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에 대만으로 여행을 갔었다


 풍등을 날린다던가, 궁중 박물관이라던가, 지우펀이라던가 여러 곳을 갔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역시 음식이다


 풍등 날리는 곳의 닭고기밥이 기름져서 맛있었고, 지우펀의 쫄깃한 우육면도 괜찮았다. 고수를 넣은 아이스크림도 있는데 생각과는 달리 먹을만 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가고 싶을 정도로 잘 먹었던 나와는 달리 어머니는 호텔 조식을 제외하면 잘 드시지 못하셨다


 몇몇 음식만 입에 안 맞았던 나와는 다르게 대부분의 음식에서 강한 향신료 향을 느끼셨던 것이다


 자, 오늘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가 이것이다


 중국, 동남아, 인도이런 곳들에서는 타 지역에서 먹기 힘든 향신료를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단지 그 이유로, 향이 강해 타 문화권을 사람은 먹기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그 음식들을 미개하다고 부를 수 있는가?



 


 계몽주의시대의 기라성 같은 망할 철학자들이 등장한 이후로 중세는 항상 무시되어 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학계는 이미 탈피했으나 이전 세대가 남긴 족적으로 인해 대중들의 인식은 바뀌지를 않고 있다는게 옳겠다


 암흑시대, 미개와 야만이 판치고 오직 종교만이 지배하던 마녀사냥의 시대, 어두운 중세를 밝혀 나가는 계몽된 주인공 등등...


 중세, 좀 더 나아가선 근세도 누벨 퀴진 열풍이 불기 이전까지 '부를 과시하기 위해 맛도 영양도 없는 향신료 범벅의 요리를 내놓았다'는 인식도 이에서 비롯되었다


 


 가끔 '중세에는 부족한 보존 기술로 고기가 잘 상하였고 그걸 감추기 위해 향신료를 다량 사용했다'라는 설이 돌기도 하지만 이미 1980년대에 폐기된 이론이다.


 원시시대부터 보존기술을 연구해온 인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뿐더러, 정 뭣하면 귀족답게 가축 잡으면 되었다


 그 오래전 이론이 아직도 돌아다니는 지구란 어떤 곳일까...



 뭐 아무튼 그렇다면 왜 향신료를 많이 사용했을까?


 정답은 단순하다 맛있으니까


 애초에 향신료가 비싼 이유가 그게 들어간 음식이 맛있어서이지 않은가


 당시에 귀족들이 구해온 향신료를 받은 요리사들은 그걸 십분 발휘한 요리를 내놓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맛있게 만들어서



 대중의 편견과는 다르게 중근세 귀족들은 어느 만화 엘프 같은 족속들이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상류층은 재력과 권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식재료와 능력있는 요리사를 구할 수 있었다. 이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당대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만 먹다가 파티만 가면 개떡 같은 요리를 준다고 생각해봐라. 주인 재력이고 나발이고 밥상 뒤집어 엎고 싶을 거다


 실제로 'The Art of Cookery in the Middle Ages'를 저술한 스컬리 테렌스는 값비싼 향신료를 가져와선 개도 안먹을 요리를 내놓은 귀족은 오히려 명성이 깎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로 치면 졸부가 패션도 신경 안쓰고 그냥 황금만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과시하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다



 다만 그 맛의 기준은 현대 유럽과는 사뭇 달랐다


 


 빵과 고기를 주류로한 향신료를 많이 사용한 당시 요리는 현대 인도나 동남아 식성에 더 맞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제대로 고증해서 만든다고 해도 현대 서양인의 입맛에는 적절치 않은 요리들도 있다



 물론 그것도 제대로 고증했을 경우의 이야기다


 중세는 현대와 단위도 달랐을 뿐더러 요리책에는 정확한 단위가 적혀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때문에 역사학이 발달하기 이전 학자들 그리고 고증을 대충으로 하는 다큐멘터리들은 단위를 현대로 맞춰버리거나 제멋대로 해석하는 일이 많았고


 결국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향신료를 아주 덕지덕지 쳐발라서 맛이 개떡 같아지는 요리'의 이미지가 탄생한 것이다


 즉, 지들이 못만들어 놓고선 '중세 귀족들 이딴걸 먹었단 말이야?' 라고 역정을 냈단 뜻. 요리사의 주적 같은 놈들...


 


 정리해보자면 중세 요리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만들어진 이유는

 1. 중근세에 대한 고질적인 대중의 편견

 2. 현대 유럽에 비해 실제로 향신료가 강하긴 했던 당대 요리

 3. '분명 레시피대로 만들었는데 맛이 없네요. 비추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붕이 같은 옛날 학자와 다큐멘터리 감독


 이 3가지가 결합해낸 환장의 콜라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글을 쓰게된 계기인 념글에서도 이러한 인식이 잘 드러난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려는 현대 프랑스 요리와 향신료의 천국인 인도 요리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


 답은 당연히 '문화에 우열은 없다' 이다. 당장 중학교 도덕시간에 문화 상대주의를 배우지 않았는가?


 모든 요리 문화는 동등하다. 인권에 어긋나는 건 제외해야 하니 영국요리는 빼고


 참고로 현재 프랑스 요리도 본연의 맛을 살리는 누벨퀴진과 프랑스 전통인 오트 퀴진을 조화하자는 쪽으로 가고 있다


 애초에 향신료 범벅이든 본연의 맛을 살리든 귀족들은 많이 먹을 수 있으며, 설사를 자주 한건 당시에는 장을 비워야 건강에 좋다는 낭설을 믿었기에 귀족들은 항상 설사약을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또 요리란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건강을 고려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요리는 식재를 맛있게 만드는 과정이었고 영양학을 고려한 역사 자체가 짧다


 당장 비타민이 1900년대 이후에 발견되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당장 먹고 죽는게 아니면 맛있다고 먹지 않는가


 향신료를 많이 먹어서 안좋다면, 고기와 설탕을 퍼먹는 너 나 우리 장붕이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루이 14세 시기 프랑스 식문화였던 오트 퀴진은 1500년대 이탈리아 식문화가 프랑스로 전파, 독자적인 발전을 거쳐 형성되었다. 물론 이후 본연의 맛을 살리는 누벨퀴진도 이탈리아 영향이긴 하지만...


 애초에 저놈들에게 배운거에요! 향신료도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전유럽에 팔아먹은거잖아! 그것도 가격 후려쳐서!



 이딴 망할 낭설을 제작한 놈은 앞으로 요리에 마늘을 조금씩만 넣어먹어라



열쪽 말고 반쪽만 넣어먹으라고


 향신료인 마늘이랑 고추를 과다하다 못해 못먹을 정도로 쓰는 제품도 내놓는 한국인 주제에 향신료를 많이 쓴다 만다...맵찔이인 내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을 참조하자. 

중세 13세기 프랑스 요리책 Liber de Coquina의 내용

14세기 영국 요리책 The Forme of Cury의 요리를 실제로 만드는 영상(영국 요리가 개판이 된건 빌어먹을 청교도와 세계대전 이후다)


 물론 귀족인지라 과시가 섞여 있긴 했지만, 결국 중세인들도 사람 먹는 걸 먹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