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직업귀천이 어디있냐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과거에는 신분과 계급이 있었기 때문에 직업에도 귀하고 천한 걸 따졌음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 시절엔 사회 계층들의 멸시를 받는 집단이 존재했는데


한국에 천민이 있었다면, 일본에선 부라쿠민(部落民)이 있었고,


인도엔 찬달라(Chandala, 불가촉천민), 서유럽엔 카고(Cagot)라는 최하위 신분 계급이 있었음



그리고 그런 대부분의 최하층 신분들은 여느 사회에서나 꺼려하는 직업들을 주로 도맡아했음


예를 들어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팔반잡류(八般雜類)라 하여 위에 짤에 나온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천민처럼 대우받음



특히 어느 사회에서나 멸시받았던 직업 중 하나가 바로 망나니였음


보통 망나니는 참수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고 참수외에 여러 사형 방법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처형인 또는 사형 집행인이라고 부름



유명한 사형 집행인으로서,


위 그림의 인물이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및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한 샤를 앙리 상송(Charles-Henri Sanson)이 있었음


이런 천하고 더러운 일은 그 누구도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인지,


보통은 각 사회에 최하층 계급이 주로 도맡았고, 그 직업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어 세습했음


샤를 앙리 상송도 상송 가문의 4대 증손으로써 명문(?) 망나니 가문 출신의 사람임



그 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건


일본에서 9대를 넘게 사형 집행인을 세습해 왔다고 알려진 '야마다 아사에몬'(山田浅右衛門)에 대해 소개하려고 함


▲ 야마다 가문이 사용했다고 알려진 히이라기(ひいらぎ, 호랑가시나무) 가몬


야마다 아사에몬


위 이름은 야마다 가문의 당주들이 대대로 사용한 세습명임


예로부터 일본에서는 묘세키(名跡, 또는 메이세키)라 하여 여러 가문에서 대대로 특정 이름을 계승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야마다 아사에몬이란 이름도 그런 관행 중 하나였음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나 찰스 3세, 또는 티베트의 달라이라마 14세랑 비슷한 경우라고 보면 됨



일단 야마다 아사에몬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앞서서,


당시 일본 사회에서 횡행한 타메시기리(試し切り, 시험베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음



헤이안 시대 이후로 일본은 무사들이 권력을 장악했음


그리고 무사들끼리 더 많은 권력이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움


당연히 싸우기 위해선 무기가 필요했고 그런 무기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이 바로 도검, 일본도였음


그런 일본도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절삭력, 즉 얼마나 잘 자를 수 있는지에 따라 성능이 좌우되었음



그래서 전국시대부터 에도시대 초기까지, 무예 단련과 도검의 성능을 테스트하려는 목적으로 타메시기리를 하기 시작했음


이때 타메시기리를 하는 대상으로는 밀짚이나 다다미, 대나무 등이 사용되었지만


특히 에도시대부터는 죄인 혹은 사람의 시체를 그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음



여튼 이런 시대에 타메시기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이른바 명인들이 나타났음


이 중에서 야마노 나가히사(山野永久)라는 인물은 무려 6,000명에 달하는 죄인을 타메시기리했다고 알려졌고,


그의 아들 간쥬로 히사히데(勘十郎久英)는 1685년 오타메시고요(御様御用)라는 직함을 받아 막부의 신하가 됨


그리고 이때부터 오타메시고요는 타메시기리와 함께 죄인들을 처형하는 사형 집행인의 역할을 병행하게 되었음


하지만 그의 자식들이 기량이 없어서, 히사히데의 제자들이 오타메시고요를 물려받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자리를 물려받은 제자들 중 하나가 바로 야마다 아사에몬의 초대 당주가 되는 야마다 사다타케(山田貞武)였음


그는 1736년, 자식인 요시토키(吉時)에게 오타메시고요를 상속하고 싶다고 막부에게 전달, 이를 허락받았고


이에따라 야마다 아사에몬은 전문 망나니 가문(?)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됨



야마다 아사에몬들은 코시모노부교(腰物奉行) 아래에서 일했음


코시모노부교는 쇼군의 도검이나 장신구, 그리고 막부로 헌상되는 도검들을 관리하는 직책임


하지만 야마다 아사에몬의 공식적인 위치는 낭인이었기 때문에, 따로 봉토를 받지는 못했음


대신에 여러가지 수입원을 통해 매우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고 함



일단 이들의 주된 업종은 바로 죄인을 처형하는 일이었음


사람의 목을 정확히 쳐서 한번에 죽이는 일은 매우 고난이도의 기술이었기 때문에


사형수의 목을 베는 일은 거의 언제나 야마다 아사에몬에게 몰렸음


하지만 죄인을 참수하는 것만으로는 그 수입이 충분하지 않았는데,


그 대신 막부는 야마다 아사에몬에게 죄인의 시체를 사용토록 하는 권리를 주었고


바로 이 시체가 야마다 아사에몬들의 주된 수입원이 되었음



이들 시체는 보통 타메시기리를 했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타메시기리를 하는데 있어 사람의 시체가 최고라고 평가했음


그렇기에 안정적이고 합법적으로 시체를 공급받을 수 있는 야마다 아사에몬들은


죄인들의 시체를 가지고 타메시기리를 해서 도검의 성능을 평가하는 걸로 돈을 벌었음


대부분은 직접 시체에 칼을 대는걸 원치 않아서 야마다 아사에몬들이 주로 타메시기리를 했지만,


간혹가다가 직접 타메시기리를 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돈을 주고 시체를 팔기도 함



그리고 5대 야마다 아사에몬, 요시무츠(吉睦)는 그동안의 경력을 바탕으로 각 일본도의 성능을 기록한


「회보검척」(懐宝剣尺)이라는 책을 저술해 돈을 벌었음


또 사형수들의 간, 뇌, 쓸개, 담즙 등을 재료로 약을 만들어 팔았는데 이것이 결핵의 특효약이었다고 함


게다가 유녀(유곽에서 일하는 매춘부)들에게는 시체의 새끼 손가락을 팔기도 했는데


당시엔 새끼 손가락을 잘라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하는 행위가 유행을 타면서


진짜로 손가락을 자르는 대신, 야마다 아사에몬에게 산 시체의 손가락으로 대신했다고 함


이러한 수입원들을 통틀어서 야마다 아사에몬들은 무려 3만석-4만석에 필적하는 부를 쌓아올렸다고 하는데,


당시 가장 수입이 적었던 홋카이도의 마쓰마에 번이 3만석,


그리고 우리에게는 대마도로 잘 알려진 쓰시마 번이 5만석 안팎이었던 걸 감안하면


일개 사무라이가 다이묘에 맞먹는 수입을 올렸다는 걸 알 수 있음



그런데 이들이 그냥 머리통 텅텅 비고 칼만 썰줄 아는 사람들이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음


3대 야마다 아사에몬부터는 사형수들의 사세구(辭世句, 죽기 전에 남기는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하이쿠(俳句)를 공부했음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시대가 들어섰음


이 당시 8대, 9대 아사에몬인 요시토요(吉豊)와 요시스케(吉亮, 위 사진의 인물) 형제는


메이지 정부에 의해 '도쿄부수옥괘참역'(東京府囚獄掛斬役)에 임명되어 잠시나마 참수형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결국 정부가 1870년 시체를 이용해 타메시기리 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주 수입원을 잃게 되었고


1880년에는 참수형을 교수형으로 대체하는 법이 제정, 1882년에 시행됨에 따라 야마다 아사에몬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짐



마지막 야마다 아사에몬인 요시스케는 이후 이치가야 형무소(市ヶ谷刑務所)에서 서기로 잠시 일하다 퇴직했다고 함



참고로 이치가야 형무소는 이봉창 의사가 사형당한 곳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