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무성의한 사과만 남겨놓고 굳게 닫혀버린 문.


어이 없을 정도로 당당한 윗집 여자의 태도에 잠깐 나가버렸던 정신줄을 겨우 붙잡았다.

그리고 분노보다 앞서는 황당함에 머리를 쓸면서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러 여자를 부른다.


맑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방 안쪽에서 들리던 인기척이 줄어들고 다시 문이 열린다.


덜컹─


"저기, 잠깐만요. 전 아직 아무말도···."


"하··· 네, 죄송하다니까요? 조용히 할테니까 나중에 이야기 하시면 안 될까요?"


방금까지 웃고 있었던 건지 살짝 상기된 얼굴에 짜증이 섞여든 미소를 짓는 여자.


뻔뻔함을 넘어서 기본적인 예의가 부족해보이는, 싸가지가 없는 태도가 짜증을 부른다.


"저기요, 뭘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 지금 시간이 벌써 9시잖아요?

그래서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드리는 건데, 왜 그쪽이 화를 내세요?"


"네, 그래서 죄송하다고요. 사과드렸고 조용히 하겠다고 말했잖아요.

안 그래도 지금 일하느라 바쁜데, 계속 방해하시니까 전 짜증이 나는 거고요."


윗집 여자는 자신의 말을 이해했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다.


타인의 목소리에는 귀를 막고 오로지 자신을 중심으로 두고 살아가는 이기적인 인간.

이성적인 대화가 절대 성립될 수 없는 상대, 이 여자는 흔히 '진상'이라고 하는 부류였다.

일을 하면서 자주 만나보는 인간들, 경험 상 이런 인간들과는 엮이지 않는 편이 최선이다.


그런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텐데.


"아니, 그러니까 왜 그쪽이 저한테 짜증을 내는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늦은 시간에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는 부탁에 왜 짜증을 내시는 건데요?"


그러나 오늘 겪었던 비현실적인 일상이 주는 피로와 스트레스 때문일까,

평소라면 그냥 차분하게 대화로 넘겼을 상황에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아, 진짜··· 뭐라는 거야, 이해를 못해요?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 저 일한다고요.

다 끝나면 조용히 해준다는데 왜 굳이 다시 불러내서 사람 귀찮게 만드냐고요!"


점점 높아지는 서로의 언성,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말싸움에 지쳐간다.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뱉어내는 뻔뻔한 독설에 어째선지 익숙한 더러움이 느껴졌다.


낮에 보았던 마법소녀들의 반짝임과 대비되는 끈적하고 불쾌하기만한 어두움.

남에게 피해를 주고도 일말의 죄책감조차 가지지 않는 인간들에게 겹쳐보이는 괴물.

이 인간들이 포이즈너와 다른 점이 있을까? 아무렇지 않게 더러움을 뿌리는 건 완전 똑같은데.


일을 할 때마다 만났던 진상, 지나가며 보고 들었던 여러 쓰레기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혼잣말처럼 되뇌이던 생각도 수면 위로 떠오른다.


'저런 사람들도, 마법소녀라면 구해낼 수 있을까?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리 없지.


착잡함과 머릿속을 긁어대는 스트레스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인다.


더 이상의 말싸움은 해봤자 의미도 없을 것 같고, 괜히 힘을 써봤자 말이 안 통한다.

일단 그만하고 경찰을 부르던가, 집주인에게 다시 한 번 경고를 부탁하던가 해야지···.


"···어."


마지막 주의를 주기 위해 고개를 들어올린 순간, 빛이 보였다.


지잉─


"더 할 말 없죠? 그럼 이제······."


여전히 뻔뻔함에 젖어 있는 여자의 머리 위에 생겨난 영롱한 푸른 물로 만들어진 고리.

분명 오늘 낮에 내게 떠올랐던 헤일로와 똑같은 것이 여자의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깨끗함과 고결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에게 생겨난 마법소녀의 증표인 헤일로. 

모순되는 광경에 인상을 약간 찌푸리며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그것을 넋 놓고 바라본다.


"···저기요, 제 말 듣고 있어요? 뭐야, 저기요!"


머리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여자가 신경질을 부리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는 물의 고리에서 서서히 뻗어나오는 가느다란 물줄기.

마치 해파리의 촉수처럼 보이는 뭉툭한 물줄기 두 가닥이 꿈틀대며 허공을 거닌다.

그리고 그 물줄기들은 여자의 귓가 근처를 맴돌다 스르륵, 귓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아직까지도 이변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내 가슴을 쿡쿡 찔러대는 여자.


"저기, 아저씨, 할 말 있으면 더 해보라고요. 사람 말 무시하지 말─"


지이잉─!


"─고옥?!"


이제 변화가 시작되었다.


여자의 귀에 꽂아넣은 물줄기를 통해 푸른색 빛을 흘려보내는 헤일로.

그 빛이 여자의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마자 그 여자는 외마디 신음과 함게 두 눈을 위로 굴렸다.


"아, 아아···? 어, 에···? 으긋?! 오, 옥···?!"


살짝 기울어진 고개를 경련하면서 입가에 침과 괴상한 소리를 흘리는 여자.

양쪽 뺨, 피부에 그려지고 있는 푸른 빛의 회로선이 완성되자, 그녀는 고개를 푹 떨궜다.

여전히 빛나고 있는 헤일로는 귓속에 박혀있던 두 개의 촉수를 뽑아 거둬들였고,

윗집 여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힘 없는 양팔을 허리 옆에 늘어놓고 있었다.


"······."


"······."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침묵, 이거 분명 아까 전에도 비슷한 일이···.


오늘 낮에 만났던 포이즈너의 간부, 애시드와 똑같은 분위기가 감도는 여자의 모습.

하지만 어딘가 달라보이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면서 목소리를 내어본다.


"저, 저기요? 괜찮···."


"───."


내 손끝이 그녀의 어깨에 닿기 직전, 번쩍 올라오는 고개.


뺨 위에서 희미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회로선과 머리 위 헤일로.

그리고 다시 떼어낸 눈꺼풀 뒤, 검정빛을 대신하고 있는 하늘색 동공.

방금까지의 싸가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그녀는 잔잔한 호수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말기 확보 및 장악 완료. 처음 뵙겠습니다, 마스터."


몸을 반듯하게 세운 뒤, 오른손을 이마에 붙여 내게 경례를 하는 윗집 여자.

그녀는 나를 '마스터'라고 부르면서 차게 식어버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뭐라고···?"


"마스터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현 상황에 대해 설명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어, 네··· 그게, 부탁드릴게요···?"


180도 바뀌어버린 여자의 태도에 괜히 나까지 덩달아 침착해진다.

쭈뼛대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양손을 배꼽 아래로 공손히 모은다.


"이해하시기 쉽게 설명드리자면, 전 '이것'입니다."


오른손을 들어올려 관광지를 안내하는 가이드처럼 머리 위 헤일로를 가리키는 여자.


"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헤일로, 마스터의 힘을 보조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마스터의 존재가 만들어낸 원인모를 변칙에 의해 자아를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마스터께서 이 여성체의 '정화'를 희망하셨기에 즉각 본 여성체를 장악한 것입니다."


내가 정화를 희망했다니, 설마 아까전에 혼자 생각했던 그것 때문에?

게다가 헤일로가 직접 의지를 가지고 인간의 몸을 빼앗았다고?


"그러니까··· 아까 내 머리 위에 떠있던 헤일로가, 지금 그쪽 머리에 있는 헤일로가 당신이라고요···?"


"역시 마스터,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다. 저를 컴퓨터, 본 여성체를 출력 장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차례대로 머리 위 헤일로, 그리고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는 여자.


가감없는 움직임에 의해 출렁출렁 파도를 일으키고 있는 가슴에 괜히 눈을 돌린다.


아깐 말싸움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 여자는 되게 헐렁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짧은 흰 나시에 편하게 걸칠 수 있는 시스루 가디건, 그리고 탱글한 허벅지를 감싼 돌핀 팬츠.

피부의 면적이 훨씬 많이 드러나는 옷을 의식하자 그제야 커다란 가슴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마스터?"


"아, 아니··· 그게, 아직 좀 믿기지 않는다고 해야하나, 현실성이 없다고 해야하나, 요···?"


괜히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긁는다.


"오늘 갑자기 포이즈너의 간부라는 흰색 여자한테 습격받은 것도 그렇고,

그 간부를 마법소녀로 만들 뻔한 그 이상한 물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는데, 머리가 잘 안 따라주는 기분이라서··· 하, 하하···."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는, 헤일로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로봇처럼 딱딱하고 정교한 움직임으로 가디건의 단추 하나를 툭 풀어버리곤─


"─이건 어떠십니까?"


"으, 으왁?! 자, 잠깐만!!"


느슨해진 가디건의 옷감 사이로 나타난 나시의 목을 붙잡아 아래로 잡아당겼고,

그 뒤에 숨어있던 여자의 젖가슴 한 쪽이 파동을 일으키며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렇지 않게, 무표정으로 가슴을 드러낸 모습에 놀라버린 난 그녀를 집 안으로 밀어넣었다.


얼떨결에 모르는 여자의 집에 들어와버렸는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뭐, 뭐하는 거예요?!"


당황스러움에 애써 목소리를 높이며 그녀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건조한 대답.

생판 모르는 남에게 젖가슴을 스스로 보여주고도 흔들리지 않고, 잔잔한 푸른빛 눈동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마스터의 보조를 위해 만들어졌고, 당신에 의해 자아를 각성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현재 저의 의사를 출력하는 장치일 뿐, 저는 마스터께 절대 거스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절대적 복종을 표현할 수 있는 행위로 마스터께 신뢰를 드리는 것이 우선으로 판단했습니다."


"그, 그게 가슴 보여주기···?"


그녀는 드러난 젖가슴을 스스로의 손으로 주무르고, 손가락 끝으로 핑크빛 젖꼭지를 긁어댄다.


"네, 본 여성체는 신소희, 20세, 현재 버츄얼 스트리머로서 개인 방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신소희의 사고를 분석한 결과, 절대 마스터 같은 남자에게 자신의 유방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야 그렇겠죠···?"


"다시 말해, 즉 신소희는 저에게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으읏···?!"


천천히 내게 다가오는 소희, 그리고 내 손을 가져가는 작고 부드러운 손.


그녀는 깊고 공허한 호수 같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며, 

내게서 빌려간 손을 자신의 젖가슴 위에 올려다 주었다.


손안에 느껴지는 부드러움, 손가락 사이로 튀어나오는 살들에서 느껴지는 탄력.

부드러운 냄새에 따뜻한 체온, 그 모든 것에 반대되는 차갑고 감정 없는 눈빛.


소희를 장악한 헤일로는 말했다.


"마스터께서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 *


일단 제목은 조금 더 고민해보기로 하고, 노벨피아 갈때 쯤 바꿔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