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표트르 크로프트킨은 위대한 인도주의자인 철학자이자 혁명가인 과학자라는 생각이든다. 그 누군가의 죽음도 바라지 않았으며 모두가 함께 잘살기를 바란 그는 누구보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한 인물이다.

혁명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망은 19세기에 다윈의 사상이 왜곡되고,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학이 곡학아세되어 소위 "문명인들"이라는 작자들이 그들의 핵심적 메시지였던 각 생물간의 협력과 공존을 배제한 채로 적자생존과 인종차별 그리고우생학이라는 유사과학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변모할 때. 그는 그들의 생각의 함의를 과학자로써 가장 확실히 간파하였으며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의 연대와 결합, 사랑과 우정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생태적 문제까지 해결하고자 움직일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미래를 제시한 그는 진정으로 따뜻한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자 한 인간이다. 

한편, 비슷하게 순수하다 생각되는 철학자로 볼 수 있는 사드와는 또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시기에 사드의 잔혹하고도 냉혹한 사회 고찰을 통해 계몽주의의 맹점을 공격하는 것과는 다른 또 하나의 순수함이 그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로 만드는 데 이바지 한 것만 같다. 

사드는 본인의 불같은 성격과 성적 기행과 성격을 바탕으로 사회와 자연에서의 인간을 연구한 철학자이며 자연의 원리라면서 기득권이 그 철학들을 적당히 끼워맞추면서 혁명이 쇠락하며 본의미를 잃어갈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그랬기에 그는 인간의 자유는 자연에게 달려있다는 종속적인 인간관으로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라 모형을 만들어 이상론만 내뱉으며 정의로운 사회와 행복을 위해 반동숙청이라는 명목으로 광장에서 시민이 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합리화한, 단순히 잘되거라고 속삭이며 죄없는 이들까지 단두대로 보내 시민들을 기만한, 그러한 "합리성"을 내세운 "비합리"의 극치인 공포정치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그런 예리함과 극한의 바늘로 대중의 심리와 감각을 일깨워 우리에게 기득권의 기만에 넘어가지 않을 자극제로 심금을 울리게 하였다. 그는 사회와 인간의 퇴폐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위선적인 인간론을 드러냈고 그 위선적인 인간성이 결국 사람들의 본 모습을 타락시킨다는 어찌보면 루소와는 비슷한 관점에서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하지만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쾌락과 행복을 느끼는 인간이라면 누구든 같은 평등한 존재이기에 정조이니 엄숙성이니 하는 것도 거부하였다는 점에서 사드는 자연의 목적인 "자유와 행복"의 원리를 방해하는 사회를 저격했다는 점에서 어떤 점에서는 루소와 다르다. 

한편, 크로프트킨은 그의 순수함과 이상, 그리고 자기자신을 타인을 위해 희생할 뿐 그 누구의 생명이나 노력을 희생시킬 필요를 제시하지 않고 하고싶으면 하고 하기싫으면 말라는 식으로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했다. 그는 불평등과 착취로 비롯된 병폐라 할지라도 그것을 빼앗는다기보단 서로간의 신용을 기망한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상호부조"를 "상호착취"로 만든 우리 모두에게 무의미한 관료주의의 폐해로 인해 일어나는 비극을 일깨우며 우리 스스로가 힘을 가지고 있어 어떠한 강력한 존재의 노예가 아닌 자유와 의지를 가진 존재로 역설한 그의 철학은 사드와는 또다르게 자연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며 인간이 마주하게되는 여러 문제와 해결에 대해까지 고민하였다는 점에서 비판을 통해 반성을 유도하는 사드와 달리 그는 착취의 원리 설명 후 해결책까지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간 인물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