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왜 미끄러운지 아직도 모른다고? - 네이버 블로그


도로살얼음이란 낮 동안 내린 눈이나 비가 밤사이에 도로의 기름, 먼지 등과 섞여 도로 위에 얇게 얼어붙은 것을 가리킵니다. ‘도로살얼음’은 그 얼음이 워낙 얇고 투명해 도로의 검은색이 그대로 보여서 검은색 얼음이란 뜻의 ‘블랙아이스’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도로살얼음으로 인한 사고는 많은 인명, 재산 피해를 낳습니다. 한국교통연구원이 2015∼2019년 교통사고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이로 인한 사고가 눈길에 의해 발생한 사고보다 1.8배 많고, 사망자 역시 3.7배 많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얼음 위를 지나가면 미끄러지는 걸까요? 얼음이 미끄럽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의외로 그 이유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한 노력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기 전, 사람들은 마찰력 때문에 얼음이 미끄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찰력이란 접촉하고 있는 두 물체 사이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힘을 말하는데, 바닥이 매끄러울수록 마찰력이 낮아집니다. 하지만 얼음만큼 매끄러운 대리석 위에서는 스케이트를 타고 달릴 수가 없어서 설명이 부족합니다.



압력 녹음 현상

얼음의 분자 구조 변화


1894년,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켈빈은 ‘압력 녹음 현상’을 주장합니다. 압력으로 얼음이 녹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물질은 압력이 높아질수록 녹는점이 높아집니다. 고체에서 액체로 변할 때 부피가 늘어나 분자간의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압력이 높아지면 분자들의 거리가 늘어나는 것을 억누르게 되어 녹는점이 높아집니다. 하지만 물은 반대로 고체가 될 때 부피가 늘어납니다. 고체로 변하면서 분자들이 속이 빈 육각형 구조를 이뤄 부피가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얼음을 통과하는 실


윌리엄은 이를 설명하기 위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실험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얼음 위에 실을 올려놓고 실에 무거운 추 2개를 매다는 것입니다. 추가 얼음에 압력을 가해 얼음의 녹는점이 낮아지고, 녹은 틈으로 실이 통과하는 것입니다. 실이 통과한 얼음 윗부분은 압력을 받지 않아 다시 얼게 됩니다. 신기하지 않나요? 이 논리대로라면 스케이트 날이 빙판에 압력을 가해 얼음이 물로 변해 미끄러워야 합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2005년 미국 로렌스 대학의 교수 로버트 로젠버그에 의해 반박되었습니다. 그는 얼음에 1기압의 압력을 가해봤자 녹는점이 고작 0.01°C만 낮아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영하 10°C 이하의 환경에서 얼음이 녹으려면, 2000기압 이상의 압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로버트는 몸무게가 68㎏인 사람이 스케이트를 신고 빙판에 선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일반적인 스케이트 날은 길이 30㎝에 두께 3㎜ 정도인데, 이것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두 스케이트 날이 얼음판과 닿는 면적은 18㎠입니다. 이것을 무게 68㎏의 사람이 누르면 얼음의 녹는점은 대략 –0.017도가 되는데, 이 정도의 녹는점으로는 얼음이 미끄러워질 수 없습니다.


마찰 녹음 현상

압력이 아닌 마찰열 때문에 표면이 녹는다는 대안이 나왔습니다. 1939년 영국의 과학자 보든과 휴스가 주장한 ‘마찰 녹음 현상’으로, 마찰에 의한 열로 물층이 생겨 미끄럽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론으로는 빙판 위에 가만히 서있어도 미끄러운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얼음이 녹지 않은 빙판 위에 사람이 가만히 서있어도 미끄럽기 때문입니다.



사전 용해

압력 녹음 현상과 마찰 녹음 현상은 결국 모두 얼음이 녹아 물층이 생긴다는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얼음 위의 물층 때문에 미끄럽다는 생각은 두 주장이 나오기 전인 1850년, 영국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가 제시했습니다. 바로 얼음 벽돌 실험을 통해서였는데, 흙으로 구운 벽돌 두 장은 서로 달라붙지 않지만, 얼음 벽돌은 쉽게 달라붙는다는 예를 든 것입니다. 이것은 실생활에서도 쉽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꽁꽁 언 얼음에 혀를 대본 적이 있나요? 순식간에 붙어버려 난감했을 것입니다. 패러데이는 그 이유를 얼음 표면의 물이 얼어붙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 현상을 ‘사전용해(premelting)’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원자나 분자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지 않았고 영하의 온도에서 물과 얼음이 공존하는 이유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얼음 표면 위의 물층

(Y. Furukawa, 「ELLIPSOMETRIC STUDY OF THE ICE SURFACE STRUCTURE JUST BELOW THE MELTING POINT」, HAL, 1987.)


그의 주장은 1세기가 지난 1987년 사실로 밝혀집니다. 후루카와 요시노리를 포함한 일본의 과학자들이 타원측정법을 사용했고, 이 과정에서 엑스레이로  얼음 표면의 물층을 촬영한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영하 1°C에서 1~94nm (나노미터, 10억분의 1m) 두께의 매우 얇은 물층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1996년 미국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의 과학자 가보 소모자이는 얼음 표면에 전자를 쏜 후 튕겨져 나오는 모습을 관찰해, 영하 148°C까지 전자는 액체인 물과 충돌했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를 통해 ‘표면 녹음 현상’을 주장합니다. 얼음 표면에 물층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후 미국 과학자 츄 등이 헬륨원자와 이온빔을 통해 실험을 했는데, 결과는 동일했습니다. 



얼음의 분자구조

그렇다면 어떻게 영하에서 물과 얼음이 공존할 수 있을까요? 얼음 분자구조의 모양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얼음은 수소원자 2개와 산소원자 1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즈 목걸이처럼 원자들이 연결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그런데 얼음의 끝부분, 즉 표면은 어떨까요? 아래는 얼음, 위는 공기라서 다른 물 분자와의 연결이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이 약한 결합 때문에 물층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층 때문에 미끄럽다면, 대리석 위에 물을 뿌려도 얼음만큼 미끄럽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에 2019년 11월 프랑스 파리고등사범학교 등 공동연구팀은, 얼음 표면의 물 분자 층은 일반적인 물과 달리 기름처럼 미끄러운 상태라는 것을 실험을 통해 증명합니다. 연구팀은 얼음 표면이 물체에 눌리면 그 충격으로 나노미터 크기의 작은 얼음조각들이 떨어져 나가 표피층의 물과 섞이고, 그 결과 물도 얼음도 아닌 ‘제3의 물체’가 되면서 점도가 높아진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실험 역시 제3의 물체의 실체를 완벽히 밝혀내진 못했습니다.



마이클 패러데이가 처음으로 물층 이론을 제시한 1849년에서 200여 년이 흐른 지금, 아직까지 얼음이 미끄러운 이유에 대해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얼음 표면의 얇은 물층으로는 미끄러움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반박도 나오는 등, 하나의 명확한 증거가 나오기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보입니다. 어떤 과학적 사실이 정립되기 위해선 많은 사람들의 의견 제시와 반박, 그리고 과학 실험들이 이어져야 한다는 과정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긴 여정은 ‘얼음은 미끄럽다’는 당연한 사실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사실의 이유를 찾아내고자 하는 과학자들의 노력이 대단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