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당국이) 의병의 활동을 거의 공개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의병들은 단순히 백성을 뜯어먹는 무질서한 비적처럼 묘사하고 있다. (중략) 그리고 일본인 고위 관리는 당시 의병 진압을 위해 2만여 명이나 되는 일본군이 동원되었으며 전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이 작전지역임을 토로했다. 일본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강한 저항을 했지만 1915년에 이르러 진압되었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산악인들과 평야의 젊은이들, 호랑이 사냥꾼, 그리고 구한국군(대한제국군) 출신의 의병들이 겪은 고초를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를 무시하기 위한 일본인, 그리고 이를 모르는 다른 외국인이 한국인을 일러 비겁하다거나 자기의 운명에 대해 무심하다는 식으로 해 온 조롱은 설득력을 잃을 것이다.


“1919년 봄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항에서 펼친 평화로운 봉기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The peaceful uprising of the people of Korea against Japan in the spring of 1919 came as a world surprise)”라고 서문을 시작한 맥켄지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상세히 기록했다.


“일본군이 한 마을을 평정하고(폐허로 만들고) 나면 순진한 수백 가구가 의병에 투신했다”고 밝힌 맥켄지는 “(폐허가 된) 마을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생업을 조용히 누리는 것 뿐”이라며 “적어도 어느 한 지방은 초토화 작전으로 그토록 유복하던 곳이 폐허가 되었고 의병의 수는 날이 갈수록 증가했는데, 이때 뿌려진 증오의 씨앗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수 세대가 지나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의병을 취재한 영국 기자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Frederick A. Mackenzie) 가 의병을 직접 취재한 바로는 일본은 의병의 활동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비적처럼 묘사했고 직접 취재한 결과 정의로운 봉기였다는 결과를 내놨음. 오히려 일본이 마을을 폐허로 만들고 다녔고 이 때문에 의병이 증가했음. 즉,일뽕은 100년 전 일본의 선전선동을 그대로 믿고 있다는 거임. 아마 무츠도 침몰 안하고 아직까지 존재한다고 믿고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