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시 채널

988년의 어느 날, 나하의 해변에 낯선 목선 한 척이 접안하였다.

비록 당시가 야심한 밤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갑자기 도래한 낯선 이들을 반길 사람이 그리 많을 리도 만무하였고, 목선의 크기도 그리 작지 않았기에 당연히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은 영 곱지 않았다.


멈추어라. 그렇지 않으면 벨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네 명의 고관대작들이 급한 걸음으로 목선에서 내리는 행렬의 앞에 다다랐을 때, 가장 먼저 행동에 착수한 것은 최선두의 귀공자를 저지할 목적으로 그의 목에 칼을 겨눈 틴간이었다.

그런 그를 본 귀공자는 이내 제 목에 겨누어진 제법 예리한 돌칼을 흘겨보더니, 이내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말문을 열었다.

그의 언어는 오키나와어와 어느 정도 유사하였으나, 그렇다고 완벽히 같지는 않았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야마토어, 그 중에서도 과거 무사시 지역에서 쓰이던 말임을 떠올린 이미투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쉬이 이를 이해하고 묻거나 답하지 못하였다.

아래는 이후 이미투이와 귀공자 사이에 이어진 대화 전문.


그대가 사용하는 말을 듣건대 야마토 열도, 그 중에서도 무사시국의 언어인 듯 하다. 맞는가?


그렇소. 우리는 무사시 지역에서 이 나라로 비밀라에 망명한 이들이오.


소개할 이들이 조금 많네만, 우선은 내 소개만 하지. 미치시바누 이미투이, 주로 어문(語文)에 관한 일을 도맡고 있는 관리일세. 자네는?


하쿠로우 사부로(白狼參郞), 무사시국이 존재할 때만 하더라도 나름 유력 가문의 후계자였소.


지금은 아니란 뜻이군.


천황의 권력이 무너진 후, 야마토 열도는 과거의 귀족들과 새로이 권력을 키운 무뢰배들이 각축을 벌이는 곳으로 전락했소. 이 와중에 전대 가주였던 우리 아버지께서 급사하시면서 우리 가문의 세는 급격히 줄었고, 본인의 능력만으로는 치열한 암투를 이겨낼 수 없어 이미 통일 국가를 형성하였다는 그대들에게 몸을 의탁하고자 찾아온 거요.


그런 것 치고는 말투가 건방진데, 우리에게 정확히 무엇을 원하고, 그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지?


우리도 나름의 좋은 패를 쥐고 있기에, 어느 정도 그대들과 동등할 자격이 있다 생각하오. 우선 나는 옛 무사시국 지역의 지배권을 원하니 이를 빌미로 그대들이 야마토 열도를 칠 명분을 줄 수 있고, 원한다면 철의 제련법을 알려 줄 수도 있소.


말을 마친 사부로는 이미투이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우선 국왕 전하의 윤허를 구해 볼 테니, 여기에 머물되 헛짓은 하지 말게.


알겠소.


자신의 당부에 태연히 웃으며 답하는 젊은 사내를 잠시 바라보던 이미투이는 이내 그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위의 내용 전부를 오키나와어로 일러 주고는 국왕의 거처로 전령을 파견하였다.

물론 사부로가 내건 조건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었던 타키누시는 이 소식을 접하는 즉시 윤허의 뜻을 전했고, 그렇게 사부로와 그의 무리 200여 명은 정식으로 카니무이에 입국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