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대기실에서 땀과 팔에 긁힌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며 트레이시는 아르셰가 건넨 붕대를 팔에 감았다. 아르셰는 명령하지도 않았음에도 전투에 뛰어든 행위에 화를 내리라 생각했으나 그러지 않은 것에 의아해했다.


" 혼내지 않는거야? "


" 혼내? 어째서? "


"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멋대로 덤벼들었잖아. "


" 덕분에 이겼는걸? 그리고, 아르셰는 똑똑하니까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싶었어. "


조금 딱딱해져 있던 아르셰의 표정이 살짝 풀어진다.


" 이유가 있는거지? "


트레이시의 말에 아르셰가 고개를 끄덕였다.


" 데미우르고스 님께서 연락하셨어. "


" 데미우르고스가? "


" 다음 전투는 혼자서는 무리일 거라고. "


그 말에 트레이시의 표정이 언짢게 변한다. 자신도 강해졌으리라 생각했고, 실제로 강해졌다고 여겼지만, 그들의 시선에는 여전히 자기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아이 취급일까.


" 지금 몇 레벨쯤일까. 10? 20? 한참 멀었으려나... "


칠드런의 성장은 일반 플레이어와 다르게 빠르다. 그러나 트레이시가 이토록 독보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본래 위그드라실에서는 플레이어가 칠드런을 데리고 다니며, 자신이 몬스터를 잡아 경험치를 분배하는 방식이지만. 이미 레벨이 100인 아인즈와 더불어 이 세계에 와서 아인즈 없이 스스로 적을 쓰러뜨려 얻은 경험치가 굉장히 높았기 때문이다.


" 레벨... 이라는 건 그 사람들이 아는 이야기야? 단위 같은건가? "


" 응, 아버지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 사용하던 단위. 나도 원래 태어나기 전까지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데... "


언제나 골똘히 생각할 때마다 어렴풋이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흐리게 무언가가 가로막듯 기억을 보게 해주지 않는다. 위그드라실과 관련된 정보, 자신이 성장하면 얻을 수있는 힘, 모든 기억이 분명히 들어 있는 것이 느껴지지만 자신이 어느 정도 성장할 때마다 조금씩 흐려진 기억이 아주 약간만 선명하게 보일 뿐.


' 최근 들어서 하나 더 무언가가 느껴지긴 하는데... 아버지가 했던 말대로라면... 10레벨... 단위였지? '


" 이와 같은 느낌은 이전에 영구지배를 배웠을 때였으니까... 이제 20레벨은 넘긴걸까. 20% 인가... 느리네... "


" 자. "


" 음. "


아르셰에게 물 한 컵을 받아 시원하게 받아넘긴다. 다음 경기는 분명히 더 어려울 것이다. 더불어 다음 경기는 이제 동물이 아닌 사람. 이전까지와는 다를 것이 분명했다. 안킬로우르수스 보다 쉬울지도 모르지만.


" 다음 경기도 함께 하는거야? "


트레이시의 질문에 아르셰가 고개를 저었다.


" 으응, 아니. 도와주라고 한 건 이번 한 번뿐. "


' 다음 전투는 나 혼자? 다음이 더 어려운 전투가 아닌건가? '


데미우르고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딱히 문제 되지 않는다. 라는 것이 아인즈에게 들었던 데미우르고스의 평가였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 그렇지만 조심하라고 하셨어, 다음 상대는 딱히 상대방을 죽이지는 않는다고는 하지만... "


" 하지만? "


" 이 근방에서 아다만타이트 이상의 실력자는 아마 무왕과 그 사람뿐일 거라고... "


아다만타이트. 아인즈가 속해있는 칠흑이라는 모험자 팀이 속해있는 등급이다. 모험자들 중에서는 최강의 타이틀이라는 모양이다. 그러나 각기 능력은 달라 그들 사이에서도 능력의 차이는 천차만별인 것 같았다.


" 어째서지? "


이형의 해골이 입을 열었다. 다음 전투가 긴장되는 것은 트레이시뿐만이 아니었다. 코퀴토스는 당장이라도 무기를 꺼내 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인즈의 다음 말을 기다리기로 했다.


" 안킬로우르수스는 인간의 기준에선 꽤 강한 것 같지만. 투기장에서 다음 전투는 그보다 더 강한 존재가 나오는 것이 아닌건가? "


" 터치. 미. 님께서. 출전. 하셨. 던. 월드. 챔피. 언의. 투기. 장은. 어떠했. 습니. 까? "


" 거기와는 조금 다를 거다. 수많은 플레이어가 월드 챔피언의 자리를 놓고 싸웠으니까. 투기장처럼 엔터테이먼트 용도와는 조금 다르지. 하물며 제국의 투기장은 이미 왕의 자리도 있지 않더냐. 도전자가 없다고 하던데. "


' 뭐 자세한 이야기는 터치 미 씨만이 알겠지만. '


" 그렇지만, 다음에 전투할 상대는 아다만타이트 급의 실력자라고 하던데, 트레이시에게는 아직 무리가 아닐까. "


" 아인즈. 님. 께서는. 아가씨. 께서. 위험하. 시면. 어떻게. 도와. 주실. 생각. 이십니까? "


" 시간정지를 사용한 후 트레이시와 똑같은 도플갱어를 내보낸다. 그리고 트레이시는 지연 마법으로 결속을 건 뒤, 또 지연 마법으로 상위전이를 사용할 생각이다만. 어째서 그러지? "


" 아니. 옵니다. 수. 많은. 인간. 들의. 눈을. 뚫고. 어떻. 게. 아가. 씨를. 빼낼. 생각이. 신지. 미천. 한. 제가. 궁금했을. 뿐. 입니다. 역시. 훌륭. 하신. 계획. 이십니다. "


" 너에게는 내 계획의 문제점이 보이지 않느냐. "


" !? "


별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말 그대로, 아인즈는 자신의 계획에 어딘가 헛점은 없을까. 정말로 궁금했을 뿐이다. 그러나 코퀴토스는 아인즈가 자신을 시험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어딘가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적어도 시간이 있었다면 찾아냈을지도 모르지만 몇 분도 되지 않는 시간은 금방 지나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죄송. 합니. 다. 무능한. 저를. 벌하. 소서. "


" 음? "


" 문제. 점을. 도저. 히. 찾지. 못하겠. 나이다. 데미우르고스. 처럼. 현명. 하지. 못. 한. 저를. 벌해. 주십시오! "


' 또 무슨 소리야... '


" 뭐, 뭐... 문제점을 찾지 못했다면 그거대로 다행이구나, 이번 질문은 답이 없는 문제였으니까. "


길어질 것 같은 이후의 이야기를 생략하기 위해, 아인즈는 최대한 그럴듯한 이야기로 코퀴토스를 어르기로 했다.


" 무슨. 말씀. 이신. 지. "


" 문제점이 없다는 이야기다. 혹여나 네가 어거지로 문제점을 찾아내려고 하지는 않을까 그렇게 생각 했다만, 대답이 빠른 걸 보아하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훌륭했다. "


" 실로. 감사. 드리옵. 니다! "


" 음? 무슨 일이지. "


다음 경기를 기다리는 둘의 시선이 원격투시경으로 향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그들이 기대한 것과는 다른 답을 내놓았다.


" 관객 여러분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이후 있을 A조의 경기는 내일로 미뤄졌습니다. 본래 있었던 경기의 결과가 너무나도 예상 밖이라 예정에 차질이 약간 생긴 모양입니다. "


그와 동시에 관객석이 술렁거렸다. 일각에서는 트레이시의 전투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항의가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지만, 사회자는 안킬로우르수스는 트레이시가 잠시 쉬는 휴식 시간에 있을 B조의 경기에서도 사용될 예정이었기에 그 경기를 준비하는데 차질이 생겼다는 이유로 경기를 중단했다.


' 멋대로 죽이려고 했던 상대가 이겨버렸다. 그래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뭐 그런 이유인가. 흥. '


조금 기분이 언짢아진 아인즈였지만 트레이시가 하루 채비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 안타깝지만 복귀다. "


" 앗. "


레이너스가 말했다. 대기실에서 붕대로 뒤덮인 트레이시의 팔을 들어 올린다. 상처를 건드려 살짝 아픈 기색을 보이자 황급히 손을 내려놓았다.


" 괜찮은 척하더니, 상처가 깊잖냐. "


" 괜찮아, 이 정도는 치유 마법이면 금방. "


" 치유 마법은 상처를 치료해 주지만 흉터나 고통을 없애는 건 아니야. 그런 식으로 싸우다간 언젠간 정신적으로 버티지 못할 거다. "


" ... 흠. "


" 그럼 돌아가지. "


" 어? 데려다주는 거야? "


" 뭔가 착각하고 있군, 내가 여기 온 건 황제의 명령이다. "


" 에, 그런거였어? "


" 그럼 내가 정말로 단지 너를 보러왔다고 생각했던 거냐? "


트레이시는 조금 실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훗, 전에도 말했겠지만 너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때는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지. "




***




투기장을 나와 황궁으로 향하는 셋의 근처에 두 명의 호위 기사가 붙었다. 목적은 레이너스의 호위였으나 그녀와 함께하는 둘 또한 자연스럽게 호위의 대상이 되었다.


" 음? "


그런 셋의 시야에 길 한복판에 기사 몇 명이 모여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 잠깐 다녀오지. "


두 명을 길가에 멈춰 세워두고 레이너스가 기사들에게로 향했다. 잠깐의 이야기로도 해결되지 않고, 이야기는 당분간 지속되었다. 10분 정도 지난 다음에서야 레이너스는 둘에게로 돌아왔다.


" 미안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거 같다. 먼저 가 있겠나. "


" 그래~ "


레이너스가 사라진 편이 오히려 더 마음 편하고 좋았다. 섣불리 전언이나 섀도우 데몬을 부를 수도 없었고, 아르셰와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그편이 더 좋았다. 호위하던 기사도 사라지고 단둘이 되어서야 겨우 트레이시가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 하아아~ 피곤했다. "


" 돌아가서 빨리 쉬자. "


" 그래... 윽! "


갑작스럽게 무언가 찌르는 듯한 고통이 트레이시의 머리에 엄습했다. 쓰러질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니지만 눈을 찡그릴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 왜 그래? "


" 괘, 괜찮아. 갑자기 뭔가... "


가슴속에서부터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기 시작했다. 큰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어째서인지 느끼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여전히 제국 내였다. 위험한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지상이 아니라면 하늘인가, 땅인가. 붕대를 둘둘 감은 팔로 머리를 부여잡고 아르셰에게 살며시 기댔다.


" 아르셰... 빨리 가자, 뭔가 위험해. "


" 위험? 어떻게, 날아갈까? "


마법을 배워놓고 전언 마법을 배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런 때야말로 연락해야 할 상황 아닌가. 몸은 아르셰에게 기대고 있지만 오히려 자신이 끌고 가듯 아르셰와 함께 골목으로 향했다.


" 스크롤... 스크롤... "


황급히 품에서 전언 마법이 담긴 스크롤을 꺼내려는 순간.


" 찾았다. "







한 여성의 목소리에 트레이시와 아르셰 둘이 동시에 목소리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긋하고 여유 넘치는 목소리, 젊다기 보다는 어리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키는 아르셰보다도 살짝 작으며 머리카락은 은빛으로 물든 장발이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골목길 사이에 있어 그 은빛 머리카락이 은은하게 푸른빛을 반사했다. 면으로 된 검은 옷에 동물의 털로 어깨와 손목에 장식되어 있었다. 다리에는 겉은 딱딱해 보이지만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는 장식이 무릎까지 보호하고 있었으며, 특이하게도 신발은 신지 않았다.


" 누구야? "


아르셰가 물었다. 은발의 소녀는 아르셰는 신경 쓰지 않고 트레이시만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그녀가 트레이시를 노려볼 때마다 트레이시의 머리가 계속해서 울려왔다.


" 뭐, 뭐야 너... "


" 네가 아까 투기장에서 싸웠던 트레이시 맞지? "


" 그래서? "


" 프레이야 란셀. 내 이름이야. "


" 이름 같은 거 신경 안 써. "


" 흐음~ 그래? 흐으으음~~~ "


프레이야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마치 트레이시를 품평하듯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조금씩 기울여 모난 곳은 없는지 살폈다.


" 아직은 20정도인가? "


" 뭐라고!? "


" 너도 『칠드런』 이지? "


" 뭐!? 넌 대체...! "


" 그야 나도 칠드런 이니까. 100년 전쯤에 만들어진. "


계속해서 느껴진 이 압박감의 존재는 이 소녀 때문일까. 자신 외에도 존재하는 칠드런을 아인즈는 분명히 빨리 알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얼음장 같은 무언가가 다리와 팔을 꽉 붙잡는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 걱정마, 지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어차피 내일 싸우게 될 거니까. 네 다음 상대가 나거든. "


프레이야는 아주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의 온도가 어째서인지 내려가 그녀의 입에서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프레이야는 딱히 추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르셰와 트레이시 둘 다 서서히 한기가 돌기 시작했지만, 둘의 몸은 완전히 굳어 몸을 떠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프레이야가 천천히 다가와 트레이시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 30년 만이네 새로운 칠드런을 보는 건. 그리고 안타깝네, 또다시 죽여야 한다는 게. "


그 말을 마치자마자 프레이야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트레이시와 아르셰를 붙잡고 있던 무언가가 프레이야와 함께 사라져, 주변의 한기 또한 사라졌다. 온기가 돌아와 넘어지려는 트레이시를 아르셰가 겨우 붙잡는다.


" 괜찮아!? "


고개를 끄덕이고 트레이시는 품속에서 꺼내다가 멈춘 스크롤을 다시 꺼냈다.


" <전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