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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9일의 하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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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은 멀쩡하게 생겨서."


무심함과 짜증이 섞인 낮은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인 중년의 남자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다리를 꼰 채 자신의 앞에 서있는 키가 크고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소년을 바라봤어. 소년도 어른 앞에서 기가 죽은 모습은 전혀 없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중년의 남자를 빤히 바라봤어. 둘은 담임 선생님과 고등학생의 관계였고 소년은 병원에 가야하기 때문에 야간 자율 학습을 할 수 없었어. 그랬기에 선생님께 말씀을 드려야 하는 상황에 살짝 신경전이 벌어진 상황이었지. 


"정말이에요, 선생님. 정기적으로 병원가서 약 처방 받아야 된다고요."

"어휴..."

"... 이미 다 끝난 이야기였잖아요."


이해가 안간다는 듯한 선생님의 한숨에 소년은 이미 질렸다는 듯 '다녀와'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어젖히고 교무실을 나갔어. 이미 이야기 해놓은 상황이었지만 자꾸만 자신을 의심하는게 기분나빴지. 질 나쁜 몇몇 아이들이 병원에 간다는 핑계로 야간 자율 학습을 빼먹는건 사실이었지만 소년은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약하고 아팠기에 매주 병원에 가야했거든. 자신의 속사정을 몰라주고 의심하는 선생님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어. 


키는 쭉쭉 크는 몸이 원망스러울 정도였어. 고등학교 2학년인데 벌써 180은 거뜬히 넘겼고 이렇게 클거면 몸 안이나 좀 건강을 챙기던가 내부는 신경쓰지도 않은 채 스스로의 몸은 눈치없이 겉만 커지는 기분이었지. 작고 왜소했으면 다들 아프다는 이야기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을리 없고 오히려 진심으로 동정해주었을 테니까. 그가 가방을 메고 교실밖을 나서자 반 친구 몇 명이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물었어. 


"어, 윤. 병원 때문에 일찍 가는거야?"

"어."

"좋겠다. 우린 야자하는데..."


친구들의 말은 진심이었지만 윤은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차갑게 나가 운동장을 가로질러갔어. 한창 석식이 끝나고 자율학습 시작 전 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지. 그 나이대 아이들이 그러하듯 혈기왕성하게 실컷 뛰는걸 윤은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어. 체육시간이 되면 얼마 뛰지도 못한 채 숨이 안쉬어질 정도로 막혀왔거든. 부러움과 열등감이 어지러히 섞이며 원래도 약했던 심장은 그 감정들로 인해 과부화가 온 고장난 기계마냥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지. 이런 걸 원하지도 않았는데 남들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자신은 남들을 질투해야하는 이 현실이 싫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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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녀의 다정한 위로와 간호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가 중간에 떴음에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어. 이 현실은 동화마냥 여자 주인공이 소중히 남자 주인공을 만져준다고 하루 사이에 병이 말끔히 낫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진부한 동화의 여자 주인공보다 아니, 그 이상으로 하루는 그를 걱정하고 있었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꼼짝없이 끙끙 앓는 그의 곁을 지켜주거나 이마 옆에 올라가 땀을 닦아주었지. 몸이 작아 한정된 것 밖에 도와 줄 수 없었지만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최대한 그를 돌봐주었고 윤은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어. 이불을 꼭 덮고 있었지만 한겨울처럼 너무 추웠고 몸 마디마디는 부셔질 것만 같았지. 머리는 깨질듯이 아팠어. 그가 작게 신음하자 하루는 재빨리 그의 옆에 다가와 안부를 살폈지.


"아직도 몸이 뜨거워... 몸상태는 어때?

"모르겠어...왜 자꾸 물어보는거야?"

"그거야 걱정되니까 그렇지."

"후... 나도 이런 몸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고."

"..."

"조금 더 쉬어야겠어... 혼자 있게 해줘."


감기로 예민해진 몸에 윤은 그동안과 다르게 살짝 신경질을 내며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려 그녀를 거부했어.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하고 걱정한 그녀의 마음을 모른 채 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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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또 이 기억이야.'


잠깐 잠든 사이 그는 꿈을 꾸었어. 고등학생 때 야간 자율학습을 하지 못하고 담임 선생님과 신경전을 벌이고, 야자를 안한다고 부러워하는 친구들에 오히려 운동장에서 운동하는 아이들이 부러웠던, 과거의 꿈이었지. 그 때의 감각과 기억들은 마치 어제의 일 처럼 생생해서 잊혀질 쯤엔 다시 그를 괴롭혀왔어. 그는 악몽을 잊기 위해 나지막히 소녀를 불렀지. 


"하루..."


하지만 그의 부름에도 소녀가 대답하지 않자 불안한 예감에 뻘뻘 흘리던 식은 땀도 모두 날아가버렸어. 비몽사몽하던 정신도 번개가 내리친듯 번쩍 깨버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녀는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고, 말 그대로 사라져있었지.


"하루...? 하루...!"


생각할 시간도 없이,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잠옷 차림으로 집을 뛰쳐나와 그녀를 찾기 시작했어. 집 주변 마당과 쓰지 않은 낡은 창고에도 그녀의 인기척 조차 느껴지지 않자 그는 저번에 그녀와 함께했던 눈 덮인 언덕으로 뛰어올라갔어. 눈이 꽤 쌓여있었기에 발은 푹푹 빠졌고 점점 다리가 얼어붙었지만 그는 자기가 가벼운 동상에 걸릴 줄은 생각 못하고 무작정 그녀를 찾는데만 몰두했지. 겨울 저녘이라 어느새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었는데 말이야. 아직 감기에 낫지 않는 몸이 부셔져버릴 것 같았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지만 그것보다 고통스러운건 그는 끝끝내 어른스럽게 그녀를 대하지 못한 잘못에 대해 후회였을거야. 


"하루...윽..."


하지만 이미 후회해도 떠난 그녀는 돌아오지 않겠지. 그는 결국 힘이 풀려 눈밭에 쓰러지고 말았어.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큰 슬픔이 몰려와 이대로 그냥 얼어죽어버리고 싶었지. 이제 그녀를 두번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져버릴 것 같았거든. 


"윤.. 아픈 몸으로 왜 나와있는거야?"

"하루... 하루...?!!"


그는 처음에 자신이 죽은 줄 알았어. 사라진 그녀의 목소리가 옆에서 바로 들려왔으니까. 하지만 온 몸을 찌르는 차가운 감각들에 그는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고 몸을 벌떡 일으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소녀를 바라봤어. 소녀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고있었지.


"어, 어디 갔었던거야...?"


하루는 대답대신 가볍게 빙글 돌아 자신이 등에 메고 있던걸 보여주었어. 야무지게 손수 만든 튼튼한 지게에는 여러 종류의 풀들이 한아름 메어져 있었지. 


"윤이 계속 아파하길래 예전에 몸에 힘이 없으면 먹던 약초를 구하러 나왔어. 눈 속에 파묻혀 있어서 찾는데 좀 힘들었지만."


몸이 아파서 마음까지 괴로운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 이유로 소중한 사람이나 주변인들을 함부로 대한다는건 올바른 대답이 될 수 없었지. 성인이 되고 그는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진 선택과 결과에 언제나 후회했어. 그래서 가족들과 친구들의 면회를 최대한 피하고 자신을 돌봐주는 의료진이나 다른 환자, 직원들에게 늘 친절하게 대하며 악취가 날 것만 같은 자신의 그릇된 감정들을 짓눌러왔어. 그렇지만 또다시 바보처럼 돌아와서 자신이 소중히 대하는, 그리고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아이에게 또다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말았어. 짜증과 투정으로 대했음에도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이 추운 날씨에 약초까지 구하고 있었던 어린 소녀의 마음에 윤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참을 수 없는 듯 최대한 울음을 참으며 신음했어. 추우니 여기서 울지말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자는 그녀의 이성적인 조언이 들렸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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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고요함만이 가득한, 오로지 바람만이 깨어 창문을 두드리는 밤은 모두가 잠드는 시간이었지만 하루와 윤은 거실에서 작고 따뜻한 주홍빛 조명만 켜놓고 함께 깨어있었어. 좌식 테이블 위에서 그녀의 사이즈에 꼭 맞는 냄비는 동전만한 양초에 의해 내용물이 끓고 있었지. 그녀는 냄비 앞에서 가져온 약초로 약을 만들고 있었고 그는 담요를 덮은 채 무릎을 모아 쪼그려 앉은 채 그녀가 약을 만드는 걸 구경하고 있었지. 야무진 그녀의 솜씨에 속으로 감탄하면서 말이야.


"... 얼마나 더 끓여야 되는거야?"

"재촉하지마. 약은 오래 끓여야 효과가 나와."

"으, 으응... 미안해."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하며 계속 약을 끓이는 것에 집중하자 윤은 고개를 푹 숙였어. 그 모습은 마치 잘못해서 잔뜩 혼난 거대한 강아지 같았지. 하지만 그녀는 그의 주눅든 모습에 딱히 신경쓰지 않는 듯 짧게 자른 나무 젓가락으로 만든 국자 대용 막대기를 계속 저으며 말을 이어갔어. 


"여기에 여치 다리를 넣어야 효과가 좋은데 아쉽네."

"그.. 그건 좀..."

"여치가 성질이 사나워서 잡긴 어렵지만 그래도 그만큼 잡는 가치가 있거든."


어느새 약이 다 되었는지 하루는 '영차' 소리를 내며 옆에 준비 되어있던 빈 접시에 냄비의 내용물을 부었어. 그는 오랜 투병 생활에 약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자신을 위해 직접 만든거라면 바로 먹어버릴 자신이 있었어.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약초를 통째로 씹어 삼키고 싶었지. 약이 많은 양도 아니었기에 그는 살짝 입으로 불어서 식힌 뒤 빠르게 목구멍에 삼켜 넣었어. 특유의 풀내음에 씁쓸했지만 박하처럼 상쾌했고 한결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었지. 그리고 약을 잘 먹어 다행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작은 소녀에겐 꼭 해야할 말이 있었지. 그는 잠시 마음을 진정 시킨 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어. 


"고마워... 하루... 그리고 바보같이 너에게 화내서 미안해. 너를 실망시켰어. 너에게 화났던게 아니야. 금방 낫지 못하는 내 몸이 너무 한심하고... 서러워서 성질을 냈던거야."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경멸과 한심스러울 것과 달리 평소처럼 차분하고 온화한 미소를 잔잔히 띄우며 바라보고 있었어. 


"괜찮아."

"왜.. 괜찮다고 하는거야. 화 낼 수 있는거잖아...! 내가 홧김에 생각없이 말해서 상처 받았잖아..."

"화난 적 없고 상처 받은 적도 없어."

"미안해..."

"괜찮다니까."

"미안해..."

"바보."


결국 마음이 무너진 그는 두손으로 그녀를 부둥켜안았고 그녀는 그를 쓰담아주며 위로해주었어. 그는 훌쩍거리며 울지 않으려 애를 썼어. 하지만 조금은 거친 숨결과 작고 뜨거운 눈물들은 그녀가 느끼기엔 충분했지. 이미 그의 눈물들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그의 속내가 많이 여리다는 건 알고 있어서, 그래서 더 많이 위로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를 위로하며 하루는 자신의 감정이 그의 행동으로 마음이 무너지고 다시 단단해지고, 그리고 뜨거워지는 감정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꼈어. 그 감정들은 예전에 혼자 살아나갈 때 필요 없었기에 모두 버리고 온 것들이었는데 하루하루 그가 하나 둘 씩 되찾아주고 있었던 거지. 다시 색깔이 돌아오고 홀로 떠도는 짐승이 아닌 다시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이 너무나 행복했지. 윤은 자신이 하루에게 해준 것이 별로 없지만 그녀가 자신을 믿고 마음을 조금씩 열어 준 것에 감사했고 그때부터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생각했지만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달랐어.


사실 하루의 세상은 하루가 탁자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기 직전 그가 몸을 날리며 그녀를 받아 낸 그 순간부터, 그녀의 세상은 바뀌기 시작했거든.


-


"하루, 약 만들어줘서 고마워. 보답으로 원하는거 하나 해주고 싶은데."

"부탁이라...흠."

"뭐든지 상관없어."

"역시 목욕하고 싶다고 해야하나."

"목욕?"

"응. 예전에 살땐 한겨울엔 물에 몸을 완전히 담그는건 불가능했어서..."

"잠시만 기다려. 바로 준비해줄게..!"


갑자기 그가 자신에게 싹싹하게 구는 것이 이해가 안되었지만 꽤 어려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모습이 싫지는 않았어. 그녀 입장에서는 자신을 구해주고 다리 치료와 보살피고 재워진 그에 비하면 약을 지어준건 갚기엔 턱없이 부족한, 정말 작은 부탁이라고 생각했거든. 


.

.

.


"후아..."

"필요한거 있으면 불러."

"그럴게."


거기다 깨끗하고 향긋한 냄새까지 나는 따뜻한 목욕물이라니 노곤해진 소녀는 욕조에 기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 평소에 의식하고 있진 않았지만 늘 긴장해있던 몸인데다가 그를 간호 하느라 푹 자지 못했고 약초까지 구하느라 이래저래 지친 몸이었던 것이지. 고개를 자꾸 기울자 그녀가 알몸인지라 제대로 보기도 힘겨운 그가 살짝 멀리서 그녀를 불러깨웠어. 아무리 함께 지낸다해도 둘의 사이는 사귄다거나 그런 것이 아닌 조금은 특별한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알몸을 아무렇지 않게 본다면 음흉한 변태 아저씨가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지. 


"하루... 욕조에서 자면 안돼."

"그치만 몸에 힘이 안들어가..."

"그래도 수건으로 닦고 옷도 입어야 되니까."

"윤이 해주면 안돼...?"

"내, 내가...?!"

"응... 좀 더 잘래..."


하루는 말끝을 흐리며 그대로 욕조 안으로 푹 들어가고개를 물 안으로 꼬르륵 박아버렸고 그제서야 그녀가 정신을 잃었다는 걸 알은 그는 후다닥 다가와 그녀를 조심스레 두 손으로 건져냈어. 순간 정신을 잃은 그녀의 희끗한 맨 몸을 마음의 준비도 없이 만져버린 것에 그는 얼굴이 훅 달아올라버렸지.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는지 도자기처럼 새하얀 몸에 단단하면서도 아기처럼 부드러운 피부, 그리고 그 나이 대 여자아이라는 걸 보여주는듯 예쁘게 부풀어오른 가슴과 엉덩이까지. 너무나도 아름다운 몸이었기에 그는 잠깐 넋놓고 그녀의 몸을 감상하다 이내 급하게 고개를 저었어. 그것과 반대로 그의 아래쪽은 이미 뜨겁고, 단단해져있었지. 아무런 저항없이 축 늘어져있는 그녀의 모습이 그의 배덕감을 느끼기엔 충분했으니까.


'아, 아냐. 이... 이건 절대 변태 같은 짓이 아니야...!! 하루도 허락했고 무엇보다 알몸으로 있으면 감기 걸리잖아.'


곧바로 이성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그는 그녀를 손 안으로 가져와 부드러운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꼼꼼하게 닦아주고 작은 입바람으로 후후 불며 머리카락을 말려주었어. 그 모습은 마치 섬세한 도자기 인형을 만드는 장인 같아보였지. 계속 그가 만짐에도 그녀는 깊은 잠에 빠졌는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윤은 미리 준비 해 놓은 티셔츠 원피스를 그녀에게 입혀주었어. 원래 입던 그녀의 옷은 손빨래를 해서 말리는 중이었거든. 그녀가 더 이상 알몸이 아닌 모습이 되자 계속해서 떨려오던 그의 심장은 이제야 좀 진정이 될 수 있었지. 작은 소녀는 그의 크고 두꺼운 손에서 폭 고개를 기대 새근새근 잠에 들어있었고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운 그는 다른 한 손가락으로 그녀를 쓰다듬어주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이었지. 


"우음..."

"하루, 잘잤어?"

"히힛... 개운하다. 편하고 말이야."

"뭐, 뭣..."


개구쟁이처럼 나른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앗차,  감쪽같이 '속았다' 라는 걸 알게 되었어. 그렇지만 귀여운 소녀의 눈웃음에 그는 마음이 사르륵 녹는 기분이었지. 하루가 자는 척을 한 이유는 그가 자신을 어떻게 대해줄까 해서 생긴 호기심 때문이었어. 그렇게 물 속에 빠진다면 자신을 꺼내줄거라 생각했고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그녀를 꺼내 살뜰히 보살펴주었지. 물론 그의 므흣한 시선과 손짓까지 모두 알고 느낀 채로. 눈을 감고 있었지만 느낄 수 있었어. 그가 손끝으로 자신의 몸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하나하나 기억에 새기고 있던 것을. 자신의 음흉한 사심, 모든걸 들켜버린 윤은 금새 얼굴이 훅 달아오르더니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지.


"너, 너는 시집도 안 간 여자애가...!! 

"그치만 윤의 손길은 조심스럽고, 상냥하고 부드러워서, 그래서 좋아."


그녀의 솔직한 대답에 그는 이래저래 핑계대며 쓸데없이 말을 늘어놓는 것을 관두기로 하며 입과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가렸어. 변명 같은건 이제 그녀의 앞에서 의미가 없었으니까. 한참 어리고 작은 소녀에게 계속해서 스스로의 감정을 외면하고 싶진 않았고 그도 이젠 그녀의 말에 솔직한 대화를 하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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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 중, 하루는 누워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커튼처럼 들어갔다 나왔다하며 장난을 치고 있었어. 머리카락이 꽤 자라 있었기에 가능한 장난이었지. 그는 마치 소인국 어린 아이들의 장난을 받아주는 걸리버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 아마 그 이야기가 정말이었다면 딱 이랬었겠지. 머리도 목덜미를 덮을 정도로 길어서, 동화책 삽화에 그려져있는 걸리버마냥 짧게 묶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야. 머리가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 간질거리자 그는 노곤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어. 


"하루... 너, 내가 자고 있을 때면 꼭 머리카락으로 장난치거나 내 몸 여기저기 살펴보고 그러더라?"

"그거야 몸 상태를 살펴보기 위함이지. 

"끙..."


그는 눈을 감은 채 팔을 들어 머리카락을 더듬으며 소녀를 찾았어. 머리맡에서는 가볍게 '아앗' 소리가 들렸지만 이런 상황에 익숙한지 손쉽게 그녀를 손 안에 가져왔지.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하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소녀를 내려다보는 윤과 달리 한밤 중에 그의 몸을 살피며 시간을 보낸 하루의 눈빛은 초롱하고 맑았지. 그 모습에 그는 장난스럽게 한껏 짗궂게 목소리를 내려 깔았어. 


"흠... 이 몸의 머리카락을 멋대로 헝클어뜨린 아이에게는 무슨 벌을 주어야 할까?"

"그런 적 없었잖아."

"하루..."

"그렇잖아."

"...그래, 맞아. 장난 좀 쳐봤어."


그는 그녀의 뾰로퉁한 대답에 바로 태도를 숙여줬지. 애초에 그는 소녀를 강압적으로 이겨먹을 생각이 없었거든. 오히려 자기보다 수십 배 큰 인간인 자신 앞에서 당당하게 감정표현 하는게 마음에 들었지. 그만큼 친해졌고, 편해졌다는 것이니까. 하루가 살짝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카락를 목 아래로 만지작거리자 그는 그 모습이 귀여워 검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쓰다듬어주었지. 실크처럼 얇고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그 밑으로 말랑하고 하얀 볼까지... 그녀가 간지럽다며 살짝 칭얼거리자 오히려 그는 그녀를 더 가지고 싶었어. 사람의 욕심은 끝도 없었지만 더더욱 그녀를 사랑해주고 싶었거든. 하지만 감정적으로 치우치기엔 그는 어른이 된지 10년은 넘었고, 그의 머리속에는 이성이 바로 치고 들어왔어. 이렇게 작은 여자아이를 보통 여자처럼 사랑해 줄 순 없었기 때문이야. 애초에 조금만 선을 넘으면 그녀를 일방적으로 짓누르고 괴롭히는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긴 절대 싫었지만, 종종 그녀에게 험하고 음흉한 짓을 해버리는 상상도 했으니 그는 스스로의 자책감에 눌려버리고 말았지.


 그 생각에 잠긴 그의 슬픈 눈빛을 바로 알아챈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어.


"무슨 일 있어?"

"아, 아냐. 아무것도. 그건 그렇고 내일 아침은 뭐로 해야할지..."


윤이 얼버무리며 말을 돌렸지만 소녀는 그의 마음을  이미 알고있었어. 소녀는 사랑이란 감정을 마냥 모르는 아이가 아니었거든. 그녀도 가족과 사랑하고 사랑 받은 적이 분명 있었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해 필요없는 감정이라 그와 만나기전 버려두었음을. 그리고 이제 다시 그 감정을 윤이 되찾아준 것이나 다름 없었어. 그래서일까 자신을 좋아하고 살뜰히 챙겨주는 그를 싫어할 수 없었지. 오히려 그녀도 이젠 그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벌써 아침밥 생각하는거야? 아직 날도 안밝았다고."

"흠, 그치만 하루가 깨웠으니 깬 김에 겸사겸사 생각하는거지."

"깨운건 미안해. 나도 조금 더 자야겠어...."


그녀가 작게 하품을 하자 그도 그녀를 베개 옆에 내려주었지. 아무래도 그녀의 몸짓을 보아하니 원래는 따로 자야할 곳으로 가기 싫은 모습이었어. 잠자리로 옮겨줘도 그러고 싶지 않다고 혼자 꿍해져 토라질게 분명했으니까. 굳이 강제로 그러고 싶지도 않은 그는 옆으로 누워 그녀를 살폈어. 그녀도 그의 모습에 따라 옆에 살며시 누웠지. 그 모습은 마치 어미를 따라하는 어린 새끼 같았어. 


"윤은 언제 잘거야?"

"하루가 자면. 잠이 깼는지 잠이 안오네."


그 말대로 잠은 오지 않았지만 아직 몸은 피곤한지 눈가가 따끔거렸고 계속 그녀를 쳐다보면 그녀도 쳐다볼 것 같기에 그는 그대로 눈을 감았어. 눈을 감아도 인기척은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는 다정하게 한 손으로 누워있는 그녀를 감싸안아주었어. 그녀의 몸은 작지만 따스한 온기가 그의 약해진 심장을 뎁혀주는 것 같았지. 그가 눈을 감고 아무 말 않자 그녀도 재잘거림 없이 조용했어. 사실 서로는 누구 먼저 잠들지 않았고, 잠들고 싶지 않아 깨어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

"...."

"어, 숨 안쉰다."

"...쉬고 있거든."

"나 때문에 숨죽이고 있는 거 다 알아."

"...끄응."


조금씩 참던 그의 한숨이 풀어지더니 소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건드렸어. 그녀는 아직 잠이 안오는 것인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윤은 자신의 손을 건드리는 작은 자극이 느껴졌지. 그녀가 그의 손가락 끝에 손을 대거나 꼭 껴안고 있었으니까. 눈을 감고 있어도 알 수 있었어. 그는 그녀보다 먼저 잘 생각은 없었기에 잠깐 실눈을 떠 그녀를 확인한 뒤 한 손으로 옆에 누워있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지.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을 사이로 두 사람은 서로가 말이 없었지만 심장은 요동치고 있어, 설레임에 떨고 있음에도 내색 하나 하지 않으려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기로 했어. 


"나 할말 있어."

"응."

"말해도 돼?"

"응."

"윤을 좋아하는 것 같아."


그녀의 말에 노곤하던 그의 눈이 부릅 떠져버렸어.  잠이 확 달아났다는 게 더 가까운 말이었지. 눈 앞에는 작은 소녀가 자신의 말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어. 


"아.."

"응?"

"안돼... 절대로 안돼...!!"

"어째서?!"

"바보야, 난 그렇게 좋은 남자가 아니야...!"

"그렇지만...! 그건 윤의 생각이잖아..."


진지하게 고백하는 그녀의 눈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던 그는 간신히 고개를 내리며 눈을 맞추었지. 이미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른지 오래였고.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윤도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작다고, 어리다고 스스로를 틀어막고 있있었을지도. 혼자 선입견을 가진 채 작은 그녀와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지금 고백을 받은 이상 그녀를 위해서 거절을 생각하던 그였지만 거절하고 싶지 않았어. 이제 더 숨기지 않고 그녀를 사랑해주고 그녀에게 사랑받고 싶었으니까. 다정한 스킨십도 마음껏 하고 싶었고 매일매일 좋아한다고 말해주고 싶고 말이야. 연애나 감정표현은 늘 서툴렀기에 망설였던게 전부였지만 이젠 도망치고 싶지 않았지.


"하, 하루. 정말 괜찮겠어...? 하루에게 있어 난 거인이잖아."

"응!"

"그치만 너무 커서 안아줄수도 없고... 자다가 깔아뭉갤수도 있고... 또... 숨소리나 목소리도 하루에겐 너무... 크다고, 나는..."

"그런 것 쯤이야 얼마든지 괜찮아."

"대..대체 나 같은 덩치만 더럽게 큰 아저씨가 뭐가 좋다고..."


얼굴이 달아오른 채, 당황스러움에 횡설수설하는 그의 모습에 하루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고, 어느새 그의 손에 폭 기대어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어.


"정말 좋아.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루..."

"그러니까... 윤도 이제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언제부터 좋아했을까, 아마 처음 만났을 때부터라고 그는 생각했다. 비록 야위고 지친 모습이었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는 그녀의 눈빛은 순수한 불꽃처럼 강인했고 그런 면과는 반대로 밝고 호기심 많으며 순수한 아이라는걸 단번에 알 수 있었으니까. 자신과 정반대의 모습에 이끌리면서도 작지만 강한 그녀를 동경했어. 아마 그때부터 좋아했을 것이라고. 


"...나도 하루가 좋아."

"헤헤... 다행이다. 서로 좋아하는 거였네."


배시시 웃는 그녀의 미소에 그는 쑥스러워 멋쩍게 뒷목을 매만졌어. 자신보다 어리고 작은 그녀에게 고백에게 받아버리다니 먼저 고백하지 못한 것이 남자답지 못해 내심 마음에 걸린 그였지만 그래도 싫지 않았어. 오히려 행복했어. 그녀가 기꺼이 자신을 받아주고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어찌보면 그의 진심이 그녀에게 닿았고 전해진 것이었지. 하루는 그의 손 안에서 양 팔을 활짝 벌렸어. 자신을 그의 얼굴에 가까히 해달라는 뜻이란걸 안 그는 조심스레 가까히 가져왔고, 소녀는 재빨리 그의 볼에 입맞춤을 해주었지. 그녀의 애정에 보답하듯 그도 가볍게 그녀의 몸에 부드럽게 입맞춤해주었어. 그의 숨결이 간지러운지 소녀는 쿡쿡 작게 웃었고. 


"그러니까... 더 사랑해줄거지?"


그녀의 질문에 윤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지. 그러자 그녀가 조금은 떨리는 모습으로 쑥스럽게 웃으며 입고 있던 셔츠를 살짝 올리자 그도 두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그녀의 옷을 벗겨주었지. 아마 그 때가, 그가 제일 긴장되고 떨리고 흥분했던 날 이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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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에 야스할듯

야스 잘 못쓰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