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토눌라의 난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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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트릴랑의 결심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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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제자와 답답한 스승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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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와 그 제자는 말 덕분에 지쳐서 쉬는 횟수를 줄이며 순조로이 플로렌티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제자는 여전히 자신의 마법이면 진작에 순례길을 다 돌았겠지만 스승의 아집으로 그의 주변이나 돌며 호위밖에 하지 못한고며 툴툴거렸으나, 산트릴랑은 몰래 기도문을 한 번 외우고는 더욱 꿋꿋하게 앞을 바라보며 말을 몰았다. 


제누아에서 플로렌티아로 가는 길은 피로는 느끼지만 병에 잘 안 걸리고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 이가 가면 한 주가 걸린다. 산트릴랑은 수도자의 미덕을 준수하여 식탐을 경계했음에도 반나절 정도 말을 타면 기력이 빠지고 배를 곯았으며, 이를 보충할 수 있는 식량을 얻기 위해 길가의 들판이나 숲에서 해롭지 않은 것을 주워 먹거나 마을을 들러 일을 하다 보면 시간이 더 걸려서 경로의 삼분의 일이 되는 지점에도 다다르지 못한 채 한 주를 소비했다. 그리하여 일행이 플로렌티아에 다다른 때는 출발한 지 한 달이 훨씬 지난 뒤였다.

 

그래도 주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길을 꿋꿋이 진행하려는 산트릴랑의 의지가 빛을 발하여, 계절이 변하고 나서 마침내 플로렌티아에 다다랐다. 그곳은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들과 에우로파를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 도시 중 하나였기에 전쟁 전에도 외부인의 왕래가 잦았는데, 랑고바르드의 왕이 전국의 장정들을 징집할 때 중간 집합장소 중 하나로 지정되어 산트릴랑 일행이 도착했을 때 이미 사람이 물처럼 흘러넘쳐 도시가 그에 잠긴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물론 통제도 잘 되지 않아 몇몇 오만한 젊은이들이 수녀 일행을 보고 휘파람을 불고 희롱을 하는데 말리는 이 하나 없었다.


"왐마 저거, 저 여자 살색이 어두운데 가슴골이 깊어서 더 어둡게 보이는 거 보소."


"어이, 거기 말 탄 부인! 혹시 이 외로운 청년의 몸은 탈 생각 없소?"


"하하하하하!"


베르토눌라는 야만인의 낙원의 맹주였을 때 밤마다 여러 지방에서 내어 준 장정들을 한꺼번에 안고 자곤 했기에, 그들을 보자 당시의 문란한 기억이 떠올라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스승이 눈치를 주어 발길을 재촉했기에 하는 수 없이 못 본 체 하고 그 도시의 수도원으로 갔다.


주교좌였던 플로렌티아에는 약 400년 전에 순교한 동정녀 레파라타(Reparata)를 기리는 성당과 거기에 딸린 수도원이 있었으나, 도시가 이전부터 워낙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라 투숙객이 묵을 만한 곳을 모두 크게 지었기 때문에 수도원이 성당보다 열 배 정도는 넓고 컸다. 또, 현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팔도록 유도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인상을 심어 주고자 수도원의 내부에 온갖 화려한 장식을 설치하고 귀한 식재료를 들였으며 수도자들마저도 비단과 양모로 짠 알록달록하고 깨끗한 수도복을 입고 귀금속과 보석으로 장식한 반지와 목걸이 따위를 착용했다. 물론 묵주도 유리와 황금으로 만든 것을 들고 다녔다.


산트릴랑은 곧장 말을 몰아 그 수도원의 정문 앞에서 내리고는, 문을 두드려 사람을 부르고 자신의 신원을 밝히며 하룻밤 묵게 할 것을 청했다. 그곳의 수도자들은 산트릴랑에게는 점잖게 예를 갖추었지만, 베르토눌라를 보고는 기겁해서 앞다투어 멀찍이 떨어지려 했다. 그와 같이 피부는 검고 머리카락은 번쩍이는 이질적인 형상을 띤 자를 여태껏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베르토눌라가 역정을 내려 하자, 스승이 그를 달래고 수도자들에게도 제자에 대해 좋게 말해 주었다. 


"이자가 비록 이 땅 주변 사람들과는 겉모습이 많이 다르게 생겼을지언정, 그 영혼에 모신 성령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들도 안심하고 제자를 융숭히 대접하였다. 향료와 기름을 잔뜩 쓴 귀한 요리와 부드러운 천을 덮은 자리를 내어 주며 행자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해 주었고, 산트릴랑이 순례 도중 주님의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 기도를 올리려 하자 금박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한 모자이크 앞으로 모셨다. 망뜨의 수녀는 그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예식을 마치자, 늙어서 등이 굽고 얼굴이 쭈글쭈글한데 옷은 그곳에 있던 누구보다도 화려한 수녀가 산트릴랑을 찾아왔는데, 주변에 있던 다른 수녀들이 그를 향해 몸을 낮추었고, 또 그 중 하나가 산트릴랑 일행에게 늙은 수녀를 소개했다.


"이분은 우리 동정녀 수도원(Monasterium Virginis)의 수도원장이신 폰다우레아(Pondaurea) 님이십니다."


수도원장과 망뜨의 수녀는 인사를 나누었다.


"프랑크 왕국에서 오신 분을 이 늙은이가 직접 맞이해야 했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는 핑계로 귀빈을 홀대했습니다. 야훼께 복받은 자매님. 부디 아량을 베풀어 선처하시고, 머무르시는 동안 이곳을 자매님의 집으로 여기십시오."


"선처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와 대뜸 접대를 청한 저희가 용서를 받아야지요. 그리고 대우라면 이미 받은 것이 너무 많아 감사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자매님들께 아버지의 가호와 축복이 있기를!"


늙은 수도원장은 인삿말을 듣자마자 산트릴랑을 데리고 그 수도원의 가장 좋은 방으로 갔다. 베르토눌라는 끌려가는 스승을 지켜보다가, 말에게 먹이를 주고 오겠다며 마굿간으로 가 버리고는 백마 앞에서 혀를 쯧 차며 중얼거렸다.


"대체 내가 갇혀 지내는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런 재물욕이 하늘을 찌르는 늙은이가 수도원장까지 될 수 있었던 걸까? 나도 로마가 융성하던 때에 수도자라는 족속을 본 적이 있었지만,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겠답시고 일찍 죽으려는 이상한 자들이기에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갔었지. 그래도 그들은 귀한 것과 버려도 되는 것을 나름대로 구분할 줄 알았었는데, 저 자는 영생은커녕 먹지도 못할 황금과 보석만을 좇으니, 그 죽은 자들이 저승에서 저걸 보면 기겁해서 이미 썩은 몸에 다시 들어가 살아나겠어."


백마는 건초를 씹으며 그의 말을 가만히 들어 주었다. 제자는 말에게 먹이를 다 주고 난 뒤 다시 스승이 있는 곳을 향했는데, 산트릴랑은 수도원장이 따라 준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늙은 수녀는 손님의 제자가 들어온 것을 보고는, 젊은 수도자를 시켜 투명한 유리잔 하나를 그에게 쥐어 주고 거기에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유리잔에 비친 자둣빛 광채에 향은 고소한 아몬드나 호두와 같은 고급스러운 포도주였는데, 산트릴랑은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술맛 칭찬을 연거푸 쏟아냈지만 이전에 넥타르까지 마셔 봤던 베르토눌라는 그 쓰고 텁텁한 음료를 수도원장의 쭈글쭈글한 얼굴에 뿌리고픈 욕망을 겨우겨우 억눌렀다.


"제자분께서 안색이 영 밝지 않으신데, 혹시 포도주가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아닙니다. 술맛이 정말 환상적입니다. 이자는 과일을 날것으로 먹기 좋아하는 야만족 출신이라 좋은 술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스승의 망언을 들은 베르토눌라는 산트릴랑의 콧구멍에 술을 들이붓고 싶었지만, 그가 또 주문을 외울지 몰라서 욕구를 참기 위해 애썼다. 산트릴랑은 제자의 불만을 아랑곳하지 않고 포도주 맛을 칭찬하기 위해 라틴어로 노래까지 지어 읊었다.


"Vinum Florentinum, dulce nectar vitae,

Laude dignum, etiam deo gratiae.

Rubrum, luscum, fervens in amphora,

Gustu suavi, corda recreat cora.


In collibus Florentiae, vineae vernant,

Uvas maturas, vindemiae cantant.

Viritim collectae, in dolio conduntur,

Temperantur, maturantur, resplendentur.


Salve, vinum Florentinum, eximium donum,

Luxuriantis Tusciae felix coronum.

Bibamus, laetemur, tua dulcedine,

Inebriati, aeternae sint tuae vinae."


폰다우레아 수도원장은 흡족한 얼굴로 산트릴랑에게 감사를 표하고 말했다.


"자매님께서 우리 동정녀 수도원의 수녀들이 온 세상 여행자들에게서 주워 들은 조잡한 지식으로 직접 담근 포도주를 이리도 칭찬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국 프랑크에서 오신 분께서는 이미 이 술보다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을 잔뜩 지니고 오셨을 텐데, 어찌 그리 시까지 지으시면서 부족한 것을을 치켜 세워 주시는지요? 호호호..."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훌륭한 음료는 풍족한 플로렌티아에서만 마실 수 있을 것이고, 프랑크에서는 왕도 함부로 입을 못 댈 것입니다. 저같이 빈민 구제할 돈도 없는 가난한 수도자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설령 저에게 이것과 같이 가치있는 물건이 있었대도, 순례길에 가져올 틈이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폰다우레아는 살짝 깔보는 눈빛을 띤 채 웃어제꼈고, 산트릴랑은 그 눈빛을 보지 못한 채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러나 제자는 그 나이 헛먹은 할망구가 재물을 자랑하려고 스승을 떠보는 것을 알아차렸고, 안 그래도 불만이 가득했던 차에 한 방 먹여주고픈 마음을 끝내 누르지 못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스승이여. 가치있는 물건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이전에 짐 정리하는 틈에 얼핏 봤는데, 당신의 주머니에는 적당히 널찍해서 머리나 어깨에 걸치기 좋고, 깨끗한 게 보기에도 좋은 고운 천이 한 장 있지 않소? 그거면 이 술만큼 가치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말을 듣자, 시중을 들던 젊은 수녀들이 소리를 낮추기 위해 애를 쓰며 킥킥대고 웃었다. 몇몇은 '저들이 대국에서 온 게 맞냐' 아니면 '대국이래봤자 역시나 야만족들 동네구나' 하고 작게 비아냥댔다.


"이보쇼, 뭐가 그렇게 우습소? 우리도 같이 좀 웃어 봅시다그려."


베르토눌라가 능청맞게 질문하자, 그들 중 하나가 대답했다.


"여행자분. 저희가 웃은 건 여행자분께서 면포를 두고 가치있는 물건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수도원에는 신참조차도 비단과 양모로 짜고 황금 실로 수를 놓은 최고급 베일과 망토를 스무 장씩은 갖고 있으며, 원장님께서는 거기에 온갖 보석까지 달린 것을 못해도 칠백 장씩은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행자분께서는 그런 원장님 앞에서 베일인지 망토인지 정하지도 못한 면포 한 장을 보물이랍시고 자랑하려 드시는군요."


웃는 이유를 밝히고 나니 더 참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수도원 수녀들이 마침내 더 참지 않고 큰 소리로 비웃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산트릴랑은 당황하여 제자를 억지로 자리에 앉히면서, 술에 취해 약간 발음이 뭉개진 어투로 수녀들을 달래려 하였다.


"아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이 녀석이 또 무슨 불만이 생겨서 이러는지. 아까 들은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주시길..."


죈노비스는 스승의 발음이 뭉개지는 걸 듣고 주문을 못 외울 것을 확신해서는 수녀원장과 그 휘하 수녀들에게 끝내 자존심 싸움을 걸었다.


"아, 그래요? 대체 얼마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베일과 망토기에 우리가 가진 것이 보물이 아니라고 하시는 걸까요? 우리 한 번 서로 보여주는 것이 어떻소?"


그러자 폰다우레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젊은 수녀들을 시켜 자신의 베일과 망토가 든 상자를 가져왔는데, 그 수가 열 개가 넘어가는 순간 '그 이상은 다시 돌려놓기 힘드니 그만 가져와라' 하고 수도자들을 저지했다. 각 함들은 종류와 색깔에 따라 옷들이 구분되어 들어 있었는데, 과연 하나같이 명품이고 관리도 제대로 받는지 광택과 윤기가 있고 촉감이 부드럽지 않은 게 하나도 없었다.


"어떻습니까? 손님께서 자랑하시는 것보다 못할지도 모르지만, 나름 사방팔방에서 구한 질 좋은 베일과 망토들입니다. 듣자 하니 갖고 계산 면포는 스승님 거라면서요? 제자분께서도 하나 가지시렵니까?"


늙은 수녀가 기고만장해서 빈정대었다. 베르토눌라는 그걸 보고 음흉하게 한 번 미소를 띠고는, 자기를 잡아당기는 산트릴랑을 뿌리친 뒤 짐더미에서 성모 마리아의 베일을 꺼내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