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당시 해전에서 군함의 전투력은 곧 함의 크기와 직결되었다

함이 크면 큰 포를 많이 달 수 있기에 교전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소형함들은 아무것도 못하는 ㅂㅅ들이었던건 아니다

소형함들은 어뢰를 장착해서 한방만 제대로 먹이면 거함도 불구로 만들 수 있는 히든카드를 장비했다


제아무리 큰 전함이라도 어뢰를 잘못맞으면 순식간에 격침당할 수 있었다

(사진은 HMS 버럼, U-331의 어뢰 3발 피격후 굉침)


그리고 이 히든카드의 끝판왕이 산소어뢰라 할 수 있다


소형함들이 히든카드로 어뢰를 달기는 했는데, 그 한계는 너무도 명확했다


가장 큰건 사거리였다


독일군이 쓰던 G7e(TII) 어뢰는 5km가량의 최대사거리를 가졌다


반면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15인치 함포는 30km가량 포탄을 쏠 수 있었고 실제로 훈련도중 21노트로 기동하는 표적함 '헤센' 에 25km에서 9발을 맞춘 기록도 있다


또다른 단점으로는 속도가 있다


G7e 어뢰는 30노트, 약 56km/h의 속도로 수중을 항주 가능했다

5km를 30노트로 주파하려면 10분이 조금 덜 걸린다는 소리다

근데 전함은 수십km 밖의 목표를 쏴도 탄착까지 수십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일단 어뢰를 맞추면 죽일수는 있겠으나, 사용가능한 환경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것이다


일본제국 해군은 이점이 심히 불만족스러웠다


일본의 가상적국은 미국, 그렇다면 연합함대의 상대는 세계 최강의 함대로 꼽히는 미해군 태평양함대


미해군을 능가하는 전함진을 건조하다가는 해군이 미해군을 능가하기 전에 자기 경제부터 능가하게 된다


전함보단 싸면서 적 전함을 잡을 수 있는 무기, 즉 비대칭병기가 필요해진 것이다


이때 눈에 들어온 것이 구축함들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어뢰는 그 한계가 명확했고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산소어뢰를 개발하게 된다


산소어뢰가 왜 위협적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어뢰의 구조를 살펴봐야 한다


당시 대부분의 어뢰는 웻히터(Wet-heater, 습식추진) 방식이었는데

압축공기를 산화제로 하여 산소를 공급하고 연소실에서 연료를 태워 추진력을 얻으며, 바닷물을 냉각제로 해 과열을 막고 부산물인 증기를 추진에 보태는 방식이었다


산소어뢰는 사실 특출난건 없고 산화제로 100% 순수 산소를 이용하는 물건이다


그러나 산소는 최고의 불쏘시개. 산화제로 산소가 들어가자 추진기관의 효율은 떡상하게 된다


일본의 93식 산소어뢰의 최대사거리는 무려 40km, 유효사거리는 22km에 달했다


G7e(TII)의 무려 8배에 달하는 사거리는 G7e(TII) 자체가 사거리가 그리 길지 않음을 감안해도 엄청난 수준이다


게다가 압축공기의 잔여물(질소 등)이 남아 생기는 어뢰의 항적도 산소어뢰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힘이 좋아서 탄두 크기도 압도적이었다. 93식 어뢰의 탄두는 890파운드였는데 미국제 Mk.11은 600파운드 가량이 전부였다.


참고로 이런 이점은 세계 각국의 이목을 끌었고 산소어뢰를 처음 실용화한건 우리의 혐성라이미 영국이다


아무튼 산소어뢰는 주력함을 격침시킬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고 일본은 전함이하 모든 함급에 산소어뢰를 장비시켜 미 해군 함정들의 '부드러운 아랫배' 를 노릴 준비를 마쳤다


문제는 자기들 등뼈도 같이 위험해졌다는 점이다


우선 순산소는 독가스다. 사람이 마실 경우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막고 세포를 손상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는 산소의 반응성이 생각보다 상당히 좋기 때문인데, 반응성이 좋다면 유기물에만 반응하리란 법은 없다


적탄 피격 또는 관리 부실 등등의 이유로 순산소가 유출되면 어뢰는 물론 주변의 함내 장비를 순식간에 부식시킨다(물론 줌왈트는 산소어뢰 때문에 녹슨건 아니다. 이유는 나도 몰?루)


해군 출신들은 알겠지만 배가 녹슬면 혹독한 깡깡이질이 기다리고 있다. 수병들도 힘들지만 군 입장에서도 돈도 깨지고 작전도 못나가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영국도 이점때문에 산소어뢰를 포기했다


사실 뭐 깡깡이질은 소소한 문제고...아까 산소는 최고의 불쏘시개라고 했다


그 불이 연소실에서만 나리란 법은 없다


890파운드짜리 거대한 탄두에 산소 1천 리터를 실은 어뢰 옆에서 뭔가 터지기라도 한다면?


중순양함(이었던 것)

모가미급 2번함 미쿠마인데, 공습에 노출되자 순식간에 어뢰가 피탄되었고 그대로 유폭, 격침된다

정작 모가미는 폭탄을 미쿠마보다 한발 더 맞았는데 어뢰를 모두 버린덕에 살아돌아갔다


미군의 항공력이 점차 강해지며 산소어뢰들은 전함을 때려잡는 강력한 죽창에서 폭탄의 표적으로 전락하고 만다


사실 어뢰 자체가 다들 터지면 ㅈ되는 무기지만 산소어뢰는 스파크 한번만 잘못터져도 그대로 유폭난다. 실제로 F4F 와일드캣이 겨우 100파운드(45kg) 폭탄으로 어뢰를 유폭시켜 구축함을 격침시킨 사례가 있다


이건 뭐 평소에도 빡시게 관리해야되는데 막상 전투 개시되면 불안해 죽겠는....


그렇다고 산소어뢰가 비웃음의 대상이 될 물건은 아니다


사보섬 해전에서 연합군 순양함대는 일본보다 전력이 우월했음에도 중순양함 4척과 구축함 2척, 1000명이 넘는 승조원들을 상실하고 대패한다

야간에 적을 먼저 발견하고 은밀히 뇌격한다는 최고의 환경과 산소어뢰의 긴 사거리와 위력이 합쳐진 결과였다


타사파롱가 해전에선 고작 구축함 8척이 산소어뢰를 적절히 사용해 미군 중순양함 USS 노스햄프턴을 격침시키고 3척의 중순양함을 중파시켰다.


위의 두 사례 모두 미군이 실책(전자는 승조원 체력관리 실패 및 전투중 오판, 불발탄 다수 발생 등, 후자는 성급한 포격개시로 인한 위치 노출)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산소어뢰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임에는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산소어뢰를 맞은 배치고 무사했던 배는 없다. 3만 5천톤급 고속전함 USS 노스캐롤라이나도 잠수함이 쏜 산소어뢰 1발을 맞고는 1달간 도크신세를 져야 했고, 순양함은 최소 중파, 격침되도 이상할건 없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이런게 갈수록 떼거지로 몰려나온다는거


제아무리 어뢰가 빨라봤자 비행기보다 빠를 것이며, 사거리가 길어봤자 비행기 항속거리보다 길겠는가


미군이 제공권을 잡은순간 산소어뢰는 세계최강 죽창에서 폭탄 덩어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산소어뢰는 스파크 한번만 튀겨줘도 환상적인 불쇼를 보여줄수 있어서 단순 기총소사도 일본군에겐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실제로 별것도 아닌 항공공격에 산소어뢰가 유폭되어 함생을 마친 함정도 많으며 

대표적인 예시로 모가미급 3번함 스즈야를 들 수 있다

스즈야는 사마르 해전에서 지원온 태피2 함재기들의 지근탄에 어뢰가 유폭되어 격침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산소어뢰가 의미없지는 않다

과달카날 해역의 제해권을 한동안 일본이 쥐고 있었던것도 따지고보면 산소어뢰 덕이 크다


산소어뢰는 나중에 자살병기 가이텐으로 개조되지만 이마저도 일단 터지면 위력은 확실했다

터진적이 얼마나 되는지는 넘어가자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산소어뢰는 해군력 격차를 극복하려는 비대칭무기라는 점에서 현대의 극초음속 대함미사일과도 비슷해 보인다


다만 당시의 기술적 한계로 제약이 너무 컷던 탓에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했다

어떻게 보면 개념적으로는 시대를 앞서간 무기랄까


달리보면 양날의 검에서 한쪽 날을 작살내버리는 항공기의 위력을 증명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교훈은 아무리 적과의 격차가 클지라도, 아무리 강력한 비대칭무기가 고플지라도

이새끼가 안하는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