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가지 설정 변경이 있습니다. 이 점은 소멸의 여로의 기존 스토리라인과, 본 소설의 내용을 보고 적당히 짐작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동굴 어느 깊은 곳에서 태어났다.


동굴 구석의 수많은 알들이 모인 군집 속에서, 거대한 모체가 낳은 알의 껍데기를 뚫고 나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에메랄드 빛으로 은은히 빛나는 자태, 하지만 그 본질은 생명력만을 갈구하는 열등하기 짝이 없는 애벌레.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저들과 다랐다. 나는 짐승적인 본능이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성찰할 수 있는 지성이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이곳은 어디인가. 나를 낳은 어미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눈을 뜨고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을 무렵 나는 무리들 중 나와 같은 존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형제들은 오히려 자신의 탐식을 방해하는 나를 물어뜯어 쫓아내기 바빴다. 더 이상한 녀석들은 동족조차 거리낌없이 포식했다.


난 혼자였다. 감정이 북받치자, 시각을 담당하는 기관에서는 알 수 없는 맑은 분비물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나는 믿었다. 내가 이렇게 태어난 것. 형제들과 다른 존재인 것. 거기엔 이유가 있을 거라고, 필연적인 목적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나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동굴의 주인이자 나의 군주, 나의 어머니 아르마님을 위하여 나는 태어났구나.


초록 벌레들이 동굴 전역의 생물체의 씨를 말릴 무렵, 동굴 바깥에서 낮선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 저것은 포효도, 울음소리도 아니었다. 말이었다. 언어였다. 드디어 나와 닮은 자들이 나타났구나.


그러나 기뻐할 것도 잠시, 그들에게서 너무 낯선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느꼈다. 마력과 에르다가 풍부한 자들. 저들은 내 친구가 될 자들이 아니다. 저들은 양분이다.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시간동안 짐승이 아닌 존재로 살아온 만큼 마법을 운용하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저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는 모습을 바꾸었다. 다섯 손가락과 다섯 발가락을 지닌, 두 팔과 두 다리, 털이 무성한 머리, 붉은 피가 흐르는 몸, 그리고 전신에 두른 천과 도구들을 모조리 베껴내었다. 몸에서 내뿜는 에르다와 마나의 파동 또한 감쪽같이 속였다. 그들의 숙소에 몰래 찾아가서 엿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무리에 합류했다. 이름도 적당히 지어냈다. 나의 이름은...


"아... 안녕하세요! 이번에 안식의 동굴 탐사에 참여하게 된 리노에요, 헤헤"


"리노? 하지만 우리가 받은 보고서에는 너 같은 어린애가 참여한다는 얘기는 없었는걸? 그도 그렇고, 너 로브는 어디있니? 시간의 신전 탐사대를 상징하는 브로치는?"


나는 앞서 이곳에 왔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누군가의 브로치를 꺼내들었다. 로브가 없는 이유 또한 에르다스의 습격을 받았을 때 로브가 찢어져 망가졌다고 둘러댔다. 몸에서 괴수의 냄새를 지운 덕분에, 뛰어난 대마법사인 그들은 내 어줍잖은 변명에 쉽게 넘어갔다. 껌뻑 넘어갈 수밖에 없었겠지. 너희들의 고향에서는 이런 힘을 사용할 수 없었을테니 말야.


"미안하군. 며칠 전 이곳을 탐사하던 정예 신관 하나가 연락이 끊긴 바람에 조금 민감했어. 만약 사망했다면 시신을 수습해야하고, 생존한다면 얼른 구출할 겸 이곳에 대한 추가 탐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나는 본부로부터 동굴의 지도를 받았다고 말하고, 내가 적당히 만들어 낸 지도의 표시를 따라 이들을 이끄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내 목표는, 이들을 아르마님에게로 인도하는 것. 그리고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무 의심없이 나의 애교까지 받아주던 이들은 동굴의 끝자락에서 결국 나에게 칼과 스태프를 겨누며 역정을 냈다. 하지만 그들은 나와 내 형제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그들의 에르다는 점차 물렁물렁해졌고, 결국 형체를 잃고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최후의 한 사람은 나에게 칼을 휘두르는 바로 그 순간 몸이 무너졌다. 칼날이 내 바로 옆의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하는 확신이 섰다.


그렇게 나는 몇 차례 이곳에 찾아오는 이들을 같은 방식으로 이끌었다. 완전히 액화되어 자아를 잃어버린 이들을 아르마님께서 게걸스럽게 삼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미안해, 하지만 너희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어. 사랑하는 나의 주인님의 생명을 존속시키기 위해 희생될 너희들에게 나는 그저 안식을 부여할 뿐이지. 비명 섞인 붉은 피를 흥건히 적시며 죽어간, 이 브로치의 주인에 비하면 너희들의 죽음은 오히려 평안하지 않니?











"로나, 왜이리 초조해? 기억의 나무 복구는 이미 끝났잖아."

"아, 모험가님에게 전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얘기를 깜박했어. 자신이 탐사대원인 것처럼 사칭하여 다른 이를 유인하는 괴물이 소멸의 화염지대 너머에 있다는 걸 전달드려야 했는데..."

"로나, 미쳤어? 그걸 왜 깜박한거야? 벌써 종잇배가 망각의 호수를 넘어간 지 오래라고. 안식의 동굴은 아무리 뛰어난 연합의 에이스여도 위험한 곳이잖아. 하다못해 안식 억제제라도 지급한 뒤에 보냈어야지!"













"아... 안돼... 안돼..."


눈 앞에 쓰러진 거구의 시체가 놓여있다. 에메랄드 빛의 몸은 점차 빛을 잃어가고, 바닥과 닿은 부분은 점차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인간의 모습을 한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규했다. 다시 흐른다, 내가 처음 느꼈던 감정과 같은 것이 느껴지자 눈에서 다시 분비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이것의 이름을 안다. 눈물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썩은 내, 아니, 달콤하게 이끌리는 냄새가 난다. 죽어가는 에르다스가 풍기는 냄새, 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역하고 슬픈 냄새다. 형제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저들은 자신을 낳아준 존재의 죽음을 애도하는 법조차 모르기에, 한 때 주인이었던 자의 살점을 마구 뜯어먹기 시작했다.


"안돼, 멈춰! 멈춰 이 벌레 자식들아!"


나는 형제들의 아니, 징그러운 벌레들의 무리에 뛰어들어 미숙한 공격 마법을 난사했다. 하지만 짐승의 본능에 충실히 살아온 이들의 악력은 오히려 내 팔과 다리를, 머리와 몸통의 일부를 뜯어가기에 충분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도 잠시, 나는 점차 힘을 잃어감을 느꼈다. 부상 때문에 마력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몸이 점점 벌레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저들과 똑같은, 지성따윈 찾아볼 수 없는 역겨운 저들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간다. 한 녀석이 꼬리를 세게 휘둘러 내친 탓에 멀리 튕겨진 나는 결국 아르마님의 최후를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사체가 이윽고 머리만 남았다. 하지만 아르마님의 몸통을 배불리 뜯어먹은 녀석들은 다시 뿔뿔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배가 주리기 시작한 순간 저들은 저 머리조차 남김없이 먹을 것이다. 녀석들이 모두 동굴 깊은 곳으로 사라진 이후, 나는 만신창이가 된 채 머리만 남은 아르마님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느 탐사대원의 짐짝에서 발견된 책이 생각난다. 외롭고 험난한 타지에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가져왔다는 소설 몇 권. 그 속에는 아이에게 얼굴을 맞대고 자장가를 불러주는 어머니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평생 가져본 적도, 가질 수도 없는 경험이겠지. 나는 그것을 떠올리며 아르마님의 머리에 몸을 기대고 속삭였다.


나의 군주시여, 나의 주인님이시여


어머니...


의식이 흐려가는 도중 생각한다. 저렇게 강한 자인 줄 알았다면 이곳으로 유인하지 않았을텐데, 너무 자만했어. 후회스럽다. 비록 동료 하나를 잃게 만들었지만 전혀 통쾌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동료의 죽음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는 어떡해야할까. 나는 나아갈 수 없다. 뒤로 물러설 곳도 없다. 하나뿐이던 삶의 목표조차 잃은 나는 이제 무엇인가.















아르마와 그 부하들에 대한 설정은 개미/벌에서 따왔습니다. 사실상 자기가 부리는 수하 전체가 다 자기 딸들이잖아요. 여기서 착안해서 아르마의 부하들 모두 아르마가 낳은 새끼들이라는 점. 그리고 리노는 지성을 가진 생물체로서 유일하게 어머니의 사랑에 목맨 존재라는 느낌으로 스토리를 써봤습니다. 시간의 신관의 경우도, 본편 스토리에서는 메인 스토리 이후 일퀘 때부터 등장하지만, 제가 쓴 글에서는 대적자 여로 입성 이전에 이미 시간의 신전 신관들이 몇 차례 탐사를 진행하다 실패했다는 설정을 넣었습니다. 그 배후에 리노가 있었다고 치는 거구요. 안식의 동굴에서 보이는 슬라우가 그 죽은 신관들이라는 설정입니다. 슬라우에 대한 아이디어는 예전 인벤에서 본 어느 이상성욕글에서 따왔습니다.


디테일한 설정같은건 아몰랑레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