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gel, Thomas (1987). What Does It All Mean?:A Very Short Introduction to Philosophy: A Very Short Introduction to Philosoph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국역본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Justice 장을 번역한 것임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태어나는 것은 불공정한가? 불공정하다면 이를 시정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아만 하는가?

세계는 불평등으로 가득 차 있다. 한 국가 안에서 그리고 한 국가와 다른 국가 사이에서. 어떤 아이는 편안하고 안락한 집에서 태어나고 적절한 식사와 교육을 통해 성장한다. 이와 달리 가난하게 태어난 아이들은 충분히 먹지 못하고 교육과 의료에 접근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명백히 이것은 운의 문제이다. 즉 우리는 우리가 태어날 사회적 또는 경제적 계급 혹은 국가에 대한 책임이 없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본인의 잘못이 없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불평등은 얼마나 나쁜가? 정부는 권력을 사용하여유책하지 않은 피해자들을 구제하여 이러한 종류의 불평등을 줄이는 것을 시도해야만 하는가?

어떤 불평등은 의도적으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인종 차별은 한 인종에 속하는 사람들을 다른 인종에게는 혀용되는 직업, 주거, 교육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혹은 여성 실직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거나 시민권은 남성에게만 주어진다는 식의 차별도 있다. 이러한 차별은 단지 불운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종적, 성적 차별은 명백히 불공정하다. 이것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행복에 끼치는데 허용되어서는 안되는 요인에 의해 야기되는 불평등의 형태이다. 공정함은 기회가 자격이 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기를 요구하며 정부가 기회의 평등은 시행하는 일은 확실히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의도적인 인종적, 성적 차별이 아닌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의해 발생하는 불평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위에 사례보단 어렵다. 왜냐하면 기회의 평등이 실현되고 모든 자격을 충족하는 사람이 (인종, 종교, 성, 출신에 구애받지 않고) 대학을 가거나 직업을 얻거나 집을 구매하거나 회사를 운영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상당한 양의 불평등이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유한 배경에서 자란 사람은 일반적으로 더 나은 훈련과 자원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이는 좋은 직업을 위해 경쟁하는데 있어 더 나은 능력으로 이어질 것이다. 기회의 평등이라는 체계 안에서도 어떤 사람은 동일한 재능을 가진 자들에 비해 시작부터 막대한 이익을 챙길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경쟁 체계 안에서 재능의 차이 역시 이익 산출에 있어 큰 차이를 야기할 것이다. 높은 수요가 있는 능력을 갖춘 자는 어떠한 특별한 재주나 재능도 없는 자들에 비해 더 많은 임금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 또한 부분적으로는 운의 문제이다. 사람들이 능력을 개발하고 사용하지만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려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메릴 스트립처럼 연기하지 못하고, 피카소처럼 그리지 못하고, 헨리 포드처럼 자동차를 제작하지 못한다. 이보다 작은 성취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연적 재능과 가적 그리고 계급적 배경이라는 운은 경쟁적 사외에서 개인의 수입과 지위를 결정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인이다. 평등한 기회는 불평등한 결과로 이어진다.

이러한 불평등은, 인종적, 성적 차별의 결과와는 달리, 그 자체로는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선택과 행동에 의해 생겨난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식에게 좋은 교육을 받게 하려고 노력하고 어떤 이는 자식을 위한 돈을 다를 이보다 많이 가지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제품, 서비스, 공연에 돈을 지불하고 어떤 공연자나 제조업체는 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기에 다른 이들보다 더 부유해진다. 모든 종류의 사업과 조직은 직무를 잘 수행하는 직원을 고용하려 노력하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를 고용하기 위해 높은 급여를 지불한다. 한 레스토랑이 손님으로 가득 차 있고 바로 옆집은 비어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전자는 재능있는 요리사를 가지고 있으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 때문에 손님은 전자를 선택하고 후자를 피하며 이러한 선택을 통해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다. 비록 이러한 선택이 두번째 레스토랑의 업주와 직원들 그리고 이들의 가족에게 불행한 영향을 끼친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영향 중에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매우 나쁜 상황에 내버려 두는 것이다. 어떤 나라에선 인구의 상당수가 세대와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빈곤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미국과 같이 부유한 국가의 경우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교육적 불이익이라는 충격을 삶을 시작할 때부터 받게 된다. 어떤 이는 이러한 불이익을 극복하겠지만 더 나은 시작점에 서서 성공한 경우보단 훨씬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려스러운 것은 부국과 빈국 사이의 재산, 건강 그리고 개발 격차라는 거대한 불평등이다. 세계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럽, 일본,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보다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러한 거대한 차이는 명백히 불공정해 보이는 행운과 불운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 한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할까?

우리는 불평등 그 자체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해결책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불평등 자체와 관련하여 주요한 질문은 "어떤 종류의 불평등의 원인이 [도덕적으로] 잘못됐는가?" 이다. 해결책에 있어 주요한 질문은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어떤 개입 방법이 옳은가?" 이다.

의도적인 인종, 성차별의 사례에선 대답하기 쉽다. 차별은 잘못된 행동이기에 불평등의 원인은 잘못되었다. 그리고 해결칙은 이러한 행동을 예방하는 것이다. 만약 건물주가 흑인에게 임대를 해주는 것을 거절한다면 기소되어야 한다.

하지만 다른 경우에선 질문은 까다로워진다. 문제는 잘못된 불평등으로 보이지만 그 원인이 어떠한 잘못된 행동도 아닌 경우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이에 비해 가난하게 태어나고 그때문에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고통스러운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은 불공정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등은 어떤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 비해 돈을 버는데 있어 더 성공적이었으며 자신의 자식들에게 가능한 최선의 도움을 제공하려 했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사회적, 경제적 계급에 속하는 사람과 결혼하려 하기 때문에 부와 지위는 축적되며 세대를 걸쳐 이어진다. 이러한 행동은 다양한 원인(직업 결정, 구매, 결혼, 상속, 자식 지원)과 결합하여 일어나며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닐 것이다. 만약 어떤 점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사람은 삶을 부당한 불이익과 함께 시작해야 한다는 결과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종류의 불운을 불공정으로서 거부한다면 그 이유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단지 그 사람이 태어난 사회·경제 체계에서의 일상적인 활동의 결과로 인해 발생한 불이익으로 인한 고통을 거부해야만 하기 때문이여야 한다. 우리 중 일부는 선천적인 물리적 장애와 같은 모든 불운 역시 개인의 잘못이 아니며 가능하면 이러한 불운이 상쇄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례들은 이 논의에서 재쳐두자. 나는 사회적 그리고 특히 경쟁적인 경제적 활동에서 발생하는 부당한 불평등에 집중하길 원한다.

부당한 불평등을 발생시키는 두 주요한 원인은, 내가 앞서 말한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속한 사회·경제적 계급의 차이와 자연적 능력 혹은 수요가 있는 재능의 차이이다. 아마 당신은 이러한 차이로 발생한 불평등이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잘못된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고 사회가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불평등의 원인 자체와 직접적인 불평등의 결과에 개입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가 본 것처럼 [태생적인 차이에 의한] 불평등의 원인에는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대다수의 악의 없는 선택을 상당수 포함된다. 어떤 제품을 구매할 것인지, 자식들을 어떻게 양육할 것인지, 직원들에게 얼마만큼의 임금을 줄 것인지에 대한 선택에 개입하는 것은 은행 강도질을 하길 원하는 사람이나 흑인과 여성을 차별하는 사람에게 개입하는 경우과는 매우 다르다. 개인의 경제적 삶에 개입하는 보다 간접적인 방법은 세금이다. 특히 소득세와 상속세 그리고 빈자보다 부자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해 설계된 소득세. 이는 정부가 사람이 모든 돈을 차지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거대한 부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시도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세금을 통해 확보한 공적 자산을 사용하여 자식들에게 적절한 교육과 지원을 할 여유가 되지 않는 가족들에게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적 사회 보장 프로그램은 세수를 활용하여 의료, 식품, 주거, 교육이라는 기본적 이익을 제공한다. 사회 보장은 직접적으로 불평등을 공격한다.

능력의 차이로 인한 불평등의 경우 경쟁적 경제 자체를 폐지하는 것 외에는 그 원인을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인재를 얻기 위한 고용 경쟁, 일자리를 얻기 위한 사람들 사이의 경쟁,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기업 간의 경쟁이 존재하는 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될 것이다. 유일한 대안은 모든 사람에게 거의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는 일종의 중앙집권적 기관에 의해 사람들이 일자리를 배정받는 중앙집권적 경제이다. 시도된 적이 있긴 하지만 이 시스템은 자유와 효율성 모두에서 큰 대가를 치러야 하며 내 생각엔 다른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수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업격하다.

만약 당신이 경쟁적 경재를 제거하지 않고 능력의 차이로 인한 불평등을 제거하길 원한다면 불평등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고수익 적용되는 높은 세율과 모든 이들 또는 극빈층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공공 서비스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수익이 매우 낮은 이들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음의 소득세"가 포함될 수 있다. 어떤 계획도 부당한 불평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고 세금에 의한 (고용과 빈곤에 대한) 경제적 부작용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해결책에 대한 쟁점은 언제나 복잡하다.

여기서 철학적 쟁점이 도출된다. 계급적 배경과 선천적 재능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부당한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조치는 사람들의 경제적 행동에 대한 개입을 야기한다. 정부에서 어떤 사람의 돈들 가져가 다른 사람을 돕는데 사용하는 세금이 대표적이다. 이것이 세금의 유일한 사용처도 아니고 주요한 사용처도 아니다. 대부분의 세금은 가난한 자보다는 부유한 자들에게 이익을 제공하는데 사용된다. 하지만 재분배 세금은, 이름 그대로, 우리의 문제와 관련된다. 재분배 세금은 정부의 권력을 사람들의 행동이 (도둑질이나 차별처럼) 그 자체로 잘못됐기 때문이 아니라 불공정해 보이는 결과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잘못된 행위가 아닌 한 정부가 개인에게 개입해서는 안된며  경제적 거래로 생성된 모든 불평등이 전혀 잘못되지 않기 때문에 재분배 세금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불평등이라는 결과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불평등이 부당하고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사회는 이를 시정할 의무가 없다. 이들은 이런 식으로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운이 좋다. 불평등에 개입해야 하는 유일한 경우는 어떤 이의 불운이 누군가의 잘못된 행위로 야기된 경우이다.

이는 논쟁적인 정치적 쟁점이며 여기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재능이다 능력의 차이로 인한 불평등보단 사회·경제적 계급으로 인한 불평등에 더 반대한다. 이들은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들은 빈곤하게 태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개인은 자신의 노력만큼 버는 것은 정당하며 따라서 시장성 있는 재능 혹은 복잡한 기술을 배우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비숙련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보다 많은 돈을 버는 것은 불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두 원인에서 발생하는 불평등 모두 불공정하며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결과가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상당한 물질적, 사회적 불이익을 받게 하고 이러한 불평등이 재분배 세금과 사회 복지를 통해 예방 가능하다면 이러한 상황이 명백히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 자신의 의견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불평등의 원인이 불공정한지 그리고 어떤 해결책이 정당한지를 직접 검토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국한해서 사회 정의의 문제를 논의했다. 이 문제는 국제적 규모에서는 훨씬 다루기 어렵다. 불평등의 정도가 막대하며 세계 정부의 부재로 인해 가능한 해결책을 찾기 어렵기 떄문이다. 세계 정부는 매우 끔찍한 정부가 될 개연성이 있기에 세계 정부에 대한 전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구적 정의의 문제는 존재한다. 분할된 주권 국가 체계로 이루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알기 어려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