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토눌라의 난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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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트릴랑의 결심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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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은 사람과 말을 뼛조각 하나 안 남기고 다 먹어치워 놓고도 격렬하게 교접을 이어 나갔다. 이들이 피로를 느껴 모두 잠든 것은 해가 중천에 뜬 뒤였고, 동굴 속에는 코 고는 소리와 잠꼬대 소리, 그리고 비 맞는 새끼 들개마냥 낑낑대는 듯한 작은 기도 소리만이 울렸다.  


"주 하느님,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시되, 제 뜻이 아닌 당신 뜻대로 하소서! 안세기셀 공, 내 술잔에 흙을 넣으면서까지 하신 청을 들어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용서하세요! 아버지! 어머니!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이는 산트릴랑이 동굴 한구석에 묶인 채 전날 밤의 참상을 목격하여 공포와 광기에 휩싸이고, 잠에도 들지 못하여 넋이 나간 채 죽음을 기다리는 소리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산트릴랑의 눈앞에 있는 자 중에 그 기도를 들어 줄 만한 이라곤 어젯밤에 괴물들이 처녀들과 말들의 육신을 잘라서 삶을 때 쓴, 돌무더기를 다듬어 만든 화로 속 작은 불씨들뿐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불씨 중 하나가 툭 튀어오르더니 꺼지지 않고 두둥실 날아와 산트릴랑의 뒤로 가서는 그의 팔을 묶은 밧줄을 순식간에 태워 버리는 게 아닌가? 산트릴랑은 몸을 고정하던 것이 갑자기 없어져 앞으로 쓰러지고는 자신을 구해준 불씨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정은 나중에 설명할 테니 일단 여기서 벗어나시오!"


그제야 산트릴랑은 정신을 차리고 숨을 죽이며 잠든 괴물들 몰래 동굴을 빠져나왔고, 햇빛이 눈에 들어오자 비로소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아까 그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아직이오. 나를 따라오시오."


이에 산트릴랑이 정신을 차리니, 방금 전에 그를 구했던 불씨가 눈에 들어왔다. 불씨는 산트릴랑이 자신을 응시하자 도망치듯 어디론가 날아갔다. 산트릴랑은 그 뒤를 쫓아, 중천에 있던 해가 지평선 쪽으로 절반쯤 내려갈 때까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달려갔다. 그리고 그 끝에 시야에서 불씨가 뜬금없이 사라져 버렸고, 이어서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악!"


산트릴랑은 놀라서 뒤로 넘어가 버렸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뒷다리에 화살을 맞고 눈에는 투창을 맞은 큰곰이었는데, 산트릴랑이 있는 곳이 골짜기였으니 그 들개는 사냥꾼에게 쫓기다 위에 있던 절벽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역시나 얼마 안 있어 그 투창과 화살의 주인이 말뚝과 밧줄을 이용해 절벽 위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산트릴랑은 피로가 누적된 탓에 그에게 제대로 말도 걸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곳은 좁고 허름한 오두막의 침대 위였고, 베일을 쓰지 않은 부인 하나가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 부인은 산트릴랑이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하고 남편을 불렀다.


"여보, 아도레! 수녀님이 눈을 떴어요!"


그러자 방 한 켠의 문에서 부인의 남편이 나왔다. 문을 열 때 양 우는 소리가 들렸고 나온 사람의 손에 양털이 든 동이가 들린 걸 보니 그 너머에 축사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내는 덩치가 크고 건장했지만 다리를 다쳤는지 오른쪽 장딴지에 부목을 대고 천으로 묶어 두고 있었다.



"드디어 일어나셨군. 수녀님, 이 아도레다보르(Adoredabord)가 쓰러진 당신을 여기까지 모셔 왔수다. 어때, 아픈 데 없으쇼?"


산트릴랑은 힘겹게 일어나 아도레다보르에게 감사를 표했다.


"주님께서 이 보잘것없는 여자를 보호하시어 괴물들의 소굴에서 꺼내 선한 이의 쉼터에 데려다 주셨기에, 몸에 다친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형제님은 몸이 성해 보이지 않는군요."


수녀가 아도레다보르의 오른쪽 장딴지를 보고 말하니, 사내가 대답했다.


"이 발목은 당신을 구하려다 부러진 게 아니라, 이전에 멧돼지와 싸우다 다친 거니 걱정하지 마쇼. 덕분에 요즘 임금님이 전쟁한다고 온 나라 사내들을 군대로 끌고 갔는데, 난 병신이라며 면제 시켜 줬지. 하하하!"


"전쟁이요? 프랑크 왕국에서는 전쟁 소식을 못 들었는데요."


산트릴랑이 놀라서 되묻자 사냥꾼은 그런 게 있다며 둘러대곤 탁자에 앉아 양털 손질에 돌입하려 했다. 이에 부인이 남편을 다그쳤다.


"여보, 손님이 궁금하신 모양인데 알려 줘요. 보아하니 소식을 못 접하고 순례 오신 분 같은데, 우리가 멀쩡한 정보를 못 줘서 수녀님이 봉변을 당하면 이 땅 사람들 모두가 신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르잖아요."


사내는 아내의 말을 듣고 잠깐 뚱한 표정을 짓더니 몸을 수녀 쪽으로 돌리고는, 자신들이 있는 곳의 정세에 대해 나름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그 덕에 산트릴랑은 로타리 왕이 동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이탈리아 반도를 모두 차지하기 위해 전국의 사내들을 긁어모으는 중이고, 그 탓에 알프스 산맥의 짐승들과 괴물들을 견제할 사람이 줄어 랑고바르드 사람들은 그 근방을 통행하는 것을 지양하고 있지만, 이 때문에 프랑크 왕국에 이를 알리러 갈 사람도 없어서 프랑크인들이 이를 모르는 것도 무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사냥꾼이 말을 마치자, 수녀는 감사하면서도 난색을 표했다.


"숲에서 객사하는 것을 면하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평생을 감사해야 할 텐데, 그동안 아무에게도 듣지 못했던 순례길 정보까지 들려 주시다니요.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만, 지금 제가 가진 거라곤 이 더러워진 옷가지뿐이군요."


그 말을 듣자, 아도레다보르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시선을 허공으로 향하더니 곧 침대 앞 궤짝에서 무언가를 꺼내머 말했다.


"'가진 것' 하니까 생각났는데, 이거 혹시 당신 거요? 다 부서진 수레에 깔려 있던 짐더미에서 챙겼는데 멀쩡한 게 그것들뿐이더구려."


그것은 산트릴랑이 성모 마리아에게서 받은 베일과 지팡이, 그리고 안세기셀이 준 구리 술잔이었다. 과연 길 아래쪽 흙바닥에서 주워 온 것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산트릴랑은 그것을 받고 다시 한 번 감사를 하려 했으나, 사냥꾼이 막아 세우고 자기 말을 이었다.


"거, 있어 보쇼. 난 탐욕스러운 놈이 아니오. 짐승이 득실대는 산구석에서 혼자 돌아다니던 사람한테 뭘 받을 생각을 할 놈이 아니란 말이오. 그래도 그렇게 내게 뭔가를 주고 싶다면, 기도나 좀 해 주쇼."


"무슨 기도를 말입니까?"


수녀가 묻자 사냥꾼이 답했다.


"배가 고프니, 밥 먹으면서 얘기합시다. 여보, 밥."


"알겠어요. 수녀님, 싫어하시는 음식이라도 있으신가요?"


부인의 물음에 수녀가 답했다.


"무릇 입에 댈 수 있는 음식들은 모두 주님께서 내리신 축복이니,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이라면, 금요일에는 짐승 고기를 먹으면 안 되겠지요."


부부는 당황했다. 그날이 금요일이었고, 둘은 그때까지 금요일에도 고기 요리를 아무렇지 않게 먹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부인도 그날 수녀에게 고기를 대접할 생각이었다. 남자는 아내와 서로 눈길을 주고받은 뒤, 칼과 횃불을 챙기고는 문을 나서며 말했다.


"아, 암요. 금요일은 생선 먹는 날 아니오. 집에 오기 전에 잡아 온 생선을 어디다 놓았더라... 어흠, 어흠..."


사내는 하늘이 포도색일 때 나가서 검은색일 때 돌아왔는데, 딱 봐도 갓 잡은 걸 알 만큼 피를 흘리는 갈색송어를 손에 들고 있었다. 수녀는 부인을 보고 후훗 하며 웃었고, 부인은 쓴웃음으로 화답한 뒤 말없이 남편에게서 생선을 받아들고 요리를 했다. 조금 늦은 저녁을 먹으며, 아도레다보르는 겨우 다시 말을 꺼냈다.


"그... 아까 했던 말 있잖소. 기도해 달라 했던 거."


"기억합니다. 계속 말씀해 주세요."


수녀가 웃으며 답하니, 사냥꾼이 계속 말했다.


"사실 나도 프랑크 사람이었소. 정확하게는 메스 사람이었지. 내 아버지는 브룬힐트 왕비 휘하 장수였는데 무능한 인물이라, 병사들을 모두 정예병으로 육성하겠다며 휴식 시간과 식량을 절반으로 줄이고 훈련을 자정까지 시키며, 병들고 다친 병사도 억지로 훈련을 시킨데다 그걸 따라가지 못하면 봉급이나 휴가를 줄이고 허구한 날 그들의 부모와 고향까지 들먹이며 모욕했소. 결국 브룬힐트가 파리 왕과 마지막 결전을 할 때 병사들이 모조리 배신해서 패배했고, 파리 왕은 아버지더러 사형당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며 알프스 산맥으로 추방시키고 산지기 겸 양치기로 썩게 하셨소. 내가 산지기인 것은 아버지로부터 일을 물려받아서라오."


"그렇다면 저는 당신의 아버지를 징벌할 것을 청하는 기도를 올려야 합니까?"


수녀가 심각하게 물으니, 사냥꾼이 답했다.


"아니오, 비록 남의 위에 설 사람은 못 되었어도 나를 세상에 있게 한 이요. 그분의 영혼을 구하는 기도를 올려 주시오. 동네 신부님 말씀에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 중에 연옥이란 게 있다는데, 거기 있는 사람들은 산 사람들의 기도를 받으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했소. 하지만 내가 교리를 잘 알지는 못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는 모르오. 수녀님께서 대신 좀 해 주시구려."


산트릴랑은 수락했다. 식사를 마치고, 수녀는 부인이 요리를 할 때 버린 갈색송어 간에 나뭇가지를 꽂아 초를 만들고 불을 붙인 뒤 성호경을 긋고 기도를 올렸다.


"언제나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하느님, 이 세상을 떠난 제 동료들과 제 은인의 아버지를 기억하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모든 세상 떠난 이들과 같이, 사탄의 손에 넘기지 마시고 거룩한 천사들을 시켜 천상 낙원으로 데려가소서. 이들은 세상에서 주님을 바라고 믿었사오니 그 간절한 손을 내치지 마시어, 지옥 벌을 면하고 영원한 기쁨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사냥꾼 부부도 수녀의 옆에서 함께 기도를 올렸지만, 늦은 시간에 지루한 기도문을 읊느라 순식간에 곯아떨어져 버렸다. 산트릴랑은 그들을 억지로 깨우지 않고, 그저 그들의 몫까지 기도하였다. 그날 밤, 부부는 꿈을 꾸었는데, 죽은 아도레다보르의 아버지가 매우 깨끗한 옷을 입고 그들 앞에 나타나 이런 말을 하고 사라지는 꿈이었다.


"아들아, 며느리야. 오랜만이구나. 이 아비는 생전에 부하를 학대하고 주군을 속인 죄로 지옥에 갈 운명이었지만, 알프스로 귀양 가는 길에 있던 다 무너진 베스타 신전에 들러 여신상에 낀 이끼를 닦아 주고 간 덕에 연옥에 가는 것을 허락받았지. 그리고 베스타 여신께서 신앙심 깊은 수도자를 우리 집에 오도록 이끄시고 나를 위해 기도하게끔 하신 덕에 겨우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어. 내가 지금 너희 앞에 온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란다. 하나는 천국으로 가기 전에 꼭 한 번 너희 얼굴이 보고 싶어서고, 또 하나는 내 은인인 저 수녀님을 극진히 모시고 죽기 전까지 주님을 믿으며 교리를 지켜서 천국에 오라고 당부하기 위해서야. 부디 내 말을 기억해 다오. 그럼 천국에서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