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테온의 동쪽 숲과 이어진 서쪽 평원에는 판테온 전 지역을 통틀어 제일 만만하다고 여겨지는 몬스터인 바나로비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 숲의 나무줄기를 어딘가 엉성해보이게 엮어놓은 입구로 들어가면,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을 법한 비밀기지가 있다. 높지는 않지만 주변을 경계하기 위한 망원경을 갖춘 감시탑, 분위기를 내기 위해 근처에서 잡아온 바나로비가 있는 작은 감옥, '헬리시움 공격대 파이어'나 '헬리시움을 탈환할 정의의 사도' 등의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어있는 보드, 각종 잡동사니나 상자들까지 제법 갖출건 갖춘 아지트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지는 꽤 오래되어 보이는 이 아지트의 입구 근처에 판테온의 용족 소녀, 티어가 접이식 의자를 펴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앉아있었다. 티어는 기분이 좋은 듯 내내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지만, 따분한지 이따금씩 잡아온 바나로비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기도 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 하던때, 근처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비록 엉성해서 누구라도 이곳을 보고 '비밀'기지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역으로 이곳에 일부러 찾아올만한 인물은 티어를 제외하곤 이제는 한명밖에 남지 않았다.


"안녕, 티어. 진짜 오랜만이다."


발자국 소리의 주인인 용족 소년 카일이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 자체가 들뜬 느낌은 아니었으며 꽤나 건조한 인삿말이었지만, 그것은 그의 타고난 성정이 워낙 신중하고 온화한 탓이기도 하고 용족의 수호자인 카이저로서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여러 일을 겪다보니 성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소꿉친구로서 그와 어릴적부터 함께했던 티어는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카일이 무척 반가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티어 또한 만연의 미소를 띄운 채 화답했다.


"카일, 안녕! 잘 지냈어? 카이저가 메이플 월드의 타락한 초월자를 물리쳤다고 벌써 소문이 자자하던데. 역시 카일이야. 축하해! 무사히 돌아와줘서 정말 기뻐!"


"고마워. 메이플 월드와 그란디스의 용사들을 비롯한 모두가 도와준 덕분이야. 물론, 티어 너도."


"그런가? 난 여기 남아서 응원만 했을 뿐인데, 헤헤.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니 엄청 고마운데?"


티어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지만, 사실 정말로 판테온에 남아 응원만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메이플 월드의 타락한 초월자, 검은 마법사와의 결전에서 카이저와 함께 등을 맞대고 전장을 누볐던 노바의 아이돌 '엔젤릭버스터'의 정체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전이 끝나고 '엔젤릭버스터'로서는 이미 유렌스의 오두막에서 카이저와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카이저는 엔젤릭버스터의 정체를 몰랐고, 티어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따금씩 아지트에 들러 안부 대신 그녀가 좋아하던 반짝이던 돌을 놔두고 가곤 했다. 일전의 만남에서는 엔젤릭버스터로서, 그 선물에 대한 티어의 감사를 전달하기도 했다.


'...혹시 다른 말은 없었나요?...어떤 표정이던가요?...제가 알던 옛날의 티어였다면 그런 하찮은 선물에도 감동해서 틀림없이 울었을 거예요. 그리고 나선, 퉁퉁 부은 눈으로 바보처럼 웃었겠죠.'


감사 인사와 그때 지어 보였다는 환한 미소에 대한 말을 들은 카일은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었다. 티어가 오늘 굳이 엔젤릭버스터가 아닌 '티어'로서 그를 만나러 온 것은 '어쩌면 그가 나를 걱정했던건 지금까지 받기만 해서 돌봐줘야 하는 존재로 비춰졌기 때문일까' 하는 생각에 그녀 나름대로의 생각을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였다.


"저, 카일. 엔젤릭버스터에게 들었겠지만 역시 직접 말해야겠다 싶어서. 아지트에 놔둔 돌멩이, 너무 예쁘더라! 너무 근사해서 나 무지무지 감동했잖아. 정말 고마워."


"엔젤릭버스터가 네 칭찬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구나...기뻐해줘서 다행이야."


"응! 그래서 오늘은 나도 선물을 하나 준비했는데, 짜잔!"


티어는 앉아있던 자리 앞에 있던 바나로비가 든 감옥을 카일에게 내밀었다. 카일은 잠시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싶어서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실망한 기색이나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간 그녀가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은 웃으며 감사를 표현했다.


"와, 멋진데? 정말 고마워!"


"헤헤, 보답이 될진 모르겠지만. 우리 어릴때 기억나? 헬리시움 공격대 만들었을때 포로가 필요하다고 바나로비를 잡아다놓곤 했었잖아. 어릴때라 벨데로스랑 네가 꽤나 고생 좀 했었지, 후훗. 옛날 생각 나서 좋지 않아?"


티어의 어린시절 회상에 카일은 머릿속에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그런데 잠깐, 아무리 약한 몬스터라지만 너 마력이 없어서 바나로비는 제압하기 꽤나 힘들었을텐데?"


"아, 그게 말이지..."


티어는 카일이 일전에 지어보였던 슬픈 표정을 떠올리고는 씁쓸한 얼굴로 잠시 침묵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맞아. 어릴 땐 바나로비한테 얻어맞고 넘어져서 엉엉 울기도 했었지. 그럴때마다 벨데로스랑 네가 기죽지 말라고 말하면서 뛰쳐나가서는 반나절만에 상처투성이인채로 나타나서는 잡아온 바나로비를 아지트에 가져오곤 했었잖아."


"티어..."


"엔젤릭버스터에게 들었어. 내가 혼자서도 잘 지낸다는 말을 듣고 쓸쓸한 표정을 했다며? 네가 걱정하는 것 같아서 옛날의 그 울보 티어가 아니라는걸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싸워서 바나로비를 혼자 잡아와봤지! 나, 마력은 없지만 지지 않으려고 정말 열심히 수련했어. 이제 강해져서 판테온 사람들이 놀리거나 수군대도 위축되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구!"


카일은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엔젤릭버스터에게 티어가 혼자서도 잘 지낸다는 말을 듣고 안심했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자신이 돌봐주지 않으면 항상 위축되어 어디선가 울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어쩌면 자신이 돌봐줘야 하는 울보 티어로 남아줬으면 하는 욕심이 남은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엔젤릭버스터의 말대로 티어도 어엿한 기사단에 못지 않게 성장해있었다. 더 이상 바나로비나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노바족들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여기서도 자신이 울거나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면 티어는 또 다시 울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카일은 쓸쓸해하는 대신 그녀의 성장을 인정하고 축하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나 울보 아니다? 어디 가서 막 옛날얘기하고 그러ㅁ...잠깐! 머리는 왜 쓰다듬는거야!"


"아하하하하하하하! 진짜 대단한데, 티어! 이제 정말 내가 돌봐주지 않아도 되겠어. 울보라고 놀려서 미안. 엔젤릭버스터랑 며칠만 안봐도 오래 못 본것 같을 정도로 친한 친구라길래 그정도는 알고 있을 줄 알았지."


티어는 뭐라 더 항의의 말을 하려다 얼굴을 붉히고는 볼을 부풀려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이내 계속 소리내어 웃고 있는, 노바 수호자 카이저의 보기 드문 모습에 소꿉친구로서 같이 웃으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 후 지쳐서 아지트의 한쪽 구석에 잠들때까지, 그란디스의 여러 달빛을 조명삼아 둘은 밤새 헬리시움 공격대의 추억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치기는 했지만, 장절한 싸움 이후 둘에게 있어서는 자나로비의 이슬보다도 달콤한 휴식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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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버 카이저 안 키워봐서 캐붕이나 설정오류 있을 수 있음 뿌직뿌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