년 그는 벌은 돈으로 빈츠 의원을 설립하였고 재령군의 아픈 사람들을 진료해주기 시작하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해주었고 사람들은 그를 신임하고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생각했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동굴에 숨어 사람들을 대피시킨 다음 동굴에서도 총상을 입은 사람들을 치료해주기 시작하였고 1952년에는 사람들이 기다리느냐 진료를 받지 못할 것을 걱정해 빈츠의학대학교를 건설하고 빈츠의원을 송은시, 매천시 곳곳에 지점을 내었으며, 1959년에는 결국 황해도 전역에 빈츠 의원을 설립하게 되었고 빈츠의학대학교는 전국에서 유명한 의과 대학교가 되었다. 그는 너무 힘들게 일한 나머지 쓰러지기도 했으며 결국 너무 힘들어서인지 1962년에 은퇴하여 빈츠의학대학교의 선생님으로만 일을 했고 가끔식 그림을 그리며 살게 되었다. 그는 1980년 폭도 떼들이 동영읍을 습격하자 그는 자신만 죽을 테니 사람들을 죽이지 말라고 부탁하였고 폭도 떼들은 부탁을 받아들여 동영읍 설화리에서 그를 죽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아픈 사람들을 걱정하며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위대한 의사이자 화가였다. 현재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자 빈츠박물관을 공당동에 설립하였으며 빈츠 생가 등 빈츠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보존하고 있다. 공당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그를 기억하고자 리 이름을 설화리에서 공당리로 바꾼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그림


위 사진은 자신을 과자로 표현한 작품으로 현대 사람들도 아직 해석을 못 하고 있다. 제목은 자화상이다.

이 외에도 폭도들의 습격, 송암강 너머, 국군과 북한군이라는 작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