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전쟁 이후, 고려는 원나라에게 칭신하며 조공-책봉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형식적인 칭신과 조공을 바치면 제후국에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던 다른 전통적인 조공책봉 관계의 상국-제후 관계와는 달리, 원나라는 고려 국왕의 격과 고려 내부의 관제를 격하시키고,  고려 국왕을 직접 여러번 폐위시키고 다시 복위시키는 등 그 간섭의 강도가 타 왕조들보다 매우 높았다.


심지어는 고려 국왕이 원나라 황제의 명령에 유배를 가게 되고 수도로 불려 와야 하는 일까지 일어났으니, 기존 고려의 신하들은 고려 국왕이 더 이상 자신들의 권력에 이어진 동앗줄이 아님을 알았다. 더 이상 그들은 고려 국왕의 충직한 신하가 아니었다. 주군을 바꾸어가며, 때로는 나라를 바치려 하며 자신들의 권세를 탐하였다.


오늘은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 중, 두 번째 입성책동에 의해 다뤄보고자 한다.



1.자신의 심왕 자리를 아들 대신 조카에게 물려준 충선왕


충선왕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의 아들로써, 기존 충렬왕의 부인이었던 정화궁주의 장자인 강양공을 대신해 고려 국왕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자신 때문에 자리에서 밀려난 이복형에게 미안한 감정을 항상 지니고 있었고, 강양공의 아들 왕고를 양자로 삼으먀 매우 어여뻐했다.


자신이 고려 국왕과 심왕의 지위에서 물러날 때 원나라 무종 황제의 즉위를 도우며 받은 심(양)왕의 작위를 아들인 충숙왕에게 물려주지 않고 왕고에게까지 물려줄 정도였는데, 이는 자연스레 충선왕의 측근들이 자신들의 주군의 의중이 아들이 아닌 조카에게 있다고 판단하는 계기가 되어버린다.(다만, 이것은 마냥 왕고를 아낀 것뿐만은 아니었고, 원나라 내에서 충선왕에 반대하는 세력이 고려 국왕이 심양왕을 겸임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충선왕을 견제했던 까닭도 있었다.)


충선왕이 왕고를 아낀다는 것을 안 원나라 황제 역시 왕고를 몽골 황실의 공주와 혼인시키며 힘을 실어주었고, 그렇게 심왕 왕고는 고려 국왕의 자리를 이어받은 충숙왕과 대등한 관계로써 존재하게 된 것이었다.



2. 대도로 불려온 충숙왕,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심왕파의 공작


부왕 충선왕이 고려 국왕의 지위를 물려주어 제 27대 고려 국왕이 된 충숙왕이었으나, 여전히 조정에서는 부왕의 측근들이 정사를 주도하였고, 부왕이 심왕의 자리를 자신이 아닌 사촌 왕고에게 물려주어 고려 신하들 상당수가, 특히 원의 수도 대도에 있는 신하들은 심왕 왕고에게 기울었던 탓에 왕의 입지는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한 분위기를 알았으나 딱히 방법이 없던 충숙왕은, 향락과 사치로 8년간 군주 생활을 한다.


그러다, 원나라 영종 황제가 즉위하고 친정체제 구축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부왕 충선왕이 임바얀투구스의 모함으로 티베트로 유배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 아비에게 노자를 바치고 백관들에게 원나라 중서성에 올릴 부왕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쓰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는 한편 충숙왕은 정방을 다시 설치하는데, 당시 정방은 최씨 정권이 붕괴되며 일시적으로 궁중의 기구가 되었다가 충선왕에 의해 혁파된 상태였다.


그런 즉, 다시 정방을 설치한다는 것은 곧 국왕이 인사권을 장악하고자 함을 드러낸 것과 같았다. 충숙왕은 정방을 통하여 부왕의 측근들을 유배하고 교체시키는 등 국정 장악을 시도하였다.


그러던 중, 원나라 황제가 충숙왕을 대도로 소환하였다. 


그런데 원나라행은 가는 길부터 불길했는데, 원나라로 가는 도중 호종했던 신하들 대부분이 심왕파로 전향하는 일이 일어났고, 이에 충숙왕은 거의 호종도 없이 대도로 들어가야 했다.


대도의 분위기는 더없이 싸늘하였고, 충숙왕은 자신이 공주의 죽음에 관한 피의자로 불려왔다는 충격적인 답을 듣게 된다.



전말은 이러했는데, 심왕 왕고가 황제에게 충숙왕이 황제의 칙서를 찢고 사냥과 놀이를 즐기며 군주의 일을 하지 아니하며, 또한 부왕의 훈구대신을 모두 쫓아내는 등의 일을 하였다고 참소한 것이었다.


거기에 심왕 편에 선 조적 등은 충숙왕이 방탕한 일을 많이 하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며, 심지어 충숙왕의 몽골인 부인이었던 복국장공주의 죽음에 충숙왕의 책임이 있다고 하며 황제에게 참고하였고, 이를 황제가 믿으며 충숙왕을 연경으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3.심왕파 인사들의 심왕 옹립 시도


충숙왕이 대도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사이, 심왕파는 충숙왕의 폐위를 기정사실로 확정지으며, 아예 대못을 박고자 했다.


이에 심왕파 인사 중 한 명인 채하중이 원나라 사신 김가노와 함께 고려로 돌아와 원 황제가 권한공, 채홍철 등의 심왕파를 사면하였고, 충숙왕을 폐하고 심왕 왕고를 고려국왕으로 책봉하였다고 말했다.


이에 백관들은 심왕 왕고의 어머니를 찾아 하례했으나, 원나라에서 돌아온 이가 바로잡으며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런데, 실제 상황은 그와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충숙왕에 대한 조사 결과를 접한 영종 황제는 충숙왕의 고려 국왕인을 거두라고 명령했고, 충숙왕은 사실상 고려 국왕에서 폐위되기 직전인 상태가 된 셈이었다.


이에 고무된 심왕파는 원나라의 중신들에게 뇌물 등을 보내며 심왕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해 달라 로비하였고, 한편으로는 고려 내부의 분위기 조성을 준비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심왕파 인사 권한공이 백관을 자운사에 불러모으며 심왕을 고려 국왕으로 봉해달라는 청원서를 원나라 중서성에 제출하겠다며 백관들에게 서명을 요구했다.


그런데 서명이 시작되자, 갑자기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며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감찰 집의 윤선좌는


“나는 우리 임금의 잘못을 모른다. 신하로서 임금을 고소한다는 것은 개, 돼지만도 못한 짓이다” 


라고 하면서 침을 뱉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에 돌연 분위기가 바뀌어 적지 않은 이들이 청원서에 서명하지 않았고, 권한공은 받은 서명만으로 중서성에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나 중서성이 거부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4.입성책동


심왕을 옹립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자, 심왕파는 방향을 트는데, 바로 고려의 국체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일개 행정구역인 행성으로 편입하여 그 총괄을 심왕에게 맡기게 하려는 것이었다. 


유청신, 오잠 등이 나서 고려를 원나라의 일개 행성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고, 원나라 정부는 이를 진지하게 고려하며 고려에 "삼한행성"이라는 기구를 설치하는 것을 검토했다.


말하자면, 일개 대신들이, 단지 자신들의 권세를 얻고자 나라를 멸망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곧 적지않은 반발에 부딪혔는데, 우선 원나라 관리 왕관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세우며 반대했다.


1.고려를 독자적으로 다스리게 한 세조 황제(쿠빌라이 칸)의 뜻을 거스르는 것


2.고려의 풍토, 습속, 제도가 모두 중국과 다른데 중국의 법으로 통치하려는 것이 맞지 않을 것


3.고려인들의 반발과 저항이 거셀 것


4.적지 않은 재정 손실이 있을 것


5.군대를 상시 주둔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을 것


또한 대도의 고려인들도 문장이 높은 이제현을 앞세우며 반대 글을 올리는 등, 적지 않은 반발을 맞이하게 되자, 원나라 정부는 고려에 행성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취소하였고, 그렇게 입성책동은 실패로 돌아간다.



5.후일담


충숙왕이 옥새를 빼앗긴 지 어언 2년, 원나라에서 남파의 변으로 영종 황제가 살해되면서 세 황제인 진종 태정제가 즉위한다.


태정제는 충선왕을 토번에서 풀려나게 했고, 충숙왕의 고려 국왕인을 돌려주며 마침내 충숙왕은 옥좌를 되찾게 된다.


이후 충숙왕은 심왕 고를 위해 청원서에 서명한 대신의 녹봉을 정지하다가, 이내 서명한 이들 모두를 파직하였다.


영종 황제에게 불려온지 4년 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