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우리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그것은 시간을 가늠케 하는 지표이자 세상을 나누는 사방위를 구분하는 기준점이며,

따스한 온기로 곡물을 무르익히고 강렬한 빛으로 미지의 어둠 몰아낸다.

모든 것은 태양이 기준이고, 또 태양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태양]을 숭배하며, 또한 두려워해야 한다.

* * *

"얘, 너가 나이젤이지?
내 이름은 헬레나라고 해."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둘 다 어렸었다.

"아버지께 이야기 들었어! 너가 우리집에서 가장 세다며!"

난생 처음 여자가 내민 고운 손을 어쩔 줄 몰라서,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훈련 중에 잡담은 금지이기도 했고.

하지만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너는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대뜸 내 손을 붙잡았었다.

"손이 엄청 거치네. 안 아파?"

"안, 아파."

나도 모르게 대답해버렸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그러면서도 상냥하게 묻는 너에게 저항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구나~"

우리의 첫만남은 그것이 전부였다.

너가 본가의 삼자매 중 차녀이자, 차기 [태양]의 1순위 후보자였다는 것은 그 날 숙소에 돌아가서야 알 수 있었다.

분가 출신인 내가 너와 말을 섞은 죄는 가볍지 않다.


치이이익!

"윽,  크윽...!"

녹아내리는 밀랍이 피부를 물어뜯고, 살에 파고든다.

한껏 달아오른 청동날개가 등을 후벼파고 폐를 짓눌러, 나도 모르게 손발을 옭아매는 사슬을 잡아끈다.

기절할 것만 같은 고통을 견디는 이유는 언제나 더 심한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뿐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처음으로 단지 무섭지만 않았다.

등이 불타오르고, 땀구멍에서 피가 흘러내리는데도 눈앞에서 너가 아른거렸다.

마치 맨 눈으로 태양을 바라본 것처럼, 아무리 눈을 깜박이고 비벼대도 너는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프냐, 나이젤?"

"큭, 끄읍...!"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아들의 처벌을 담당한 아버지는 무거운 목소리로 나를 꾸짖었다.

이제와서 생각하면, 나보다도 아버지 스스로를 향한 꾸짖음이었던 것 같지만.

그때, 나는 나에게 말을 걸었던 너가 미웠던걸까?

신기하게도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너를 좋아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단지 그날따라 어둡기만 하던 내 마음에 흘러들어온 한줄기 빛이 잊혀지지 않았을 뿐.

* * *

너는 똑똑했다.

내가 너와 말을 섞었다는 것만으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두 번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똑똑똑!

"너 자니?"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볼만한 곳에서는.

한밤중에 가문의 경계선을 넘어서까지 내 방으로 찾아왔을 때는 정말로,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놀랐었다.

"안 자, 요."

"요는 무슨. 우린 동갑이니까 말 편하게 해.
아무도 안 올만한 장소를 찾았으니까 잠시만 따라와줄래?"

도대체 왜 찾아온 건지 몰라 망설였던 것을 또 혼날까봐 걱정하는 것으로 오해했던 너는 아랫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그런, 끔찍한 짓을 당하게 될 줄은 몰랐어. 싫으면 안 와도 괜찮아."

"괜, 찮아."

설령 처벌 받는 것이 무서울지라도

그 이상으로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정말? 고마워!"

우리는 손을 잡고 숙소를 뛰쳐나갔다.

나는 네가 어디로 가는지, 내 흉터지고 더러운 손으로 네 손을 잡아도 되는지도 몰랐다.

그저 꺄르르 웃는 네 밝은 웃음에 전염되어 같이 웃으며 달려나갔었다.

절대 들어가면 안된다는 마의 숲 속으로 들어가서 차가운 풀숲 위에 벌렁 드러누웠었다.

"나 사실은 몰래 여기로 자주 와."

고작 두 번째 만나는 사람에게 큰일날 비밀을 허름없이 털어놓았던 너도 사람이 많이 고팠던 것일까?

"여기 누우면 달도 별도 잘 보이거든."

네 고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밤하늘의 천체들은 은은하게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나 별자리도 다 외우고 있다? 넌 아는거 있어?"

태어나서 싸우는 것말고는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고개를 젓자 뛸 듯이 기뻐하며 별자리들을 하나 하나 알려주는 너를 보며, 그것만큼은 배우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별들은 태양,만큼 밝지는 않네. 저렇게 많은데도."

조용히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내가 나름대로 칭찬이랍시고 한 말은 네 표정을 씁슬하게 만들기만 했었다.

"...너는 태양이 가장 밝으니까, 그것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니?"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당황하던 나에게 너가 던진 질문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었다.

"몰라."

솔직히 지금도 그 답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때 내가 한 답은 네 쓸쓸하던 표정을 바꿨었다.

갑자기 한대 얻어맞은 것마냥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고 한참을 웃어댔었지.

그 뒤로 너는 점점 나를 자주 찾아왔었다.

그 날 전까지.

* * *

"이 시간부로 내 딸, 헬레나 솔라시스가 48대 [태양]에 즉위함을 선언하겠노라!"

[태양]의 즉위식은 다른 어떤 행사보다도 찬란하고 눈부시다.

하늘에 떠있는 태양이 어두워보일 정도로 빛나는 행사의 중심에 있던 너는 구름이 낀 밤하늘보다도 어두웠다.

무수한 사람들의 환호와 축하 속에서도 서로 눈이 자꾸만 마주친 것은 나만의 착각만이 아니었겠지.

"이제 앞으로 너의 곁에서 누구보다 너를 충실하게 섬기고, 보호할 [이카로스]를 고르도록 하여라!"

이카로스.

태양을 누구보다 동경해, 밀랍으로 만든 청동날개로 하늘로 박차올랐던 어리석은 소년.

우리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왔던 전래동화의 주인공이다.


너는 단상에서 서서히 내려오며, 양옆으로 끝없이 줄지어 선 기사들을 훝는 시늉을 했다.

"정했어요."

아주 찰나 동안 차라리 너가 그냥 나를 지나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당신, 이름이 뭐죠?"

"...나이젤 케랄라스 입니다."

나는 너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선택이 마냥 당연하지만도 않아보였나 보다.

"으음, 케랄라스의..."
"솔라시스의 분가가 골라지는 것은 놀랍지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 아비를 찔러죽인 놈을 호위로 고른다니."

작지 않은 크기로 쑥덕이는 목소리들을 들으며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부디, 나만큼 고통스럽고 후회스럽기를 바란다.

"케랄라스 분가의 반란을 진압하고, 내 목숨을 구한 당신의 활약은 이 곳에 모인 다른 어느 기사보다 눈부시고 유의미합니다.

부디 그 마음을 유지하며 [이카로스]로써 나를 섬기기 바랍니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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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너무 커다란 지위에 짓눌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치른 히로인과

그런 히로인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쳐내고 나니, 남은 것이 없어 뒤늦게 후회하는 주인공

이정도면 순애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