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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각색해봄
솔직히 돚거라고 해도 할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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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기운이 서린 3월의 어느날. 이날 졸업식이 있는 어느 여고의 교정은 모처럼 시끌벅적 했다.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고 기념 촬영을 하는 졸업생, 밀가루와 계란을 뿌리려는 짗궂은 아이들과 그걸 말리려는 선생님, 친구들과 꽃다발을 들고 번갈아 단체사진을 찍는 졸업생들. 모두 고등학생으로서 마지막 순간을 마음껏 보내고 있었다.


"하나둘셋 김치~"


아름은 왼손으로 브이를 그리며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제 다 찍었나? 아직 안 찍은사람 있어?"


스마트폰으로 방금 찍은 사진을 확인하면서 아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괜찮은가?"

"다 찍은것 같애"

"응응 다 찍었어!"


아름과 마찬가지로 친구들 역시 자신의 스마트폰을 확인하면 대답을 해왔다.


"아아, 오늘부터 학교에서 못보겠네"


경미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 어깨를, 은주가 툭 쳤다.

"재수없는 소리하고 있어, 분명 대학교는 다 다르지만 이제 성인이니까 만나려 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잖아"

"그래 맞아" 다른 친구들도 동조했다.

"우리의 우정은 영원한 것이야!"


그 한마디에 아름을 비롯한 친구들 모두 소리 높혀 웃었다.


"잠깐, 뭐야! 지금 도원결의 한거야?"

"아 졸업실 날에도 저런 드립이나 치고 있고, 대학교 가서도 쭉 그래라"


조롱하는 경미의 말에 은주는 볼을 부풀렸다.


"뭐래는거야 이 지지배가"


그런 모습에 다시 웃음이 퍼져나갔다.


한바탕 웃은 뒤, 야요이가 불쑥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름이는 당분간 보기 힘들겠지?"


모두의 시선이 아름쪽으로 향한다.


"아 내일 출국이라고 했었지?"


아름은 은주의 말에 쓸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가서 분위기에 적응해두고 영어공부도 미리 해놓으면 좋지"

"그나저나 아름이가 하버드를 간다니 진짜 대박이다"


은주는 아름에게 부러움의 눈빛을 보냈고 아름은 겸연쩍은 듯이 웃었다.


"에이 뭐 어쩌다 보니 잘 풀린거지, 미국 도착하면 바로 연락할께"

"사진 찍어서 잘 보내라 우리 너 안잊는다!"

"아름이 너는 금방 적응하고 공부도 잘 할꺼야 엄청 똑똑하잖아!"

"고마워, 잘 지내고 있을께 연락도 꼭 할꺼고"


아름은 은주와 경미에게 미소로 답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름아 갑자기 왜 그래?"


경미가 걱정스럽게 묻자, 아름은 정신을 차린 듯 또 웃었다.


"응, 졸업식 끝나고 학교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뭔데뭔데?"


은주와 경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아름을 바라봤다. 아름은 가볍게 우물거린 뒤


"……선생님들한테 인사를 하고 와야해서"

"졸업식인데 여기서 하면 되지 누군데?"


은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학교에는 3학년 담임선생님 외에도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아름은 주위를 쓱쓱 둘러보면서 말했다.


"으으으음.....교감 선생님! 나 미국유학에 관해서 도움을 많이 주셨는데 인사를 드리고 가야 할 것 같아서"

"교감 선생님? 오늘 안 왔나?"


은주와 경미가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나 교감의 모습은 없었다.


"……없는 것 같네. 어떡하지? 우리 아름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까?"

"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얘기가 좀 길어질지도 모르고 끝나면 아빠가 데리러 온 댔어 괜찮아"

"그러면 여기서 헤어지는거야?"

"응, 그래야겠네"


쓸쓸한 기분에 고개를 숙인 아름의 어깨를 은주가 가볍게 두드렸다.


"그럼 오늘은 아디오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의 우정은!!!"

"저년 또 그지같이 드립치려고"


경미의 입에서 험한말이 나오자 은주가 깜짝놀라 가볍게 노려보았다.


"야! 말이 심한데!"

"진짜 대학교가서도 쭈우우우욱 그래라 평생 모쏠로 살게"

"너 일루와!"


두 사람의 대화에 아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는 눈가에 눈물이 살짝 비쳤다. 이런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도 잘하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야 너무 웃어서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애, 그럼 또 보자!"

"응, 또보자!"

"미국 도착하면 꼭 연락하고!"

"당연하지!"


아름은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며 학교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이 때, 아름은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학교에 돌아가 교감을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학교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것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명령과 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울려퍼지는 말을 결코 무시하고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름은 침착하게 계단을 올라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들어갔다.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잠시 후 종종걸음이 되었다. 하지만 아름은 왜 그렇게 빨리 걷고 있는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몸이 멋대로?'


단지 머리 속에 들려오는 목소리대로 그 장소로 향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3학년 2반 교실.

아름이 1년동안 있었던 곳이다.


'나는 왜 이곳에 왔나?'


이유를 생각하려 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름은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두리번 거리며 교실을 둘러봤다. "졸업이다~!" 같은 크게 쓴 칠판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 말고는 그냥 평범한 학교 교실과 다름 없었다. 단지 약 한 시간 전까지는 사람이 꽉차서 왁자지껄 떠들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개미새끼 한마리도 안보이는 적막한 공간이었다.


"12시 정각, 맞춰서 왔군"


갑자기 들린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칠판 옆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서있었다. 어렴풋이 생각은 났지만 누군지는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생각하고 싶지는 않고 잊어 버리고 싶었다. 그 사람은 아름에게 그런 존재였다.


"1년 동안 수고가 많았어, 너는 내가 누군지 알꺼야. 너는 나를 못 알아볼 리가 없어."


아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몰라요, 당신 따위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알지도 못한다고!"

"그럼 어째서 친구들을 속이면서까지 교실로 들어왔지? 넌 오늘 졸업했잖아, 이제 학교에는 안와도 된다고"

"그건……"


아름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은 남자의 모습을 본 순간 아름은 이 교실로 들어온 이유를 알아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해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난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이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정말 모르는건가"


어째서인지 남자는 뭔가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아름에게 다가와 가까이선채로 아름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건가"

"무슨 뜻이지?"


아름은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남자를 피해 두 세걸음 뒤로 물러났고 긴장했는지 어깨를 움츠렸다. 아예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지만 어째서인지 그건 못할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 나는 너와 해야할 일이 있어"

"그쪽이 말한대로 나는 여기에 올 이유가 없어, 나는 그쪽 얼굴을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나한테 신경쓰지 말라고!"


화를 내는 아름에게 남자는 여유로운 태도를 전혀 바꾸지 않고 오히려 씨익 웃어보였다.


"아 알겠어, 나도 이제는 니가 꼴보기 싫어졌어 당장 여기서 나가 꺼져버려!"


남자의 말이 의외였던지, 아름의 얼굴이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일 뿐


"바라던 바야, 그럼 안녕!"


아름이 뒤로 돌아 교실을 뛰어 나가려는 찰나 남자가 말했다.


"기다려 AR-003411"


순간 교실 문에 손을 댄 자세로 아름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췄다.


"어……왜……?"


문을 열고 한 걸음 내딛어 교실 밖을 나가려고 시도해봤다. 하지만 아무리 해봐도 손, 발, 손가락 한개 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목 아래쪽은 아예 전신이 마비된 것 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물론 남자 쪽으로 돌아볼 수도 없었다.


"니 말대로 나는 너와 더 이상 만나지 않을 꺼야 '강아름' 이라는 사람하고는 말이지"

"자 이제 내 일을 해볼까? AR-003411 내 앞으로 온다."


아름의 몸은 그제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아름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로 남자의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은 분명 교실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인데 전혀 반대로 움직이는 것에 아름은 혼란에 빠져버렸다.


"싫어! 싫어! 그만! 왜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는거야!"


아름은 계속해서 소리쳤지만 그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교탁을 사이에 두고 남자의 정면에 와서 섰다.

자신의 정면에서 가만히 서있는 아름을 남자는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상인격이 너무 잘 인식되어 있어서 그런가? 하긴 뭐 낯선사람을 보고 고분고분 따르는 것도 정상은 아니지, 커뮤니케이션 알고리즘에는 오류가 없는 것 같군"

"뭐...뭐라고 하는거야? 가상인격? 이상한소리 그만해!"

"아까도 생각했는데, 넌 정말 대단해!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모두 다 너를 인간이라고 생각할꺼야"

"난 인간이야!!"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게 정상이지, 넌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AR-003411 설마 너의 역할을 잊지 않았겠지?"

"내.........역할?"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아름의 턱을 손가락으로 받쳐 올렸다.


"AR-003411 너는 누구이고 왜 이 학교에 왔지?"


남자의 물음에 대한 답이 아름의 머릿속에서 곧바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답을 아름의 입으로 말해야 하지만 아름은 그런 일련의 과정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나는......나......는...........싫어..........으.........싫어.........말.........하...기..........싫.....어"


아름이 필사적으로 저항 모습에 남자는 짜증을 내며 강한 어조로 유이에게 말했다.


"대답해! AR-003411 너는 누구이고 이 학교에 왜 왔지?"


남자의 노기 어린 물음에 아름의 저항은 사그러들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대답이 입으로 새어 나왔다.


"나.......나는........AR-003411 학교폭력과 교사의 부정행위를 감시하기 위해서 제조 된 여성형 안드로이드, 학교에서……그런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지.....감시하고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뭐야, 잘 알고 있잖아"

"대답 똑바로 못하면 폐기처분인데 말이야"


폐기 처분이라는 말에 아름, 아니 AR-003411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폐기되지 않았을때 앞으로 일어날 일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폐기되어 버리는 것이 행복한 것은 아닐까 '강아름' 이라는 '인간' 으로 사라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을 계속한다. AR-003411"


아름이 그렇게 생각하던 말던 남자는 계속해서 일을 하려 했다.


"작년 3월 부터 너는 너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이 학교 3학년으로 전학왔고 오늘로서 졸업을 했어 그렇다는 것은"

"……싫어"

남자의 말을 가로막고 AR-003411은 중얼거린다.

"야, 지금 뭐라고?"

"싫어…… 싫어! 나 포맷하기 싫어 나 자신도 나의 추억도 전부다!"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왜냐하면 오늘 너 말고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나는……"

"참 매번 이러는것도 정말 곤란하네"


남자는 한숨을 한번 가볍게 내뱉더니 공구가방에서 칼을 꺼냈다.


"우선은 그 교복은 이제 필요 없어. AR-003411 옷을 벗는다."

"안돼! 하지마! 하지마!!"


말로는 강하게 저항하지만 AR-003411의 손은 그 의지와 무관하게 니트를 밑에서 잡아 올리고 있었다.


"싫어..........싫어............."


남자의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지 AR-003411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은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고 치마의 지퍼를 열었다. 발밑에 옷을 벗은 교복이 하나씩 툭툭 떨어졌다.


"그만해.....제발......."


운동화도 벗고 양말도 벗어버리자 속옷 차림이 된 AR-003411의 손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남자가 내린 명령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AR-003411는 등으로 손을 가져가 브래지어를 풀었고 미끄러지듯 팬티를 내린다.


AR-003411은 전라의 모습으로 남자 앞에 꼿꼿이 서있었다. 남자는 교탁을 지나쳐와 AR-003411 앞에 섰다. 아름의 몸은 스스로 인식하지는 못했겠지만 희고 매끈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몸매가 너무 좋으면 학교폭력 감시 역할에 저해가 될 수도 있다는 조사결과에 따라 여자 고등학생 평균의 체형으로 만들어졌지만 피부 만큼은 인공피부 기술의 한계로 약간 희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남자의 눈에는 사심이 전혀 없이 냉철하게 검사만 할 것 같은 날카로움이 있었다.


"기다려.....난........아직"

"AR-003411, 외부검사 완료. 내부검사 시작"


남자는 공구상자에서 수술용 칼을 집어들었다. 꼿꼿이 서있는 아름은 그 칼이 자신에게 향할 것을 알았지만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남자는 칼 끝은 목 아래 쇄골뼈 사이에서 시작해 음부 바로 위쪽 까지 한번에 주윽 그어져 내려왔다.


"아……아아……"

"내부는......음.... 이 정도면 아주 깨끗한걸? 곧바로 다시 투입해도 되겠어"

"AR-003411, 니 모습이 궁금하지 않아? 잘 봐두라고"


남자가 AR-003411의 앞으로 교실에 있던 전신거울을 가져왔다. AR-003411은 자신의 몸을 보며 충격에 절망했다. 칼로 베어진 틈으로 하얀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안에는 수많은 기계장치들이 드러나 기분나쁜 저주파음을 내고 있었다.  AR-003411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자는 AR-003411에게 말했다.


"인간으로 살고 싶어? 그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자 보라구! 이게 어딜 봐서 인간이야, 넌 필요에 의해서 1년동안 인간을 모사 했을 뿐이지 결코 인간이 아니야"

"아니야!!!!!!!"

"확실히 나는 인간이 아냐! 하지만……하지만!! 비록 내가 인간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나를 인간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난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고!!"


AR-003411은 은주와 경미를 비롯한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만큼 AR-003411은 단호했다.


"하아... 정말 대단하네, 너는 역시 최상급 품질이야."

"나를 물건 취급하지 마!!!!"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공구가방에서 쇠 막대를 꺼내 길게 펼쳤다.


"그렇게 나오시면 나도 어쩔수 없지."


"뭘 하려는거야"


AR-003411의 물음에 남자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 막대기의 한쪽 끝에 삼각뿔 모양의 부품을 연결했다. AR-003411는 남자가 앞으로 뭘 하려는지 그 막대가 어떤 도구인지 통 알 수 없다. AR-003411의 두려움 섞인 시선을 받으며 남자는 뒤로 걸어갔다. 그리고


"윽!?"


AR-003411 몸에 위로 들어올리는 듯한 충격이 가해졌다. AR-003411는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쇠 막대기에 의해서 위로 들어올려졌다.


"뭐, 뭐야, 이거……"


AR-003411 까치발 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세워졌다.


"나한테 뭘 한거야!?"

"너를 받쳐줄 수 있는 지지대를 세웠지, 쉽게 말하면 항문에 그 막대기를 꽂아 세운거야"

"무엇 때문에……"


자신의 정면으로 돌아온 남자를 AR-003411은 바라봤다.


"그냥 얌전히 말 들었으면 이렇게 까지는 안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나도 이제는 못참겠어"


남자는 수술 나이프를 AR-003411의 오른쪽 어깨로 가져가 푹 찔렀다. AR-003411도 통증을 느끼며 얼굴을 찡그리고 깊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남자는 수술 나이프를 어깨 주변으로 둥글게 돌리며 베어냈고 공구가방에서 뾰족한 전자기기 하나를 꺼내 벗겨낸 부분에 쿡 하고 찔렀다. 순간 '덜거덕' 소리가 났고 AR-003411이 다시 남자를 봤을 때 남자는 AR-003411의 오른 팔을 들고 있었다.


"참 가지가지한다."


AR-003411은 오른쪽 팔이 사라졌음을 뒤늦게 알아챘다.


"아니.......아냐.......아니라고!"


AR-003411이 외쳤다. 너무 갑작스러운 외침에 남자는 두 귀를 막으며 얼굴을 찡그렸고 그러던 중에 AR-003411의 오른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뭐 하는 거야!"


남자가 AR-003411에게 다시 소리쳤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AR-003411의 오른 팔을 집어 들고 꼼꼼히 살펴봤다.

그리고 오른 팔에 묻은 먼지를 옷소매로 툭툭 쳐서 털어내고 교탁에 내려뒀다.


"……돌려놔"


AR-003411 가 중얼거린다.


"돌려놔! 내 팔!!"


"그렇게 될리가 없잖아?"


남자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AR-003411도 돌려주지 않는다는걸 알았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돌려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그랬다. 그러나 그 염원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남자는 계속해서 왼쪽 어깨 피부도 칼로 잘라내어 왼 팔을 분리했고 양쪽 사타구니의 피부도 벗겨내어 두 다리도 바로 떼어냈다.


"그만……그만!"


AR-003411의 저항은 남자의 적개심과 분노만 키워주는 꼴이 되었다. 감각을 잃은 양손과 양팔은 이제 아예 움직일 수 없었다. 양 팔로 남자의 몸을 밀쳐내는 것도, 두 다리로 여기서 도망가는 것도 이제는 아예 불가능 했다.


AR-003411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남자는 담담하게 작업을 진행시킨다. AR-003411에게서 분리해낸 팔과 다리를 교탁에 가지런히 내려놓고 있었다. AR-003411은 자신의 몸에서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는걸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약 한시간 전까지만 해도 졸업장을 들고 기뻐하던 "강아름" 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그녀는 머리가 달린 토르소가 된 채 쇠 막대기 위에 꽂혀 있었다.


"자, 어떡하지?"


마지막으로 뺀 왼쪽 다리를 교탁에 놓으면서 남자는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는 AR-003411으로 돌아섰다.


"아직도 소리지를 힘이 남았나? 어?"

"나는……나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안드로이드는 사지가 분리되고 그 과정에서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음에도 희망을 버리지 못 했다. 이런 모습을 친구들이 본다면 모두 놀래 자빠져 버릴 것이다.


"만나고 싶어.......경미야......은주야........만나고 싶어........"


바닥에 계속해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남자는 무심하게 AR-003411를 한번 보고는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진짜 끝낼 시간이네 AR-003411"

"기다려!!!!"

"누구 마음대로"


남자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공구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들었다. 몇 번 터치하자 AR-003411의 얼굴에서 일체의 감정이 사라졌다. 눈은 부릅뜨고 입은 멍하니 벌린 채로 굳었다. 얼굴에 눈물이 흐른 자국을 남친 개 그녀는 담담하게 답했다.


[관리자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패스워드를 입력하십시오]


그 목소리에는 분노도 슬픔도 없다. 명령대로 그 누구에게도 들려준 적 없는 전자 음성으로 남자에게 말했다.


"패스워드 AR-003411"

[승인 완료. 초기화 프로세스 시작]

"싫어!"


AR-003411의 목소리가 전자음을 뚫고 나왔다.


"싫어! 싫어!! 싫다고!! 살려줘!!!!!"


하지만 그녀의 의사와 상관 없이 남자의 명령대로의 동작을 시작했다.


"나는……나는……꼭... 잊지....않을거야...………"


AR-003411은 머릿속에서 1년동안 만들어낸 추억들을 떠올렸다. 이 학교의 풍경과 동급생들, 그리고 둘도 없는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들을 머리 속에 각인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아아……"


하지만 각인하려던 기억들이 점점 희미하게 변해간다. 모든 것이 무너진다.


"......기억이……안나?……"


교실의 기억이 사라져간다. 동급생들의 떠드는 소리가 점점 작게 잦아들어간다.


"경미야….……뭐라고……"

- 아름이가.........그때.……정말............한거야.

"싫어………아름이?……그게……나……?"

- .........그 .............의..............어..........-

"더.........들리지 않아…… 들리지 않아……"


다시 만나기로 했던 친구들의 목소리가 공허해진다. 아니, 몇 명이었는지도 잊혀져간다.


"나는……나는………….....................누구지?"


마지막에 뺨에 눈물 한방울이 흐르는 순간 AR-003411의 머릿속은 텅 비어졌다. 처음 초기화 프로세스를 시작한 그 표정 그대로 굳어버렸다.


"회수차량은 언제 오나"


AR-003411이 완전히 멈춘 것을 확인하자 남자는 홀가분한 듯 읖조렸다. 잠시 뒤 교실 앞문에 남자처럼 작업복 차림의 여자가 나타났다.


"회수팀입니다."


여자는 반짝거리는 금속소재 상자를 실은 대차를 끌며 교실로 들어왔다.


"회수 작업 시작하시죠"


여자는 상자를 조립하면서 말했다. 교탁에 올려진 AR-003411의 오른 팔을 집어들어 중간에서 비틀었다. 팔은 반으로 뚝 갈라졌고 상자안에 있던 완충재로 둘둘 말아서 상자 안에 놓았다.


"초기화하는데 1시간이나 걸리네요?"

"신형 안드로이드들이 참 까다로워요"


남자는 아직 쇠 막대기 위에 꽂혀있는 AR-003411의 상반신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안드로이드 초기화 일을 시작한지 5년이 되었지만 이 신형 안드로이드들은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었다.


"CPU가 아니라 인공지능이 들어있다죠? 프로그램대로 행동 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딥러닝을 한다던데"

"가상인격을 유지하려면 그렇게 하는게 좋은데, 자기가 인간이라고 강하게 믿으니 초기화 하기가 꽤 힘드네요"

"머리도 빨리 분리하시죠"


남자는 AR-003411이 목 언저리의 피부를 벗겨내고 뾰족한 전자기기를 툭 갔다대자 덜그덕 하는 소리가 났다. 그걸 확인한 남자는 AR-003411의 양쪽 머리를 잡고 한쪽으로 돌리자 머리가 몸에서 분리 되었다. 그 동안 AR-003411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몸통은 제가 할께요"

양팔과 두 다리를 모두 포장한 여자가 몸통을 막대기에서 빼내어 교탁에 뉘었다. 그리고 머리를 상자에 넣으려는 남자를 보고 말했다.


"머리 지금 넣으면 안되죠"

"아 맞다. 자꾸 헷갈리네"


AR-003411의 머리를 상자에 넣으려다가 다시 교탁에 올려놨다. 남자는 바닥에 널려있던 교복을 뒤적거려 스마트폰을 찾아냈다. 잠금을 해제시키고 갤러리를 뒤져보니 AR-003411 친구들이라고 했던 학생들이 보였다. 남자는 화면에 학생들과 AR-003411이 같이 있는 사진을 띄운채 AR-003411의 눈 앞에 스마트폰을 가져갔다.


"AR-003411 이 사진에서 인물데이터를 검색해"

[본 개체 1기 인식, 나머지는 데이터 없음]


AR-003411은 전자음으로 답했다.


"정말 모르는거지?"

[인식 불가능]


남자는 스마트폰을 지퍼백에 넣어 상자에 같이 넣었다. 혹시라도 밖으로 유출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포장 끝났어요"


여자는 상자에 AR-003411를 모두 넣어 대차에 싣어놓고 맨 위의 상자는 열어놓은 채로 두었다. 거기에 머리를 넣어야 한다.


"AR-003411 작동정지"

[알겠습니다. AR-003411 작동정.............]


남자는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완충재로 머리를 둘둘 말아서 상자에 넣어버렸다. 여자는 곧바로 상자를 닫고 대차를 밀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휴우 끝났네, 근데 이거 한달 있다가 다른 학교로 또 간다면서?"

"어느학교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번엔 남녀공학으로 보낸다네요"

"그래? 어휴 이번엔 더 힘들겠구만, 괜히 남학생하고 엮이지 않게 해야 하는데, 그때 남자애들이 얘를 가만히 놔둘까?"

"유통기한 1년짜리 사랑이네요"


인간보다도 인간답게 만들어졌지만 한계는 분명하다. 이 안드로이드들은 계속해서 고등학생으로 남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안드로이드와 엮인 인간들만 불쌍해지는 일이다. 인간을 열심히 따라할 뿐인 이 기계덩어리에게는 일말의 동정심도 생기지 않는다.


여자는 곧바로 대차를 끌고 교실을 나갔다. 그 뒤를 이어 남자가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리고 학교는 졸업식 이후가 으레 그렇듯 다시금 정적에 휩싸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