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지역 즉 팔레스타인은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른다는 말 때문에 굉장히 풍족한 땅이라 오해 받기 쉬운데 이 지역은 양떼 모는 목축과 석청캐는 것 말고는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황무지였음. 그나마 예루살렘은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때부터 재정비를 하면서 그럭저럭 살만해지면서 중동 지역의 유대인들의 거점이 되었지.


여기엔 오스만 특유의 각 종교의 지도자가 행정 자치구를 이루어 지역을 통치하게 하는 밀레트 제도가 큰 역할을 했는데, 이후 17세기쯤되면 이 밀레트 제도가 오스만에 독이 되었는데 이교도라는 기독교도, 유대교도들이 고분고분 말도 잘 듣고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다보니 유목민족 위주의 튀르크계와 아랍계의 토호들이 이슬람인에 대한 역차별에 개빡쳐서 가나안 지역으로 몰려와서 대학살과 추방이 벌어지면서 이 지역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극소수만 남게 되었어.



드레퓌스의 눈 앞에서 그의 예도를 부러뜨리는 강등식.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폴란드를 중심 거점 삼아 유럽 전역에 자리잡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이방인에 대한 배척이 심한 동유럽에서는 14세기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3세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게토에 몱혀서 살아가게 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 유지할 수 있었어. 반면 서유럽에서 자리잡은 유대인들은 핍박에 못이겨 개종하는 등 슬슬 정체성을 잃어갔지.


그러나 19세기가 되면서 전세계에 민족주의가 형성되어 퍼져나가기 시작하고 1894년 보불전쟁에서 개털린 프랑스가 당시 포병대위였던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간첩 혐의로 몰아 감방에 처박으면서 유럽에 퍼져있던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받았지.


테오도르 헤르츨


가장 큰 충격을 받은건 오스트리아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인데,  '이제 유대인들도 유럽 사회에 녹아들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던 헤르츨은 파리 특파원으로 가서 재판에 참석 했는데 드레퓌스의 판결이 내려지고 재판장을 나오면서 자신이 지금껏 잘못 생각했다며 유대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유럽 사회에 동화될 수 없다 유대인을 위한 유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마음을 먹게 돼. 그래서 그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의 각국의 지도자를 만나면서 유대인들을 유대인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불모지를 찾아다녔고 결국 마음의 고향인 팔레스타인으로 가자며 오스만의 술탄을 찾아가서 청원도 올리는 등 유대인들의 스타정치인이 되며 유대민족주의적인 시오니즘 세계대회(Zionist Organization;ZO)를 창립했어. 근대 세속적 시오니즘의 시작이었지.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고 싶은 헤르츨은 베네치아를 모티브로 나라를 구상하면서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에게 참여를 권했지만 빅토리아 시대에 적응하여 부유하게 성장한 유대인들은 헤르츨의 꿈에 호응하지 않았지만 동유럽의 가난한 유대인들이 큰 열광을 하며 시오니즘에 동참했지. 그리고 1903년 영국은 자기들의 식민지 우간다에 유대인을 위한 땅을 마련해 줬고 헤르츨은 긍정적으로 검토했으나 그가 심장병 때문에 1904년에 사망하자 새롭게 시오니즘 국제기구의 수장이 된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하임 바이츠만은 반드시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며 영국의 제안을 거부하게 되었어. 그렇게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핍박을 피해 시오니즘만 가지고 조금씩 예루살렘으로 흘러 들어갔고 1차대전 전까지 약 8만명의 유대인들이 65만명의 팔레인과 함께 가나안 지역에 자리잡고 농사나 지으며 살아갔어.


사라예보 사건.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의 손에 암살되었다.


그러나 1914년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리고 팔레스타인의 비극이 시작됐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삼국협상을 중심으로 한 협상국과 맞짱 뜨기 위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삼국동맹이 이루어 졌었는데, 눈치보던 이탈리아 왕국이 중립을 선언했다가 협상국에 참여하는 통수를 시전. 독일은 새로운 동맹으로 끌어들일 파트너가 필요했고 그 대상으로 오스만 제국을 선택했지. 근데 오스만은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그레이트 게임의 파트너로 해군 지원을 빵빵하게 해줬고 거기에 독일이 호응해서 대포나 총 같은 지상 장비의 지원을 해주던 나라였어. 그런데 독일을 견제한다고 영국이 프랑스와 함께 러시아를 끌어들였단 말이지. 거기에 독일과 싸워야 한다면서 오스만에 주기로 했던 드레드노트급 전함 5척을 꿀꺽했으니 꼭지가 돌아버린 오스만은 안 그래도 철천지 원수인 러시아와 같은 편은 죽어도 못 하겠는데 영국 니들도 그 지랄을 해? 라면서 독일의 편에 서고 말아.


사이크스-피코 협정.


자기가 저질러 놓고 정신 못차리고 꼴 받은 영국은 1915년 윈스턴 처칠의 주도 하에 오스만을 침공 계획을 짰고 오스만을 흔들기 위해 광대한 오스만의 영토 중 아랍 지역을 흔들자는 생각에 메카와 메디나 일대를 통치하던 하심 가문에 접근하여 오스만에게 칼침 놓아주면 독립을 도와주겠다고 말하며 반란을 주도하게 돼. 이게 아랍과 영국 간에 맺게 된 맥마흔 선언이야. 갈리폴리와 팔레스타인 국내외적으로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분전하던 오스만은 1915년 말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대판 깨지면서 국력이 급격하게 기울어지는걸 보자 1916년 5월 영국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가 만나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고 가나안 지역을 둘로 나누어서 요르단강 남쪽 하이파, 아코, 이라크 남부와 같은 해안지역을, 프랑스는 터키 남쪽과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북부를 통치하기로 협의한거야.


로스 차일드 가문

하임 바이츠만.


ZO의 수장 하임 바이츠만은 이 기회에 팔레스타인 일대에 유대국가 건설을 강하게 주장 했는데 그가 아세톤을 대량 생산 하는 기술을 개발해서 영국의 탄약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데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막대한 전쟁 자금을 지원 해주고 있으니 유대 자본의 끄나풀을 잡고 있어야 했던 영국은 1917년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가 로스 차일드 가문에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편지를 보내게 돼.


종전 이후 위임통치령의 시작.


1918년 드디어 길고긴 1차대전이 끝났고 영국은 일단 다른 약속들은 싹 무시하고 프랑스와 함께 아랍지역을 나누었는데 삼중계약 걸어버린 이상 독촉은 당연히 오기 마련이지. 하심 가문은 벨푸어 선언을 보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졌고 영국은 가나안 지역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모두의 성지라며 공동 관리하겠다고 선언을 해버린데다 유대인 이주를 계속 시키겠다고까지 말한거야. 파이살 1세는 어이가 없지만 기존의 땅이라도 얻자는 생각에 시온주의자들을 그냥 받아주고 그 지역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차별이나 하지 말자며 바이츠만과 협상을 하게 돼.


허버트 사무엘.


1919년 파리 강화회의 이후 요르단강 서안은 영국이 직접 관리하지만 이라크와 요르단강 동쪽은 파이살 1세가 통치하게 넘겨줬는데 문제는 영국이 직할령 통치자로 임명한 사람이 허버트 사무엘. 유대인이었어. 그의 묵인 하에 유대인들은 계속 유입되어 정착촌이 늘어갔고 게토에서부터 시작된 유대인의 국가 경영 능력이 결합하자 기존 팔레스타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빠르게 발달해 나갔어. 그렇게 차별을 느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919년 4월 갈릴리에 형성된 키부츠가 모두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모두 학살하는 반유대주의 폭동이 일어나 버리고 말아. 이에 유대인들은 같은 해 6월 정착촌 민병대 및 경찰 역할을 하게 될 '하가나'라는 조직을 창설했고 아랍인들로부터 정착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분노와는 별개로 세계는 종전의 여파로 경제공황이 시작 되었고 그로 인해 주로 소련과 폴란드에서 약 16만명의 유대인들이 1929년까지 몰려오게 되지.


동유럽에서 신념만 투철한 시온주의자들이 들어온다? 당연히 굉장히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겠지. 이들은 무슬림들의 폭동에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문제를 일으켰고 영국은 부랴부랴 이민제한도 걸고 두개의 자치정부안도 내보고 했지만 무용지물이었어. 그러던중 1928년. 극단적 시온주의자들이 예루살렘에 몰려가 무슬림들을 내쫓고 모스크를 유대교 예배당으로 바꿔버리는 사고를 치고 말아. 이에 이슬람 학자들이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들은 체도 안하자 아랍민족주의자 아민 알 후세이니가 대규모 폭동을 일으켜켰지만 수백명의 사상자가 나고 진압이 돼.


이후 아랍권은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이 필요하다면서 뭉치게 되었고 1930년부터 영국 식민 정권에 반발하는 투쟁을 하며 유대인들을 보면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자 하가나는 무장을 강화했고 이에 격분한 알 카심을 비롯한 아랍독립론자들은 더 격하게 키부츠를 공격해. 이에 유대인들 중에선 정착촌 치안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하가나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생기게 되었고 극단 시온주의자들에 의해 분리된 이르군이라는 준군사조직이 설립되어 이번엔 아랍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 시작되며 이때부터 복수가 복수를 낳는 피의 보복 전쟁이 시작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