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침공 당시 700명의 폴란드군이 42000명의 독일 국방군을 4일 동안 막아낸 60:1의 방어전. 이 전투를 지휘했던 브와디스와프 라기니스 대위는 폴란드의 영웅이 된다.

9월 1일, 나치 독일은 폴란드 침공을 시작했다. 일찍이 독일은 자국의 외무장관 요아임 폰 리벤트로프와 소비에트의 외무장관 몰로토프 를 통해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바 있었다. 이때 두 나라는 폴란드를 나눠먹기로 합의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은 당시 자유도시였던 그단스크(Gdańsk)의 베스테르플라테(Westerplatte)를 포격했다. 이 포격으로 인해 폴란드와 독일 간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폴란드군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독일군은 계속 진격했다. 9월 7일에는 오늘날 폴란드 동북부 지역의 나레프(Narew) 강 유역에 있는 비츠나(Wizna)까지 진격했다. 근처에는 폴란드의 도시 웜자(Łomża)가 있었다. 웜자는 특히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도시였는데, 이 도시에 살고 있는 25,000명 중 9,000명이 유대인이었을 정도였다. 한때는 전체 도시 인구 대비 유대인 비율이 40%까지 육박했다. (나중에 나치는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을 잔혹하게 학살하며 씨를 말렸다.)
당시 비츠나에는 31세의 브와디스와프 라기니스(Władysław Raginis) 대위가 이끄는 폴란드군 720명(사병 700명, 장교 2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브와디스와프 라기니스는 1908년, 러시아 제국령의 지빈스크(Dźwińsk), 오늘날의 라트비아 제 2의 도시인 다우가프필스에서 출생했다. 1930년 7월 15일에 보병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 이후에는 사미(Samy),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의 소도니 사르니에서 근무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그는 폴란드 북부 지역으로 소환되었다.
1939년 9월, 폴란드군은 나레프 강 유역에 방어진을 구축했다. 독일군도 9월 7일, 나레프 강 유역에 도착했다.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Nicolaus von Falkenhorst)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은 폴란드군과 작은 교전을 치렀다. 이후 독일군 탱크는 다리를 건너려고 했으나 폴란드군이 여기에 포탄을 쏟아붓는 바람에 다리가 붕괴했다. 밤이 되자 독일군 보병이 강을 도하하려고 했으나 이들은 폴란드군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은 채 후퇴해야 했다.
9월 8일, 하인츠 구데리안과 그의 병력이 비츠나에 도착했다. 그는 어마어마한 병력을 이끌고 있었는데, 1,200명의 장교와 41,000명의 병력, 350대의 전차, 195문의 대전차포, 108문의 곡사포, 58문의 대포, 288정의 중기관총, 689정의 기관총 등의 병력을 보유했다. 구데리안의 병력은 라기니스 대위가 이끄는 폴란드군의 60배에 달했다.
라기니스 대위가 이끄는 병력은 700명의 사병과 20명의 장교, 2정의 대전차 소총, 42정의 기관총, 6문의 76mm 대포 등의 병력을 보유했다.

9월 9일 아침, 독일군 항공기가 공중에서 폴란드군에게 전단을 살포했다. 그 내용은 폴란드의 대부분이 이미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가 있으며, 무익한 저항을 그만두라는 이야기였다. 이에 라기니스는 자신들이 전멸하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맹세로 대응했다.
이후 독일군의 폭격이 개시되었다. 구데리안은 하루종일 폴란드군에게 폭격을 퍼부었지만 폴란드군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더불어 독일군의 전차와 보병이 3개 방면에 걸쳐서 폴란드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고 했지만 폴란드군의 방어망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구데리안은 독일군의 좌익으로 하여금 폴란드군의 우익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는데, 그 시각 폴란드 군 우익의 벙커에는 2개 소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폴란드군의 방어선은 동쪽에서 뚫렸다. 독일군은 상당한 피해를 보고 강을 도하했지만,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한편, 기에우췬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폴란드군의 키에블리츠(Kiewlicz) 중위는 독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비아위스토크(Białystok)를 방어하고 있던 프란치셰크 클레베르크(Franciszek Kleeberg)[1] 장군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폴란드군의 좌익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폴란드군은 전차에 대항할 만한 무기가 부족했지만, 그들은 독일군에게 기관총을 계속 쏘아대면서 저항하고 있었다. 오후 6시에 독일군 보병과 전차가 강을 도하했으며, 이곳에 있던 벙커와 요새화된 건물들을 점령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폴란드군과 전투을 치뤄야 했다. 밤이 되자 치열했던 전투는 끝이 났다. 이후 독일군에 의한 몇 번의 습격이 있었지만 격퇴되었다.
그리고 9월 10일이 찾아왔다. 정오 12시 즈음에 독일군의 전차와 대포는 아직 남아있던 2개의 폴란드군 벙커를 파괴했다. 720명에 불과한 폴란드군을 이끌고 영웅적인 전투를 벌였던 라기니스 대위는 수류탄으로 자결했다.

전투 이후, 독일군은 잠브루프(Zambrów)와 비소키에 마조비에츠키에(Wysokie Mazowieckie)를 점령했다. 이 도시에서도 독일군과 폴란드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주변에 있던 도시인 웜자는 독일군이 침공을 개시한 이후 폴란드를 침공한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웜자는 1941년, 독일이 바르바로사(붉은 수염) 작전을 통해 소련을 침공할 때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이 지역에 있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
폴란드군은 720명 중 포로로 잡힌 40명과 전투 도중 전장을 떠난 40명을 제외한 전원이 전사하였다. 독일군의 피해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이 전투에서 900명의 독일군이 전사했다고 하나, 이는 매우 축소된 수치로 생각된다. 어쨌든 독일군의 인명피해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10대의 전차와 몆 대의 기갑 전투 차량을 잃었다.
이 전투는 스웨덴의 록 그룹인 사바톤 의 노래의 소재가 되었다 사바톤은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해 '40:1'이라는 제목의 곡을 만들었다. 브와디스와프 라기니스는 폴란드의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한편 소수의 병력이 끝까지 항전하며 분투했다는 점에서 이 전투는 폴란드의 테르모필레라고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