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막 문학 이야기이자,


현재 PC주의의 한 흐름을 담당하고 있는 흑인 문화의 정신적 결핍 요소를 엿볼 수 있는 소설 작품.


테쥬 콜(Teju Cole)의 [오픈 시티(Open City)] 되시겠다.



영문학 수업을 더듬더듬 짚어 올라가며 언급하는 거라, 내용상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하는 점 양해 바람.



최근 대학 영문학계의 수업 흐름이 하나 바뀐 게 있다면, 과거 스테디셀러나 고전을 기반으로 한 매우 클래식한 영국 및 미국 문학을 다뤄왔다면 최근은 매우 트렌디한 느낌이 있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고대의 베오울프, 중세의 셰익스피어, 그리고 근현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시 소설을 국적 중심으로 이른바 주류 국가였던 영국, 미국으로부터 조금 벗어나 그 탐구의 범위가 영미문화권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


개중에선 영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이면서도 제3국에 놓여 있던 작품들이 권위 있고 이름난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점차 제도권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물론 해당 작품은 본인이 알기로 나이지리아계 미국인 작가가 쓴 소설이니, 엄밀히 말해 제3국의 작가가 아니긴 하다. 다만 인도에서 쓰인 영어 소설, 캐나다 작품은 물론 포함하며 미국 이민자 제3세대에 해당하는 작가들의 이질적인 문화적 배경을 담은 소설들이 차츰 주목을 받고 있는 듯하다. 이 소설도 넓게 봐선 그런 유형에 해당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소설들은 기존의 정통 영문학이 가진 어떤 수사적, 기교적인 특징의 훌륭함보다 사뭇 이질적인 내용적 접근 방식이랄까 그런 부분이 두드러지는데.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이민자 및 출신지의 사람들이 한 데 섞여 미국인으로 살아가면서도 동시에 끝내 어느 특정한 미국적인 무언가에 동화되지 못하고 이질적인 이방인으로 맴돌 수밖에 없는, 혼란이나 결핍 또는 공허한 정체성의 위기가 종종 주제 의식으로 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미국 안에 있으면서도 한 걸음 미국 밖에서 그 내부를 들여다보는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 많아졌는데.


테쥬 콜의 오픈 시티는 그러한 부문에서 나이지리아계 미국 흑인으로서 뉴욕의 삶을 살아가는 관찰자로서의 이중적 성찰을 느낄 수 있다.



비슷한 느낌의 한국 소설을 떠올려 보면 박태원 님의 [천변풍경]이 엇비슷하게 떠오르지만, 이 소설은 명확한 주인공이자 화자가 존재하고, 도시적인 배경과 모습들 속에 담긴 관찰자적인 시선과 더불어 내면적 고민과 성찰의 모습을 깊이 침잠해 간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부분은 책의 리뷰에 가까운 내용보다,


미국인이 아닌 철저한 외부인인 제 3국의 사람 시선에서 미국 흑인이 가진 어떠한 결핍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인데.


한 가지 핵심적인 대목을 꼽자면 이러한 부분이 있다.



과연 미국 내 흑인들은 모두 같은 "흑인"이고 형제들일까.


그렇지 않다면 미국의 흑인들은 과연 어떠한 존재들인가. 미국의 구성원임은 분명하면서도 강제적으로 노예로서 팔려 와 미국에 정착해 세대를 거듭해 내려오게 된 그들에게 미국은 어떠한 곳인가.




주인공 쥴리어스는 작가의 자전적인 어떠한 모습을 담고 있는데, 역시 나이지리아 계통으로서 본인은 사실 그에 대한 기억도 명확한 정체성 비스무리한 어떠한 감정(일종의 소속감?)도 가진 것이 없다. 그에 따라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흑인 간의 유대, 에 관해서 살짝 다른 감상을 보여주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흑인 문화의 모습은 매우 제한적이다.


부정적인 모습을 떠올리자면 할렘 가에서 비롯되는 갱단 커뮤니티를 떠올릴 수도 있고,


BLM 운동과도 연관되어 있는 흑인 사회를 아우르는 반인종차별주의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고 한데.



그 어떠한 미국 도시보다 세계적인? 이른바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의 다국적 혹은 글로벌한 도시라 일컬을 수 있는 뉴욕 안에서 나이지리아계 흑인 쥴리어스는 라이베리아 라든가 기타 흑인 국가권 출신의 흑인들과 만나면서 매우 어색한 감정을 느낀다.


흑인이면 으레 공유할 법한 브라더 정신이랄까 라는 게 허상에 가깝고.


마치 서구인이 동양인을 잘 구별하지 못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흑인들은 그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구분짓지만 외부에서 봤을 땐 흑인으로 묶이는, 그러면서도 그런 흑인의 집단적 정체성은 실재하는가? 라고 간접적으로 묻는 것만 같다.




주인공 쥴리어스는 나름 정신과 의사로서 성공한 뉴욕의 거주민으로서, 그의 정체성은 매우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고 모국인 나이지리아든, 흑인이란 하나의 인종으로 퉁쳐 질 수 없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국가 출신의 그들 가운데서도 정서적으로 의지할 수 없는, 부유하고 결핍된 정체성의 공허함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최근 PC주의가 거세지고 있는 와중에 인어공주의 흑인화라든가, 클레오파트라의 흑인화 같은 블랙 워싱이 이따금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버젓이 원전이 명백히 존재하고, 굳이 인종차별주의를 내세워 PC적 논란을 개입할 필요 없는 곳에까지 간섭해 가며 뭇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원작팬들을 괴롭히는가.


거기에 더해 빼앗아 가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불만은 인종차별의 낙인에 짓눌려 수면 아래에서 끓고 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그들은 때로 거센  비난에 대면한다.


미국 내 흑인놈들은 노예 출신이라 근본이고 뿌리고 뭣도 없는 놈들이라 파렴치하게 다른 이들의 전통을 탐낸다고, 문화 도둑질이라 비난한다.



원색적이고 어느 편으론 비열하기까지 한 모욕적 언사에 대해 모두 동의할 순 없다.


하지만 그러한 블랙 워싱은 문화 혁명 이후 소중한 문화적 유산을 스스로 파괴했던 누군가들이 끊임없이 주변국의 문화의 원류가 본인들 것이라며 자극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데, 그 때 언급되는 정체성의 결핍에 대해 뭔가 어렴풋이 생각할 거리들이 있는 것만 같다...



명백한 답을 내릴 순 없지만 뭔가 지성을 발휘해 정제된 이러한 문학 작품 속 의식을 파헤치다보면 어스름하게 무언가가 말이지.



Q. 이거, 리뷰인가...? 근데 딱히 장르소설 쪽 작품은 아니라서 애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