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을 방랑하는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돈다.



어린 아이를 혼자 두지 말라.

어린 아이를 혼자 두지 말아라.


그것은 비단 늑대 때문은 아니요,

떠도는 부랑자나 이민족 때문도 아니로다.


어린 아이 홀로 초원에 서 있으면

초원의 요정이 나타나 아이를 홀려 갈 지니.


그 곳엔 목동이 남겨둔 지팡이와 모자만이 남아서

제 주인이 있었음을 담담히 읊으리.








아한은 나비를 좇았다.


새하얗고 새하얀, 

평원 너머 저 높은 산처럼 새하얗고 새하얀 나비를 좇았다.


하늘하늘

나풀나풀


나비의 날갯짓이 품은 신묘함은

댓살 배기 어린아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양떼를 보던 큰 누이가 멀리 가지 말라 소리친다.

하지만 저 어린 동생만 보기에는 눈을 떼면 안 될 곳이 많다.



하늘하늘

나풀나풀


나비는 아이가 귀찮았을런지,

혹은 충분히 다 놀고 난 것인지.

제 일 다 했다는 듯 다시 표표히 높이 날아간다.


멀리 날아가는 나비를 쫓아

앙증맞은 발이 폴짝 뛰어본다.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

그 안에 저 멀리 무엇인가 들어왔다.


드넓은 지평선, 그 너머 푸른 언덕.

그 위에 누군가 서 있다.


아한이 사슴같은 눈망울을 크게 떠 보지만

때마침 불어오는 찬 바람이 짓궂은 장난을 친다.




눈을 비비는 아한의 귓가에 집에 가자며 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떼가 풀을 다 뜯었는지, 누이와 양치기 개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언덕을 되돌아보지만 그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초원 신기루를 본 것 처럼.


먼저 간다며 언성 높이는 누이. 

어린 목동이 부리나케 뒤를 쫓았다.













칠일 낮이 지나고.

칠일 밤이 지난 날.


코를 훌쩍이던 댓살배기 어린아이 눈에, 하얗고 하얀.

널따란 지평선 그 너머 높은 산처럼 하얗고 하얀 나비.


달덩이 같은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펴진다.


나풀나풀

하늘하늘

폴짝폴짝


다각다각



아침을 맞아 하루를 준비하던 부락에 손님이 찾아왔다.

멀리서부터,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하나 둘 하던 일을 멈추고 저 멀리 다가오는 누군가를 바라본다.

말을 타고 천천히 다가오는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본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하고, 싱그러운 초원의 여인이 다가와 그들을 내려다본다.


가벼운 옷차림과 커다란 활, 단단한 단검.

늘씬한 키와 길다란 팔다리.

옆으로 솟아나온 길쭉한 귀.

무심코 눈이 가고야 마는 아름다운 얼굴.



부족장이 초원의 마땅한 주인에게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다른 어른들도 똑같이 천천히, 경의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갓 어른이 된 소년 소녀들도 그들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다만, 오로지 한 명.


소년 소녀의 곁을 지나

어른들 사이 사이로

족장 할아버지 옆을 지나쳐


달덩이 같은 얼굴에, 천진난만함이 가득한 해맑은 웃음.

나비마저 내버려두고 달려온 아이는 엘프 여인에게 두 팔을 뻗는다.



대경실색한 어른들이, 

아한의 어미아비가 튀어나가려는 것을 

족장이 손을 들어 막았다.




엘프 여인이 말에서 내려 아한에게 다가갔다.


그 무덤덤하고 차가운 얼굴에, 겨울 아침의 초원에

살며시 포근한 미소가, 아침햇살이 깃든다.


새하얀 섬섬옥수가 코찔찔이의 잠의 흔적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추운 아침에 흘러나온 콧물도, 숨어있던 눈곱도 전부.


그리고 으레 그래왔던 것 같이 자연스럽게 아이를 안아 올려 이마를 맞대었다.

까르르 웃는 아이를 마주보는 은은한 미소는 아침의 추위도 잊은 것 같았다.



어머니가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눈물을 참는 것도 모른 채,

자신을 안아든 여인과 어른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모른 채,

작은 아이는 언제 봐도 신기한 듯 길쭉한 귀를 조물딱거렸다.





아마도 이 아이는 그렇게 떠나가겠지.

샛별의 아이는 그렇게 떠나가겠지.


자신을 꼭 안아주는 어머니도

말 잘 들으라 머리를 쓰다듬는 아버지도

몸 조심하라며 팔찌를 매어주는 큰 누나도

언제 다시 볼까 모를 일이다.



테이슈는 다시금 그렇게 노래를 곱씹어본다.



어린 아이를 혼자 두지 말라.

어린 아이를 혼자 두지 말아라.


그것은 비단 늑대 때문은 아니요,

떠도는 부랑자나 이민족 때문도 아니로다.


어린 아이 홀로 초원에 서 있으면

초원의 요정이 나타나 아이를 홀려 갈 지니.





그는 쓰게 웃는다.



초원의 요정은 아이를 홀리지 않는다.

외려, 그들이 사람의 아이에게 홀린다.


샛별처럼 빛나는 아이에게

초원의 하늘같은 순수함과 밤별같은 아름다움에


아마 여인도 그렇게 아이에게 홀렸으리라.


하늘에서 내려온 이 작은 무동(舞童)에게

나비와 함께 아울러 낸 해맑은 춤사위에

멀리서 바라보다 자기도 모르게 홀렸으리라.



그리고 하루하루.

이 작은 천사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또 조심스레 다가갔을 것이다.


아무도, 아무도 몰래.

아무도 둘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아무도 몰래.


테이슈도, 아이의 부모도, 그 누구도 큰 누이를 탓하지 않았다.

초원의 주인이 그러리라 마음먹은 즉슨 아무도 찾지 못했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때가 되면 이렇게.

초원의 주인들은 감히 자신을 홀린 별을 찾아 그 댓가를 받으러 오는 것이다.



둘째 형을,

친했던 친구를,

어린 조카를,

넷째 아들을,

막내 손자를,


족장을 물려받고 이젠 노인네가 되어버린 지금 이 순간도

저 아이를, 그렇게.


아마 그들 뿐만 아니라 다른 부족들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어린 샛별들을 초원의 주인들에게 안겨보냈다.








눈이 말똥말똥한 아한을 품에 안고 엘프 여인이 말에 올랐다.

별을 안은 그녀는 초원 너머로 달려갈 것이다.

이미 별을 안고 있거나, 별을 찾고 있는 동족들이 있는 곳으로.


어린 아이는 무언가 직감했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를 부르는 아한을 엘프 여인이 달래기 시작했다.



테이슈는 옅게 웃었다.

감히 초원을 지배할 만큼 한없이 강대한 그녀들일지언정

품에 안은 별에게는 한없이 약했다.


영영 떠나갈 것 같던 모습이더라도

채 열흘이 지나기 전에 부족을 찾아오는 엘프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적어도 일 년에 한두번은 제 신랑을 데리고 고향을 방문하곤 했다.



하여 큰 걱정 말라며, 테이슈는 부족민들을 위로하였다.

그런 광경을 함께 본 만큼 이미 이들도 알고 있었겠지만 

당장 자식을 떼어놓게 되는 어미의 마음은 또 그렇지 못한 법이니까.








아일타는 제 품에 안겨 잠든 아이를 바라봤다.

달리는 말 위에서도 잘만 자는 게 울다 지쳤는지 아니면 타고난 천성이 태평한 것인지.

너무 어린 나이에 어미에게서 떼어놓았나 하다가도, 고이 잠들어 새근거리는 얼굴을 보니 참을 길이 없다 싶었다.


말랑한 볼살에 앙증맞은 손.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보여준 함박웃음.

무엇 하나, 어디 하나 귀엽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음을 발견했다.


새삼스러웠다.

부족 내에서도 감정 표현이 적기로 손에 꼽던 자신이 이렇게 되었을 줄이야.

'칸'의 명령을 받아 순찰을 떠나올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예정에 없던 일주일을 쓰게 되었지만 그것은 자신이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어린 신랑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걱정은 되지만, 그것 역시 자신이 신경을 좀 더 쓰면 될 일이다.



아한이 옹알이며 뒤척였다.

아일타는 자세를 조금 고쳐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이 아이의 머리를 받아 고정시키게끔 했다.

어미에게 직접 안기는 것만 못하겠다만 그래도 한결 편안할 것이다.


아이가 몸을 비집으며 품에 파고들곤 다시 새근거리며 잠에 들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여 아이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볼을 맞댔다.


심장에서부터 퍼져오는 따뜻한 온열.

볼에 느껴지는 기분좋은 간질거림.

강인한 팔에 안겨있는 조그만 몸뚱이.

귓가에 들려오는 여리디 여린 숨소리.



아일타가 한 숨 가득히 샛별의 빛을 들이키고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달렸을 준마는 지치긴 커녕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울며 속도를 올렸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초원의 태양.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느긋하게 초원을 뒤덮는 별밤의 물결 아래

비로소 샛별을 가진 하늘이 달렸다.












** 웹소설 플랫폼 'ㄴ'사의 <납치혼 당했다, 유목엘프들의 칸에게> 에서 일부 설정 차용.

몬붕이로도, 소설 그 자체로도 정말 재밌으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