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는 파병 여부를 놓고, 그렇다면 파병부대의 성격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프랑스는 이미 인도차이나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첫 파병을 위해 상륙한 지 한달도 안 돼 프리깃을 보낼 것을 제안했다.


8월 한 달 동안 정부와 군 당국은 이 문제를 논의하여 보병 대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가장 쉬운 해결책은 상비군 1개 대대를 보내는 것이었을 것이지만 인도차이나 전쟁의 필요성과 자원 인력의 이용가능성으로 인해 특히 이 분쟁을 위해 자원 부대를 결성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1940년 참사와 단발성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이런 규모의 첫 군사작전이 될 것이며

한국전에서 형편없는 전과는 프랑스의 군사적 명성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대대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최고 부대의 성과에 필적하는 전설적인 부대가 되었다.



모든 경제적 사회적 배경에서 자원자들이 몰려들었다.


장교들의 거의 4분의 3과 부사관들의 절반과 군인들의 4분의 1은 현역 출신이고 다른 사람들은 예비역이었다.


자원 봉사자들은 모두 프랑스 시민이어야 했지만 약 20명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외인부대의 참전용사였다.


심지어 자원 봉사자의 절반 이상이 이미 전투 경험이 있었으며 모든 병력들이 이미 전투를 보고 즐겼거나, 아니면 그 소식을 듣고 즐기기를 원했다.


많은 자원 봉사자들은 1940 년의 부끄러운 기억을 지우고 싶어했다.


많은 군인들이 지난 전쟁의 첫 전투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얻었지만

그 패배는 특히 수치스러웠다.


1940 년도에 많은 프랑스인들은 2 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를 해방시킨 미군에게 깊은 존경을 느꼈으며


그 결과 프랑스인들은 미군과 함께 싸우고 그들의 장비를 사용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역사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을 자극하는 동기가 있었다.


모험을 할수있는 낭만적 인 기회
자신이 할 수있는 것을 느끼고 한계를 테스트 할 수있는 기회
이국으로 가고 싶다는 소망
현지 여성 데이트?
큰 돈을 저축 할 수있는 기회

그리고 단조로운 삶을 떠나려는 욕망이 있었다.


이 고귀한 이유로 자원 봉사 한 사람은 말하길


2 차 세계 대전 중에 우리를 위해 싸우러 온 젊은 미국인들처럼 우리도 모르는 나라를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

대대에는 1,017 명의 병력으로 사령부, 3 개의 전투 중대 및 기갑 중대로 조직했다

전투 중대는 각각 0.30 구경 기관총과 3 개의 브라우닝 자동 소총을 갖춘 3 개의 소대였으며 2 개의 60mm 박격포와 2 개의 57mm 무반동포가 장착 된 화기소대가 있었다

기갑중대는 0.30 구경 기관총 8 개가 있는 전투 소대과 75mm 무반동포 4 개가 있는 전투소대로 구성했다.

대대는 프랑스 남부에서 구성 되었기 때문에 특정 출신이 있었다


1중대는 주로 해군 출신 참전 용사이였으며 2중대는 보병 참전 용사, 3중대는 공수부대 등이다


21대대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미 육군과의 훈련과 적응을 위해 대구에서 보냈다. 

현지에서 대대는 야간 작전과 순찰 훈련을 받았으며 미국산 무기에 적응했다

11 월 말에 중공군이 전쟁에 참가했을 때 여전히 훈련 중이었다.

프랑스 군인들은  종전이 다가올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전투에 참여한다고 발표를 듣고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