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초에 주 방어시설이었던 쿠루와(郭)



해자 등을 만들어 최대한 공격을 지연시키고 출혈을 강요하는 방식





시간이 지날수록 해자도 점점 복잡해지는데



좌우 움직임을 제한시키는 해자 같은 게 등장



길을 쿠루와 사이에 둬서 진격 방해함


그림에서 볼 수 있다시피 성벽 높이가 딱 장창으로 사람 찌를만한 길이로 됨



나중에는 아예 미로가 되버린



그리고 저런 토성들의 단점인


자연재해(폭우, 지진)로 인한 산사태가 일어나는 걸 막고자


이시가키(石垣)라 불리는 석벽으로 보강


석벽이 비스듬한 이유는 돌과 돌을 붙여주는 접착제인 모르타르 기술이 없어서


또, 지진으로 인해 수직 성벽이 잘 무너져서 안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더라



처음 이시가키들은 낮고 평탄한 모습이었지만




1579년 교토에 입성한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의 내노라 하는 기술자들을 불러 거액을 쏟아서 만든, 화려한 천수각으로 유명한


아즈치 성이 등장



임진왜란을 거치며 석재를 다루는 노하우가 발달하고


16세기 후반엔 기존 토성들을 다 이시가키로 감싸기 시작함



축성 기술의 발달로 성이 점점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



산에서 반만 내려오면 평산성(平山城, 히라야마지로)


산에서 아예 내려오면 평성(平城, 히라지로)


근세로 갈수록 일본의 성도 방어시설의 목적에서 교통, 행정, 경제의 중심지로 변모함



근세에는 중세보다도 더 한, 대요새시대를 맞이하게 됨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함


1. 충분한 자본과 인력을 갖춘 초거대 다이묘 세력들의 등장


2.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전쟁이 일어나는 텀이 길어지면서, 성을 지을 시간이 널널해졌기 때문




이 시기부터 성 아래 형성되었던 죠카마치(城下町)들도


울타리와 해자로부터 보호받기 시작


이제 중세처럼 백성은 놔두고 성주랑 사무라이들만 농성하는 게 아닌,


백성들도 함께 농성전을 펼칠 수 있게 됨



그럼에도 최대한 적의 진격 시간을 지연시킨다는 기존 방어 개념은 여전하였기에


공간을 최대한 분할, 활용하였음




이제는 팩맨이 떠오르는 수준의 미로



높이 차를 이용한 공간 분리




이때부터 우리가 아는


일본의 성에 대한 모습이 등장



근세 성벽들의 특징이라면 방금 전 짤에서들도 봤듯


거대한 해자들로 공간을 분할한 것이었음


위 짤은 카가국, 잇코잇키의 혼간지로 성이 아닌 '절'이었는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오다 노부나가를 위협하던 최대의 적이었음


가마쿠라 시대 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불교 세력들은 난해하며 현학스럽고 귀족 느낌이 강한 애들이었는데,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누구든지 구제 받을 수 있다는 정토진종(일향종)의 등장과 함께


이들은 혼란기 속에서 아주 빠르게 세력을 넓혀갔고, 웬만한 다이묘들 보다도 큰 땅을 다스리게 됨


위에 혼간지가 바로 정토진종의 총본산



하여튼 근세 성벽들이 해자를 깊게 판 이유는


철포 사격이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데,


오사카 성은 무려 폭이 100m나 되는 구간도 있었다고 함



높이가 장창 길이만했던 성벽의 높이도


어마어마해짐



일본에서 단일 이시가키의 최고 높이는 32m, 복층 이시가키 최고 높이는 60m라고 함



그리고 이때부터 재력을 과시하는 차원에서 웅장하고 화려한 천수각을 짓기 시작함



이러게 쪼만했던 망루도



이렇게 번듯한 건물로 탈바꿈 됨



물론 이런 성들을 무너뜨리고자


온갖 공성병기도 등장함



그 중에서도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하면



혼마루, 니노마루까지 합쳐 6만 제곱 미터(0.06 제곱 킬로미터)에 달했던 오사카 성


일본 중근세 최후의 공성전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리(히데요시 아들)가 맞서는,


'오사카의 진'이 일어난 곳이기도 함



참고로 이에야스는 이 당시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고자


서양 애들로부터 구매한 컬버린 포 7문 + 급조 화포 300문을 공성전에 사용했지만


큰 효용을 보진 못했는데


다만 저 컬버린 중 하나가 쏜 포탄 한 알이 천수각에 명중해 요도도노(히데요리의 엄마)의 시녀 한 명이 즉사하자


도요토미 측 수뇌부에선 대포의 위력에 놀라 동요했다고 함 



161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오사카 성을 공격하지만


외해자와 외성, 사나다마루(真田丸)에 가로막혀




본성인 혼마루, 니노마루 근처에도 가지 못했음



한달동안 외성도 못 뚫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더군다나 히데요리 쪽은 장기간 농성을 염두해두고


몇년치의 군량미도 비축해둔 상황


이때 이에야스 측은 도요토미 측에게 "외해자만 메우게 하면 아무 요구 없이 퇴각해 주겠다"고 전문을 보내고


그 정도까진 괜찮겠노 해서 OK함


물론 히데요리가 쓸데없이 아량이 넓어서 그랬던 건 아니고,


당시 이에야스의 나이는 언제 죽어도 문제없을 73세라는 고령인데다가


이에야스의 후계자인 히데타다에 대한 다이묘의 신임이 좋지 못하였기에


히데요리는 이에야스가 죽고 훗날을 도모하면 되겠다는 계획이었음



그렇게 천천히 시간을 끌려던 찰나에,


도쿠가와 군 7만 명이 8킬로에 달하는 외해자를 3일만에 메워버림


그리고 이에야스는 아들 히데타다한테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의 해자까지 메워서,


3살 꼬맹이도 올라갈 수 있도록 덮으라고 지시함



히데요리 측은 이건 아니다 싶어서 항의했는데


도쿠가와는 "아니 님들이 해자 덮는게 늦어서 우리가 도와주는거임" 이라고 답변했고


결국 한달만에 모든 해자가 다 메워져버림


이에 분노한 히데요리 쪽은 다시 외성을 쌓고 해자를 파내기 시작하는데


도쿠가와는 "기껏 강화 협상까지 했는데, 전쟁하자는거노?" 해서 다시 전투 발발


14일 만에 오사카 성은 함락되고 히데요리는 자결하고 맘


이처럼 일본의 성에서 '해자'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매우 잘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고 볼 수 있겠음



이후 에도 시대에 들어서자,


265년간 전쟁없는 평화가 찾아오면서


성의 본래 역할은 상실하게 되었고


죠카마치는 온갖 일꾼, 무사, 상인들이 모이며 도시가 되고 상업이 번성하게 됨



이렇게 해서 낙후된 어촌에 불과했던 에도는 1721년엔 백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수용하는 대도시까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