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실학자의 대표로 알려진 유형원이 쓴 반계수록


비록 유형원은 북인 출신인데다가 살아 생전에 진사까지만 찍고 평생 학문에 힘쓰다 죽었지만,


동년배 친구이자 사돈이었던 배상유가 1678년, 숙종에게 반계수록을 추천해주었음


"전(前) 참봉(參奉) 배상유(裵尙瑜)가 상소(上疏)하여, 심학(心學)·성리(性理)의 요체와 당론(黨論)을 억제하고 현재(賢才)를 선용(選用)한 말을 진달하였다. 또 고(故) 진사(進士) 유형원(柳馨遠)이 저술한 《반계수록(磻溪隨錄)》 속의 전제(田制)·병제(兵制)·학제(學制) 등 7조목을 진달하며 차례로 시행하기를 청하므로, 묘당(廟堂)을 내렸더니, 묘당에서 그 말이 오활(迂濶)하다 하여서 내버려 두었다."

- 숙종실록 7권, 숙종 4년 6월 20일 기축 1번째기사 -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기준으로 이 이후에 숙종 대에 별다른 얘기가 없어 실질적으로 반계수록 개혁안이 현실정치에 적용되진 못함


그러다 영조 대에 다시 활발히 언급되기 시작함


소론의 영수이자 백의정승으로 불리던 윤증의 제자, 양득중이 영조에게 경연에서 <주자어류> 말고 <반계수록> 강하도록 청하기도 했고,


영조가 직접 반계수록을 간행토록 지시하기도 함


다만 영조가 직접 이를 읽었다는 기록은 없어서 봤는지, 안봤는지는 모름


그리고 정조 대에 이르러, 아예 정조는 반계수록을 보고 실제로 써먹으려고 했음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보유(磻溪隨錄補遺)》에 수원의 읍치(邑治)를 북평(北坪)으로 옮기고 성지(城池)를 건축해야 한다는 논설이 있다. 1백 년 전에 마치 오늘의 이 역사를 본 것처럼 미리 이런 논설을 한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 정조실록 38권, 정조 17년 12월 8일 정묘 1번째기사 -


그리고 정조 대 관리들도 열심히 반계수록을 칭찬했음


"복태진(卜台鎭)의 상소에 아뢰기를,


"농삿일에 있어서 급선무는 수리(水利) 사업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으며, 수리의 공효는 제언을 쌓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고 처사 유형원(柳馨遠)이 지은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읽어보니, 거기에 ‘부안(扶安)의 눌제(訥堤), 임피(臨陂)의 벽골제(碧骨堤), 만경(萬頃)의 황등제(黃藤堤)는 소위 호남 지방의 3대 제언이다. 처음에 그 제언을 쌓을 때에는 온 나라의 힘을 다 들여서 완성시켰는데 중간에 훼손되자 내버려두었다. 지금 불과 몇 고을의 힘만 동원하여 예전처럼 수선해 놓으면 노령(蘆嶺) 이북은 영원히 흉년이 없을 것이며 호남 지방의 연해 고을이 중국의 소주(蘇州)나 항주(杭州)처럼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근세에 국가를 경륜할 만한 선비로는 유형원을 으뜸으로 꼽는데 그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 세 제언의 이익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조정의 신하 가운데 이 분야에 능숙한 자를 잘 가려 뽑아 봄이 되기를 기다려 공사를 시작하게 하되, 굶주리는 백성을 정밀히 뽑아 그들을 부역시키고 관가에서 먹을 것을 대주어, 보리가 익을 때까지 그렇게 하소서. 그러면 이 제언이 완성되자마자 백성들의 먹을 것이 넉넉해질 것입니다."

- 정조실록 50권, 정조 22년 11월 30일 기축 1번째기사


그렇게 정조는 반계수록을 토대로, 중농학파로 불리는 실학자들한테 농법 개혁을 추진하기도 했음


그러나 저 기사가 정조 22년, 즉 1789년이라 이듬해 정조가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버림


이렇게 반계수록은 당대 탕평 군주로 불리우는 영정조 시기에 적극적으로 반영되곤 했음




이외에 유수원의 <유서>는 영조가 보고 읽었는지, 유수원을 불러 폐단을 어떻게 고칠지 얘기도 하고,


유수원이 한림(사관) 추천제랑 이조전랑 지대제 폐지하십시오 하고 건의하는 등 실제 정치에도 참여했음


하지만 유수원이 강경 소론 출신이라 나주괘서사건 때 숙청당해버림




한편, 정조는 중국 서적 수입에도 몰두했어서


본래는 건륭제의 명으로 만들어지던 백과사전인 <사고전서>를 구해오라고 서호수를 중심으로 사절단을 보냈는데,


청나라에서는 "아직 편찬중이고 인쇄 수량도 적어서 안됨 ㄴㄴ" 해서 못 구할 위기에 처하자,


그 대신에 <고금도서집성>을 은 2,150냥을 주고 구해오게 됨


물론 고금도서집성도 당대 최고의 백과사전 중 하나로 규모만 5,020책 10,000여 권에 달했음


그리고 고금도서집성의 지식들을 바탕으로 화성 건축에 이용해 먹기도 했음



하지만 정조는 사회, 정치 개혁적 면모와는 별개로


이데올로기 측면에 있어서는 주자학(성리학)을 존숭했고, 실제로 꼰대 송시열을 높게 평가했던 인물이었기에


 패관소품체(유학 경전이 제시하는 전통적 문체가 아닌 글)로 쓰여진 문학들 싹다 잡아드리는 문체반정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주자의 모든 저술을 집대성한 <일통지서> 편찬이나 송시열을 다룬 <송자대전> 간행 등의 활동을 했음


그래서 정조는 성리학을 최고이자 본체로 두는 한편, "실학"을 성리학을 현실적으로 써먹고자 하는 활용의 방향으로 봄


또 당대 실학자들의 실학에 대한 생각도 비슷하게 봄


홍대용

“만일 의리를 버린다면 경제는 공리(功利)에 흐르고, 사장(詞章)은 부조(浮藻)에 빠지게 될 것이니, 어찌 학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 그렇다면 의리가 그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유수원

“주자의 학문은 통달하지 않은 곳이 없고 세상을 다스리는 지식도 더욱 정밀하고 심수하였다. … 우리나라 선비들은 ... 다만 정심성의(正心誠意) 네 글자만을 주워모아 임금에게 아뢰는 것을 힘쓰면서 … 슬프다! 이들이 과연 주자를 잘 배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익

“경서를 연구함은 장차 치용(致用)하기 위함이다. 경서를 해설하면서 그 목적을 천하만사에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한갓 책을 읽는 데 능한 것뿐이다.”


정약용

“나쁜 법과 잘못된 정치가 생긴 것은 모두 경전의 뜻에 밝지 못한 것에 연유하니,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경전에 밝은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다.”


즉, 실학이라는 것은 경학이나 의리학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경세와 현실적 실천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끌어올리는 실천 학문에 성격이란 것


그래서 조선 후기 대사헌과 예조참판을 지내고 <반계수록>의 서문을 써준 오광운은


"그러나 공의 <이기총론>, <논학물리>, <경설> 등의 책을 읽은 뒤라야 <반계수록> 이라는 책이 본(本)이 있고 하늘의 덕과 왕도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의리학(성리학적 도덕)을 다룬 저술들을 먼저 읽어봐야 한다고 말했음


정약용이 주장한 경학의 경우, 실제 주희 성리학과 차이가 있지만 (기호론, 상제론 등), 주희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정약용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도 정약용의 사상이 주자학의 맥락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말하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