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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은 오해로 인해 멀어집니다. 

여자는 남자가 바람을 피운다고 오해합니다. 

그 사이 다른 남자가 좋은 친구인 척하고 여자를 위로함으로써 상황을 이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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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만난 여친과 결혼하고 싶은 주인공.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선뜻 프로포즈를 하지 못하고 있다. 

 

 결혼을 준비한다고는 하지만 아직 제대로 자리를 못 잡은 것 같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한다.

 여자친구도 가끔은 넌지시 결혼 얘기를 꺼내지만 제대로 대답을 못 해준다. 

 

 주인공은 그런 자신이 못나게 느껴진다. 

 

 가끔은 친구들의 결혼식에 여친과 같이 가기도 한다. 

 그러면 듣기 싫어도 신혼집은 어디로 한다는 둥, 신혼여행은 어디고 간다는 둥, 신랑은 뭐하는 사람이라는 둥의 얘기가 들려온다. 

 

 - 우와, 진짜? 강남에? 남편 능력 좋네? 뭐 사업한다고 그랬던가?

 - 사업도 사업인데 그냥 원래 집이 좀 산대. 여기 웨딩홀도 봐봐. 아까 꽃 엄청난 거 봤지? 꽃값만 몇 백은 될걸?

 

 주인공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너무나 작아지는 기분이다. 

 맛있는 뷔페 음식을 한가득 접시에 담아오고도 젓가락이 빙빙 허공만 돌곤 한다. 

 

 그 무엇 하나 번듯하게 여친에게 내놓을 수 없는 자신이 초라해진다. 

 

 ‘나의 자랑인 그녀, 그러니 나도 그녀의 자랑이 되고 싶은데 그게 왜 이렇게 힘들까….’

 

 주인공은 괜히 옛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

 

 

 그녀와 같이 대학을 다니던 CC 시절.

 잘 못 하는데도 그녀에게 멋져보이고 싶다는 일념하에 출전을 자원했던 과내 축구대회.

 당연히 개발에 우당탕탕, 발라당, 허둥지둥, 워스트급 활약에 자빠지기 일쑤.

 

 그래도 그녀는 전후반 내내 주인공을 응원해주었다.

 한결같이 주인공의 이름을 연호하고 집에서 몰래 만들어온 피켓을 흔들면서.

 마치 그녀의 눈에는 주인공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 화이팅! 잘한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주인공은 그 응원에 부응하고 싶어 더욱 최선을 다한다.

 한 걸음이라도 더 뛰고, 한 번이라도 더 몸을 내던진다.

 그녀의 응원이 무의미한 짓이 되지 않도록, 그녀 앞에서 자랑스러워지고 싶으니까.

 

 그 절실한 노력에 신이 감복이라도 한 것일까.

 

 종료 휘슬이 불리기 바로 직전. 

 높이 날아온 크로스를 향해 주인공은 몸을 던지고, 그게 주인공의 얼굴을 맞고 안면슛으로 골문 안에 빨려들어간다. 

 

 - 와! 들어갔다! 골이다!

 

 다들 환호를 터트리고 그대로 경기 종료.

 주인공은 역전의 주인공이 된다.

 

 그녀도 경기장 안으로 들어와 주인공을 안아주며 기쁨을 나눈다. 

 

 주인공은 말한다.

 나 그래도 마지막에는 꽤 괜찮지 않았냐고.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마지막이 아니라 경기 내내 제일 멋있었다고.

 

 주인공은 그제야 환히 웃는다.

 그녀가 주인공을 빤히 바라본다.

 그러더니 갑자기 주인공의 입술에 찐하게 뽀뽀를 해준다. 

 

 곁에 있던 친구, 선후배들이 오오, 우와, 이야, 제각기 탄성과 야유를 보낸다.

 

 평소 그녀답지 않은 과감함에 주인공도 적잖이 놀란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떼고 주인공의 귀에만 작게 무언가 속삭인다. 

 

 그때, 주인공의 코에서 코피가 흘러내린다.

 아까 안면슛을 한 충격이 지금 터진 모양이다.

 아니면 그녀의 말이 너무 자극적이었나.

 

 휴지를 찾고, 코피를 막으며 화장실로 달려가는 둥.

 멋지게 역전골의 주인공으로서 영광을 즐길 새도 없이 우스운 코피 해프닝으로 끝이 나버렸지만, 주인공은 하늘을 날아갈 듯한 기분이다. 

 

 조금 전 그녀가 주인공 귀에만 몰래 속삭여준 말.

 

 -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

 

 주인공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한 그 목소리를 되뇌이며 행복하게 웃는다.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 바로 이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오늘….

 

 그날 찍은 체육대회 기념 사진에는 그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다.

 

 친구, 선후배들 사이 한가운데 가장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주인공과 여친.

 

 주인공의 코에는 휴지가 꽂혀 있고, 유니폼에도 빨갛게 핏자국이 남아 있다.

 여친은 그런 주인공에게 팔짱을 끼고 어깨에 폭 기대어 있다.

 

 둘은 사진 속 그 누구보다도 환하게 웃으며 같이 브이를 하고 있다. 

 

 

 ***

 

 

 주인공은 그때 찍은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늘 보곤 한다.

 

 그때처럼 골 하나로 여친 앞에 자랑스러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은행에서 날아온 대출금 문자도 코피처럼 휴지로 쉽게 닦아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인공은 요즘 그런 생각에 여친과의 데이트에서도 좀처럼 집중하지 못한다. 

 

 

 ***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여친 몰래 선을 보러 나가게 된다.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여자친구가 있기에 그런 거 절대 안 나간다고 했지만, 부모님이 이미 약속을 잡은 걸 어떡하냐고 체면 좀 살려달라고 해서 억지로 나가게 된 것이다.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여자친구와의 약속을 미루고 선 자리에 나간다.

 

 

 ***

 

 

 한편, 여자친구도 마음이 복잡하다.

 

 그녀도 주인공과 결혼하고 싶다.

 하지만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가끔 넌지시 운을 띄워보긴 하는데, 그때마다 주인공은 우물쭈물 얘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버리곤 한다. 

 오히려 예전 어렸을 때는 ‘반드시 무조건 너랑 결혼할 거야’ 하고 당당히 말하던 그인데 요즘에는 제대로 답을 하지 않는다. 

 

 여친은 주인공의 마음이 궁금하다.

 

 ‘과연 무슨 생각일까…. 나는 그냥 다른 거 아무것도 필요 없이 그냥 날 꽉 붙잡아줬으면 좋겠는데….’

 

 여친 역시 예전에는 장난삼아 주인공에게 나 얼만큼 사랑하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의 팔에 안겨 ‘나 얼만큼 사랑해?’ 하고 애교부리고, 그러면 그는 언제든 의심의 여지없는 한 마디를 그녀의 귀에 속삭여주었다.

 여친은 그럴 때마다 누구보다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런 것을 물어보기가 힘이 든다. 

 

 혹시라도 다른 말이 나올까봐.

 나는 아직도 여전히 주인공 생각뿐인데 그의 생각은 달라졌을까봐.

 

 그게 두렵다. 

 

 

 ***

 

 

 여자친구는 그래도 용기를 내보기로 한다.

 그렇게 우물쭈물 시간만 보내다가 죽도 밥도 안 된다고, 언젠간 확실히 얘기를 해야 한다는 친구들의 조언을 받아서.

 

 그 말에 그녀는 주인공에게 물어볼 결심을 한다. 

 둘만의 추억이 담긴 옷도 예쁘게 입고, 언젠가 그가 처음으로 사준 목걸이도 찬다.

 멘트도 준비한다. 

 

 ‘나는 아무것도 필요없어. 너만 있으면 돼. 나는 너랑 같이 평생 살고 싶어…. 너는…?’

 

 그런데 갑자기 주인공이 약속을 취소한다. 

 갑자기 급한 가족 일이 생겼단다. 

 

 여친은 한껏 용기를 냈던 만큼 팍 김이 새버린다. 

 주인공이 너무 미안해하며 사과하니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기껏 예쁘게 준비하고 나왔는데….’

 

 여친은 이왕 나온 김에 친구들이나 만나려고 연락을 돌린다. 

 

 그런데 친구 중 한 명에게 연락이 온다. 

 

 “야, 네 남친 가족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네 남친 지금 어떤 여자랑 밥 먹어!”

 

 여친은 귀를 의심한다.

 

 그럴 리가 없어.

 잘못 봤겠지.

 분명 가족 만난다고 했는데?

 

 “아냐, 진짜 확실하다니까! 그리고 왠지 느낌이 소개팅이나 선 보는 느낌이던데?”

 

 선!?

 여친은 더욱 충격에 빠진다.

 

 ‘그럼 그동안 결혼 얘기를 피한 이유가 설마…?’

 

 여친은 언젠가 친구들이랑 나눴던 얘기들이 머리를 스친다.

 

 - 조심해야 돼. 남자들이 얼마나 깐깐한데. 결혼할 여자, 연애만 할 여자 딱딱 나눠서 만난다니까? 결혼식장 들어가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야.

 

 그때 여친은 화을 냈었다.

 혹시 너 지금 내 남친 얘기하는 거냐고.

 우리 남친은 절대 그런 사람 아니라고.

 네가 뭘 아냐고.

 그렇게 길길이 날뛰며 술김에 친구랑 한바탕 말싸움을 벌일 정도로 주인공을 변호해주었다. 

 

 그런데 지금 남친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

 

 그럼 설마 정말로….

 

 ‘나랑… 나랑은… 결혼하기 싫어서…?’

 

 여친은 왈칵 눈물이 터진다.

 

 ‘그럼 요즘 데이트 할 때 별로 집중 못 하던 것도 역시….’

 

 때마침 친구가 사진도 찍어서 보내준다.

 아무리 봐도 남친이 맞다.

 

 여친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인공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통화연결음이 들리는 사이, 어떻게든 눈물을 참고 울먹이는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주인공이 전화를 받는다.

 태연한 목소리다.

 

 여친은 묻는다.

 

 “있잖아… 지금 뭐해…?”

 

 여친은 주인공의 입으로 사실을 듣고 싶다.

 해명이든 변명이든 설명이든 아니면 이젠 네가 질렸다고 하든.

 남친의 입으로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다. 

 

 그런데 그는 뻔뻔하게도 거짓말을 한다. 

 

 [어, 어어… 지금 가족이랑 있지.]

 

 그 부분에서 여친은 큰 실망과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여친은 전화를 끊고 펑펑 눈물을 흘린다.

 친구들이 그녀를 위로해준다. 

 

 

 ***

 

 

 한편, 선 자리에 나가 있는 주인공.

 여친과의 왠지 석연치 않은 전화를 끊는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편 여자가 말한다.

 

 “여자친구죠?”

 “네?”

 

 주인공은 깜짝 놀란다.

 아무리 부모님 때문에 억지로 나왔다고 한들, 대뜸 상대방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여자친구가 있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너무 티가 나잖아요.”

 

 그녀가 말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이 아예 다른 곳에 가 있길래 ‘이 자리에 별로 관심이 없구나’ 싶었는데 방금 전화하는 걸 보고 확신이 들었다고.

 누가 봐도 사랑하는 여친이랑 전화하는, 하지만 비밀을 숨기려는 말투였다고. 

 

 “그, 그랬나요…. 죄송합니다….”

 

 이미 들켜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주인공은 숨기고 있던 사정을 털어놓는다.

 사실 부모님 때문에 억지로 나왔다고.

 여자친구한테도 비밀로 하고 나왔다고.

 

 그녀는 그런 주인공을 이해해준다.

 그녀도 실은 부모님 때문에 떠밀리다시피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공감대를 찾고 부담감을 덜은 둘은 조금 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애초에 선으로 만난 자리였던 만큼 대화는 자연스레 주인공의 여자친구와 결혼 고민으로 흐른다.

 

 주인공은 자신의 현재 상황을 얘기하며 고민을 토로한다.

 

 “결혼이라는 게 참 쉽지 않네요…. 제가 능력이 조금만 더 좋았어도 당당하게 얘기를 꺼내볼 텐데….”

 

 그녀는 주인공의 고민을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응원해준다.

 

 그녀는 주인공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오히려 어쩌면 지금 여자친구는 주인공의 프로포즈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 돈 생각만 하느라 더 소중한 걸 놓치고 있지는 않냐고.

 정말 돈이 있어야만 그녀가 행복해할 것 같냐고.

 문제는 돈이 아니라, 겁을 내고 있는 주인공이라고.

 

 주인공은 그 말에 크게 충격을 받고 깨달음을 얻는다. 

 

 ‘내가 문제였던 건가….’

 

 주인공의 머릿속에 여친과의 지난 추억들이 스쳐지나간다.

 

 친구의 화려한 결혼식을 보고 연신 감탄하던 그녀.

 첫 차를 뽑았다는 대학 선배의 차를 보고 신기해하던 그녀.

 대학 동기의 대기업 취업턱 자리에서 부러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그녀.

 

 주인공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그들의 물질적인 성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도 그렇게 되어야만 그녀 앞에서 자랑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화려한 결혼식이 아니라, 신랑신부의 추억이 담긴 웨딩 영상에서 가장 감동했다.

 그녀는 선배의 첫 차가 아니라, 막차 걱정 없이 늦게까지 다닐 수 있다는 점을 부러워했다.

 그녀는 동기의 대기업 취직이 아니라, 이제는 애인이랑 마음 편하게 데이트 할 수 있겠다는 말을 부러워했다. 

 

 그녀의 관심은 늘 하나뿐이었다.

 

 - 자기야, 우리도 사진 많이 찍어놓자. 나중에… 어, 그… 나중에 어디 쓸지도 모르잖아.

 

 주인공과 함께 하는 시간.

 그녀는 늘 그뿐이었다. 

 

 주인공은 그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용기를 내기로 한다.

 마침내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기로 결심한다.

 

 주인공은 상대쪽 여자에게 감사를 표하며 실례지만 먼저 일어나보겠다고 자리를 뜬다.

 

 가까운 꽃집을 검색해보는 주인공의 얼굴에 더 이상 주저함은 없었다.

 그의 표정에는 사랑하는 연인과의 미래를 꿈꾸는 확신만이 가득했다. 

 

 

 ***

 

 

 한편, 그 무렵 여친은….

 

 “야, 마셔, 마셔! 뭐 어때! 걔도 바람 피는데 너라고 못 할 게 뭐야!”

 

 시끄러운 음악이 귀를 때리는 클럽.

 번쩍이는 불빛 아래 여친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여친은 처음 와보는 클럽에서 친구들이 떠미는 대로 넙죽넙죽 술을 받아마신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원래는 주인공과의 전화를 끊고 펑펑 울며 위로받고 있었는데, 그 꼴을 보다 못한 친구들이 같이 클럽이나 가보자고 한 것이다. 

 남친은 바람 피는데 너라고 못 할 건 뭐냐고.

 

 여친은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지만 친구들의 설득이 못 이겨서, 배신감에, 홧김에 클럽에 오게 된다.

 

 20살이 되자마자 주인공과 사귀었으니 여친은 이런 곳에 오는 것이 처음이다.

 그저 친구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고 술을 받아마시며 주변 눈치를 살핀다. 

 

 여친은 전혀 조금도 즐겁지 않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클럽은 무척이나 신나보였는데, 신나기는커녕 오히려 머릿속만 더 어지러워진다. 

 주인공 생각만 자꾸 나서 또 울음이 터질 것만 같다. 

 

 그때, 잘생긴 남자 몇 명이 다가온다. 

 

 그들은 여친 일행에게 같이 놀자고 한다.

 여친은 거부하려 했지만 친구들이 여친을 설득한다. 

 

 “야아, 난 싫어…. 난 갈게. 너희끼리 놀아….”

 “뭐가 싫어! 설마 너 지금도 걔한테 정이 남아 있냐? 그런 쓰레기한테 무슨 의리를 지켜! 넌 화도 안 나?”

 

 그 얘기를 옆에서 들은 헌팅 일행들이 더 끈질지게 달라붙는다.

 그럴 때일수록 더 즐겁게 놀아야 한다고.

 나가서 같이 술이나 한잔 하자고.

 

 여친은 결국 그들과 밖에 나가 술을 마시게 된다. 

 

 

 ***

 

 

 과연 그들은 더 즐겁게 해주었다.

 이런 헌팅 자리가 무척이나 익숙한 듯 금세 여친 일행과 친해지고, 기어코 여친도 피식 가벼운 웃음을 짓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제각기 몇 차례 화장실을 다녀오며 자리를 옮기다보니 어느새 각자 파트너가 짝지어진다.

 

 여친의 옆에는 클럽에서 맨 처음 말을 걸었던 잘생긴 남자가 앉아 있다.

 그가 여친에게 술을 따라준다.

 

 여친은 이렇게 다른 남자의 옆에 앉는 것도, 다른 남자랑 술을 마시는 것도 처음이다. 

 어색하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기분이다.

 

 그때, 취한 여친 친구들 입에서 주인공 얘기가 나온다.

 

 “얘 남친이 진짜 개쓰뤠기라니까? 아니, 이렇게 착하고, 이쁘고, 귀엽고, 어? 씨… 어? 가슴도 크고! 어? 일편단심! 지고지순! 어? 얘가 진짜 남친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어? 얘 남친 말고는 남자 손 한번 안 잡아본 애인데! 그런 애를 놓고 바람을 펴!?”

 

 여친은 취한 친구 입을 막아보려고 하지만 막무가내다.

 여친보다도 더 분개하여 주인공 욕을 쉴 새 없이 내뱉는다.

 

 하지만 사실 애당초 여친은 그렇게 화가 난 상태는 아니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슬프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그리고 친구의 말을 들을수록 그녀의 슬픔은 더 커져간다.

 

 ‘나 정말 잘해줬는데…. 나는 정말 너밖에 없는데…. 너 말고는 정말 다른 남자 손 한번 안 잡아봤는데….’

 

 지난 청춘 추억의 페이지를 아무리 넘겨봐도 주인공과 함께 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잘라낼래야 잘라낼 수가 없다.

 그렇기에 더욱 배신감과 서러움이 깊다.

 

 여친은 친구 입을 틀어막는 것도 포기하고 공연히 술잔만 만지작거리며 또 센치해진다.

 

 그때, 옆에 앉아 있는 존잘이 대뜸 여친의 손을 잡는다. 

 

 당황한 여친이 손을 뺄 생각도 못 하고 있는 사이, 그가 반강제로 아예 손깍지까지 껴버린다. 

 

 “이러면 이제 덜 억울하겠네, 그치? 이제 다른 남자 손 실컷 잡아도 되잖아.”

 

 다른 사람들이 오, 워, 이야, 등등 환호를 보낸다.

 

 여친은 하지 말라고 손을 빼내려고 하지만 그가 놓아주지 않는다.

 그는 손 잡은 기념 짠이나 하자며 술잔을 채워준다.

 짠 하면 손 풀어준다고 한다.

 

 여친은 어쩔 수 없이 술잔을 들고 그와 짠을 하려고 다가간다.

 

 근데 그가 대뜸 잔을 뒤로 뺀다.

 ‘아이, 짠 안 해야겠다. 그냥 손잡고 있는 게 더 좋네’ 하고는 장난스럽게 웃는다. 

 

 여친은 장난치지 말라며 짠을 하기 위해 더욱 그쪽으로 잔을 든 팔을 내밀고, 그 탓에 더욱 그쪽으로 몸이 기운다.

 

 존잘은 닿을 듯 말 듯 여친을 놀리며 잔을 계속 뒤로 뺀다.

 그러다 한번에 휙 여친을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확 안기게 한다. 

 

 또 다시 다른 애들이 환호한다.

 

 존잘은 그대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멋대로 술게임 노래를 부른다.

 막무가내로 게임을 시작한다.

 

 그 분위기, 템포를 그냥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여친은 그대로 휩쓸린다.

 깍지 낀 손을 빼야한다는 생각 역시 잊어버린다.

 

 

 ***

 

 

 그렇게 술자리가 끝이 나고,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여친의 자취방.

 

 여친은 자신의 자취방에서 존잘과 키스를 나누고 있다.

 

 취한 그녀.

 집이 마침 같은 방향이니 같이 택시 타고 가자던 그.

 

 그러나 그는 잠깐 핸드폰 충전만 하고 간다는 핑계로 그녀의 자취방에 들어오고, 그녀는 이를 막지 못한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와 키스를 하고 있던 것이다.

 

 주인공 외에 처음으로 방에 들인 다른 남자.

 그것도 오늘 처음 본 남자와 키스를 하며 여친은 매우 혼란스러워 한다.

 

 안 된다고 그를 밀어내려 해보지만 밀리지 않는다.

 

 그는 능숙하게 여친을 침대로 밀어넘어트린다.

 남친 외에는 허락한 적 없는 침대에 그가 올라온다.

 

 그가 여친의 옷을 벗긴다.

 원래라면 오늘 남친에게 너랑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 예쁘게 차려 입은 옷이다. 

 

 그 사이에도 그는 그녀에게 집요하게 키스를 한다. 

 여친은 틈나는 대로 입을 떼며 ‘잠깐만, 나 이럴 생각 없었어, 나 남자친구 있어…’ 등등 저항해본다. 

 

 그러나 그가 여친의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자 그녀의 저항도 우뚝 멈춰버린다.

 

 그가 그녀의 그곳을 천천히 어루만지더니 속삭인다.

 

 “젖었네.”

 

 마치 이제는 그만 인정하라는 듯.

 

 

 ***

 

 

 분명 넣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단번에 주인공이 한 번도 닿지 못하던 곳까지 밀어넣었다. 

 

 분명 이런 거 싫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몇 번이고 주인공과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체위로 마구 허리를 흔들어댔다.

 

 분명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가버렸다.

 주인공과 했을 때는 느껴본 적 없는 감각으로.

 

 주인공과 해보지 않은 것들이 하나씩 더 늘어갈 때마다 주인공과의 추억이 덧씌워지는 기분이다.

 그러나 그 덕분일까, 오늘의 슬픔도 같이 지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여친은 더욱 그의 품에 매달린다.

 그의 움직임은 아주 거칠고 격렬해서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의 자지는 아주 굵고 커다래서 그가 깊이 밀어넣을 때면 절로 몸에 힘이 풀려버린다. 

 

 전부 그에게 맡겨버리면 이렇게나 편안해진다. 

 

 그녀는 오늘 처음 본 남자의 품에 안겨 해본 적 없는 목소리로 신음하고, 해본 적 없는 자세로 허리를 흔들고, 느껴본 적 없는 감각에 그의 허리를 다리로 끌어안는다. 

 

 “하아! 아아아!”

 

 지금이 몇 번째더라. 

 가는 게.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녀는 그와 키스하며 마지막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

 

 

 다음날 아침.

 존잘은 여친의 자취방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걸어나온다.

 

 어제 같이 놀았던 친구들의 연락을 이제서야 확인하고 전화를 건다.

 

 “어어, 나 지금 나왔지. 어? 아이, 씨발, 당연히 했지. 존나 했지, 병신아.”

 

 담배를 꼬나물고 킬킬거리며 말을 잇는다.

 

 “남친 있다고 처음에 좀 빼던데 씨발 뭐 있냐? 그냥 자빠트리고 박으면 끝이지 뭘. 아, 그래, 알았다고, 고맙다고, 어제 밀어준 거 안다고. 씨바, 이따 사진 보내주면 될 거 아냐.”

 

 그가 전화를 하며 갤러리를 열어 작업물을 확인한다.

 갤러리에는 그녀 몰래 찍은 영상과 사진이 들어 있었다. 

 

 “이야, 이년 다시 봐도 존나 이쁘네. 이따가 너도 보면 존나 감탄할걸. 얼굴도 이쁜데 몸매도 뒤져. 처음에 싫어싫어, 이지랄 하더니 몇 번 박아주니까 지가 더 안달나서 다리 감고 혀 존나 비비는 게 개꼴이라니까.”

 

 그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픽 내던진 뒤 대충 밟아 비벼 끈다.

 

 “야, 일단 몇 장 보내줄 테니까 그거만 먼저 보고 존나 기대하고 있어봐.”

 

 그가 전화를 끊고 사진을 몇 장 골라 보내준다.

 

 그녀가 침대 위에 엎드려 뒤치기를 당하고 있는 사진.

 그녀가 그 위에 올라타 가슴이 천박하게 흔들릴 정도로 허리를 흔들고 있는 사진.

 그리고 그녀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힘겹게 그의 커다란 자지를 빨고 있는 사진.

 

 그가 끈적한 가래침을 퉤 뱉은 뒤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발을 뗀다. .

 시린 새벽 공기 너머로 그는 금세 사라져버린다. 

 

 그녀의 자취방 앞 골목에는 아직 미약하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꽁초와 끈적한 가래침만이 남아 있다.

 

 

 ***

 

 

 얼마 후.

 

 가래침이 마르고, 담배꽁초의 연기도 더는 피어오르지 않을 무렵.

 주인공이 그녀의 자취방으로 올라간다.

 

 주인공을 맞이하는 그녀는 매우 놀란 표정이다.

 

 주인공은 그녀에게 준비한 꽃다발을 내민다.

 그리고 그간 있었던 모든 생각을 털어놓는다.

 

 어제 몰래 나갔던 선 얘기부터 그간의 결혼 고민까지.

 혼자 품고 있던 자격지심과 불안을 전부 털어놓는다. 

 

 주인공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한다.

 

 “나랑 결혼해줄래?”

 

 여친은 그제야 진실을 깨닫고 오열한다.

 죄책감이 몰려온다.

 이런 사람을 두고….

 

 ‘나… 대체 무슨 짓을….’

 

 주인공은 그녀의 사정을 모르기에 감동 받아 우는 것이라 착각한다.

 주인공은 일어나 그녀를 꽉 안아준다.

 역시 프로포즈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

 여친의 뒤에 있는 쓰레기통에는 지난 밤 썼던, 다른 남자의 정액인 담긴 콘돔이 한가득.

 

 그리고 여친의 다리 사이에서도 주륵 한 줄기 혀연 액체가.

 

 “괜찮아, 울지 마. 왜 울어. 이렇게 좋은 날에.”

 

 주인공은 그녀를 달래고, 그녀는 주인공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울음을 터트린다.

 

 

 ***

 

 

 에필로그.

 

 주인공과 여친의 결혼식날.

 

 그녀는 신부대기실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모두의 축하를 받고 있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핸드폰에 띠링 알람이 울린다.

 

 인스타 DM이다.

 그때 그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