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이 영화 안 본 사람 기준으로 쓴 글임


 올해 1월에 국내 개봉한 디즈니 100주년 영화 위시


 인터넷 망령이라면 슬슬 디즈니가 대판 깨져서 정신을 차리길 바라고, 그렇다면 위시의 서사도 떠도는 글로 어느정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악역은 합리적으로 백성의 소원을 매달 이뤄주는 왕인데, 흑인 주근깨 PC 주인공이 대황 매그니피코 왕님을 끌어내렸다.'

 '근데 소원을 이루어주는 시스템은 철저히 왕의 마법으로 가능했기 때문에 대책이 필요한데, 주인공 이새끼는 나몰라라하고 왕비한테 떠넘기고 여행이나 떠났다.'


 이렇게 떠돌았는데, 음해 없이 담백한 사실이라고 생각함.

 약간의 존경심만을 바라며 한 달에 한 번씩 국민들 소원을 이루어주면서도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소원은 자기 선에서 컷해주는 왕이, 주인공 할아버지 소원 안 들어줬다는 이유로 몰락했음.


 근데, 이게 기어이 디즈니가 기초적인 도덕 관념마저 거스르는 가치관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까?

 그렇게 보고 싶지만 일단 아직은 아닌 것 같음.


 왜냐면, 빌런인 매그니피코 왕이 선해보이기도 한 건 의도적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임.

 흑마법서 꺼내서 펼칠까 말까 하던 와중에 이건 아니라고 스스로 돌려놓는 장면도 있는데, 당연히 의도된 입체성임.


 이런 '악역이 이상적이며 옳아보인다' 라는 점에서, 어떤 특정 서사와 위시의 유사성을 느꼈음.




1. '위시'의 주제의식은 무엇이었는가


 무한 츠쿠요미임.

 정확히는 '행복한 꿈 VS 직접 행복을 이뤄야 하는 현실' 클리셰가 맞겠네


 매그니피코 왕의 마법에만 의존하며 그가 한 달에 한 명씩 이뤄주는 소원이 자신의 것이길 빌며 살아가느냐.

 현실이라는 제약 아래라 해도, 자신이 직접 자신의 꿈을 이루느냐.


 위시라는 작품은 그걸 말하려던 영화임.

 무한 츠쿠요미 상태에서 시작해서, 별의 정령이라는 기연으로 그걸 부수는 이야기.


 마지막에 왕비가 하늘을 날고 싶은 사람과 비행기를 만들고 싶은 사람을 중개해줘서 그것도 조롱받는데, 조롱받을 만한 것과는 별개로 결국 '자신의 손으로 소원을 이루는 행위'를 권한 것이지.



 근데 사실, 이 클리셰는 원래 이성과 합리만으로는 사람을 납득시킬 수 없음.


 모두가 행복과 성공을 위해 살아가는데, 그게 꿈이라도 평생 제 삶처럼 살기만 하면 상관없는 것 아닌가?

 오히려 꿈이기 때문에 '모두가 행복할 순 없다'라는 유토피아의 두 가지 의미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은가?


 이런 논리를 그냥 '그런 행복은 의미가 없는레후' 원툴로 밀고나가는 주제의식이니 그럴 수밖에.

 마다라가 옳았다는 밈이 대체로 진심인 것도 그런 이유지.

 주제선정 자체는 디즈니답긴 함.


 때문에 이런 클리셰는 보통 두 가지 면피책을 준비함.

 행복한 꿈 자체에 문제가 있거나, 그걸 이루는 주체에게 문제가 있거나.

 만약 그것도 없다면, 그냥 이상론으로 빌런의 주장을 무시하고 힘으로 찍어누르거나. (이 경우에도 당위성을 위해 반동인물 측에게 최소한의 문제를 만들어두긴 함)


 그리고 디즈니의 '위시'는 후자를 택했음.

 그것도 최악의 방식으로. PC까지 괜히 끼얹어서.


 여기서부턴 위시의 서사와 좀 결이 비슷한 씹덕 작품을 들고 와서, 위시의 문제를 정리해보자




2. 악역인 매그니피코가 이랬더라면


 원신의 라이덴 쇼군

 의외로 이새끼 행적이 가장 위시 빌런과 비슷하다


 백성의 행복을 빌었는가? O

 백성의 소원을 가져갔는가? O

 소원을 가져갔을 때, 본인은 그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잊는가? O

 그 이후, 백성은 무기력해지는가? O


 얘도 위시처럼 스토리 퀄리티가 개좆박긴 했지만, 적어도 선악구도는 위시보다 명확함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소원이라는 변수를 없애서 백성에게 평화로운 영원함을 주겠다는 목적 전달은 확실했기 때문임.


 만약 위시가 라이덴 쇼군처럼 '독선적인 염원의 묵살'을 빌런의 악행으로 삼았더라면, 평이한 영화였을지언정 논란은 없었을 것이다.


 "이 소원은 이래서 안돼. 저 소원은 저래서 안돼. 그래서 안 들어줄 거지만 너무 위험하니까 돌려주지도 않을거야! 평생 무기력하게 살라지!"

 이처럼 편집증적인 모습이라도 보여줬다면, 의도는 좋았던 빌런... 정도로 남았겠지.

 '평온하지만 꿈 없이 살게 되는 세상'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무한 츠쿠요미보단 반대할 여지가 좀 많은 편이니까




3. 주인공측이 이랬더라면


 이대로 가면 라이더

 '가면라이더 기츠'라는 작품도 인간의 소원이 주제이기 때문에, 꽤 공통점이 많은 작품이다.


 소원을 빼앗긴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잊고 무기력해지는가? O

 소원을 빼앗긴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결과였는가? O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를 믿을 것을 강조하는 작품인가? O


 위시의 'Just keep wishing'

 기츠의 '계속 믿으면 소원은 이루어진다'

 둘 다 주제의식을 강조하는 대사가 있는데, 이건 주제도 똑같고 하는 말도 똑같음. 소원이 이뤄지길 계속 믿으라는 얘기니까.


 하지만 기츠는 주제의식 전달에 성공했고 위시는 실패했음.


 주인공도 소원 들어줄 수 있는데, 얘는 믿어주는 동료들이 그냥 남이 해주길 바라면 힘을 잃고 악역측에게 조종당하는 몸이 됨.

 오직 자기가 해내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그걸 해낼 힘을 주는 식으로 이뤄줄 수 있음.

 때문에 믿기만 하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이루려고도 해야 진정 '믿는 것'이라고 설득이 되는 작품이다.

 심지어 얘네는 소원을 모아서 단 한 명의 소원을 이뤄주는 제로섬 게임 시스템이라서, 진실이 밝혀진 순간 좋아할 수가 없음.


 그런데 위시는?

 믿었더니 우주에서 나서서 내려준 별의 힘으로 왕 끌어내리고, 교훈이랍시고 'Just keep wishing~' 하고 끝내버리니... 같은 대사여도 다른 결과를 내보일 수밖에.

 심지어 왕이 이뤄주지도 않을 소원을 쌓아둬서 뭐가 좋은지도 말 안 해줌 ㅋㅋㅋㅋㅋ 마지막에 힘 강화하는데 쓰긴 하는데


 차라리 위시 주인공도 '별의 정령'에게 의존하려 들면, 즉 안주하면 정령이 떠나버린다든가 하는 리스크가 있었어야 함

 그래야 자신의 소원은 자신이 이루어야 한다는 주제의식도 빛을 발하지


 


 결국, 주제의식 자체는 늘 보던 그 맛임.

 하지만 '위시'가 범했던 치명적인 실수가 있고, 이는 3개로 줄일 수 있을 것 같음


1. 신념 VS 신념으로 밀고 나가는 게 정배인 클리셰를 차용한 주제에 선 VS 악 구도를 잡은 것.

2. 그럼 선악이라도 확실해야 하는데, 정작 악역인 매그니피코는 신념이 있고 선악이 모호한 캐릭터라는 것.

3. '자신이 직접'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는 걸 강조하지 못해서, 그냥 '믿으면 우주가 나서서 들어줄 것'이라는 빈약한 ㅈ논리로 왕을 끌어내린 듯이 보이게 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