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피폐물 채널


히어로의 시대.

특수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등장한 시대.

하지만 바꿔 말하면 히어로의 시대란 인류의 존망이 걸린 아슬아슬한 시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천재지변, 빌런, 괴수, 외우주의 재앙 등 여러가지 평범한 인간의 신체 능력과 보편적 수준의 과학기술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위기가 많기에 그것을 해결해 줄 능력이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믿음을 맡기는 시기.

그래, 나는 그 시대에서 최전선에 나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히어로들 중 하나였다.

나와 내 동료가 살아 있다는것은 인류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에 패배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래, 우리는 패배했다.

지금까지 존속해온 인류 번성은 쇠퇴의 길을 빠르게 내려왔다.

세상은 안개와 먼지로 가득차 아침은 회색이었고 밤은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한쪽 눈을 잃고 얼굴 피부가 타버려 왼쪽 눈부분을 제외하고 모두 붕대로 감쌌고 두 다리가 작살 나 휠체어에서 평생을 보내야 하며 한쪽팔이 없어 비율이 맞지 않는 기괴한 몸체가 된 지금도 몇 안 남은 인간들 사이에선 내가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것도 어제까지였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사람은 나와 내 휠체어를 작은 손으로 잡고 있는 어린 소녀 하나다.

작은 지진이 시작되면서 나는 이번에야 말로 끝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정말 노력했다.

그리고 지금도 이 망한 결말을 바꾸고 싶다고 강하게 느꼈다.

지금은 황량한 폐허가 된 회색의 서울 거리를 영혼 없는 눈으로 무감정하게 보며 아이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이번에는 너 하나 조차도 지키 못할거 같아."

계속된 패배와 더이상 움직이기도 힘든 내 몸은 나를 비관주의자로 만들었다.

여자아이는 아무말도 없었다.

그것과 상관 없이 난 마지막 남은 나와 같은 인간에게 마지막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너도 나를 쓰레기라 생각하겠지. 팔이 없고 다리도 없는 붕대 투성이의 무능한 어른이라고."

지진이 더욱 심해지면서 너덜너덜해진 내 근육으로는 움직일리 없는 어깨가 떨려왔다.

"어린 네게 밝은 세상이 어떤건지 알려주지 못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죽음은 나쁜게 아닐거야."

곧 나는 말실수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동료들의 무능으로 미래를 빼앗긴 소녀에게 진정은 못시킬 망정 이게 무슨 말인가.

아니지, 내가 작은 소녀 하나 안심 시킬 수 있는 인물인가?

아니, 그전에 일단 내가 이제 히어로는 맞는지 모르겠다.

점점 지진이 심해지면서 무너진 건물들의 콘크리트와 철근의 잔해들이 마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름도 모르는 소녀의 마지막과 나의 마지막이 곧 찾아온다.

그토록 바래왔던 죽음이지만 끝까지 편한 죽음 조차 선물해주지 않는 개새기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최후의 저항이라도 해보려고 온몸에 힘을 주어 보았지만 미약한 황금빛 광휘는 내 몸통조차 다 감싸지 못한체 극심한 근육통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뼈에 사무치는 근육통에 고통스러워 하면서 이젠 저항조차 시도로 끝날 뿐이라는 사실을 체감했다.

점점 더 지진이 심해지면서 곧 지반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젠 소녀의 힘으로는 휠체어를 안정적으로 지탱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소녀가 내 남은 한쪽 팔로 바퀴를 잡은 휠체어에 지탱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어차피 마지막. 후회라도 하고 싶었다.

"우리에게 좀 더 힘이 있었다면..."

어차피 마지막. 불평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니, 우리중 한명이라도 뛰어나게 강했다면..."

어차피 마지막. 불만이라도 늘어놓고 싶었다.

"들러리가 생겨도 좋으니 내가 만화 속 주인공이었다면..."

어차피 마지막. 의미 없는 소원이라도 빌고 싶었다.

"세상을 구하고 너도 구할 수 있었을텐데."

내 한쪽 눈에서 눈물이 붕대를 적셨고 붕대 속의 다른 한쪽 안구에서는 피가 흘렀다.

"진짜... 신님... 제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안될까요..?"

"그래.. 좋아. 기회를 준다면 나도 구할 수 있다는거지?"

비틀어진 미소의 여자아이가 휠체어에 올라타 내 어깨를 잡고 마주보며 말했다.

"널 쭉 지켜본 신으로서. 너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줄게."

지반을 뚫고 거대한 지렁이 같은 괴물이 괴성을 내며 곧게 올라왔다.

거대한 물체가 움직이며 일으키는 바람이 신이라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휘갈겼다.

여자아이는 내 투박한 상처투성이의 뺨을 손으로 어루 만지며 한쪽 눈에서만 눈물을 흘렸다.

"꼭이야. 나를 구원해줘야해."

어딘가 슬퍼보이는 표정을 끝으로 세상이 시꺼매졌다.

지렁이는 우리를 한입에 집어 삼켰다.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때 신이 나타나서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


'너가 내 딸이 선택한 마지막 인간인것이냐?"

아무것도 없는 온통 흰색의 공간. 아니 뒤에 뭔가 고풍스러운 거대한 신전이 있기는 했다.

나 처럼 빔도 쏘는 인간이 있는 세상에 뭐가 없겠냐마는 어디서 읽어본것 같은 장소와 아까부터 내게 말을 거는 여신이란 존재는 좀 너무.. 뇌절이었다.

이건 그거잖아. 그...

"지금 상황이 웹소설 같다고 생각하나보군."

내 생각도 읽는구나.

"당연하네. 그리고 자네가 이렇게 말했다고 들었는데. '만화 속 주인공 같이' 라고."

만화 속 이랬지 웹소설이라고는 안했는데.

"그 여자아이는... 아닌것 같은데."

"그 아이는 시간의 여신이자 시계의 여왕. 나, 크로노스의 미래의 딸이자 후계자라고 할수 있는 것이다."

"허..."

미래? 시간? 어이가 없다.

그런 신이 있었다면 시간을 멈추는 히어로였던 그녀를 왜 가만히 놔둔거야.

시공간을 어지럽히는 일등 공신이잖아.

"그녀의 능력은 내가 준 능력이니 딱히 상관 없지 않은가."

"뭐?"

"뭐. 자네 동료 이야기는 차차 하고. 이곳은 내 신전, '크로노'라네. 만나서 반갑네."

여신은 내 눈을 피하면서 얼굴을 긁적이더니 말을 돌렸다.

"우리의 가호를 받은 그대들이 우리 대신 인류를 지키는데 열심히 했다는 것은 알고 있네."

여신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크흠 거리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육감적인 몸매와는 다르게 어려보이는듯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 지나갔다.

"'우리 대신'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말 그대로일세. 우리는 인류를 수호해 온 존재라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죽기 직전인 상황이네.

그래서 우리 대신 인류를 지켜줄 존재로서 같은 인간을 선택했거든."

"그럼... 그 여자아이는 뭐야?"

"앞서 말했던거처럼 내 다음 세대의 여신이 될 아이였네.

아... 그러니까. 우리는 죽지만 다음에 이 역할을 이어받을 존재는 또 생기게 되어있네.

신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다시 신으로 말일세.

 물론 손쓸새 없이 인류가 멸망해버려 내 딸은 존재의 소멸을 각오해서라도 자네를 과거로 돌려보내기로 결심한거 같네만..."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게 말할 수 있지?

손쓸새가 없다고...?

너희의 역할을 우리가 이어가지 못했다는 뜻이라는건가.

아니면 우리가 멸망으로 몰리는데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모르는건가.

우리를 지켜온게 사실이라면 너희는 우리가 지옥으로 서서히 떨어지는 것을 방관했고 그 무고한 사람들을 지키지 않았던거야.

설령 멸망했더라도 우리를 지킨건 너희가 아니라 우리였어.

나와 동료들과 사람들은 정말 많은 노력을 했고 모두 원하던 원하지 않던 서로를 위해 희생했어.

하나가 되어 힘을 합쳤었어.

죽어가던 동료의 눈동자가 머리를 스친다.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눈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신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 가슴팍에 살며시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진정하게. 그런뜻이 아니었네. 자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

여신은 슬픔에 공감하는 듯한 표정으로 내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간단히 이야기해서 자네가 이해할 문제도 아니네. 현실은 잔혹한 법이니까."

여신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방금까지의 어렸던 모습은 없고 정말 여신같았다.

곧 여신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약만 얘기하겠네."

"우리도 자네들 처럼 실패했네."

날 똑바로 바라보는 여신의 눈동자 속에도 깊은 슬픔과 비장함이 담겨있었다.

"우린 이미 대부분이 죽었어."

"그 외계 생명체 때문이야?"

우리가 멸망한 이유.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괴성체怪星體.

"그래. 우리는 그 미재(謎災)의 전력을 최대한 깎아냈지만 똑같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할 존재가 성장할 때 까지 우리의 권능을 너희 인간들에게 맡기기로 결정했어."

이럴 수 가 그 괴물들이 이미 치명적으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고..?

아니지... 그렇다는 것은...

역으로 그들이 그렇게까지 우리를  몰아붙일 수 있었던 이유가...

"그래. 정보의 불균형이었지. 그들에게 우리와 같은 능력을 가진 자네들은 이미 한번 경험해본 익숙한 존재라는거야."

여신이 손뼉를 치자 허공에서 금으로 된 회중시계가 나타났다.

"이때는..."

연도와 월, 날짜까지 침으로 나타나 있어서 아주 복잡한 시계는 2022.12.31 21:20:35에서 초단위로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 '이때는'이 아냐. 자네는 과거로 돌아온거야. 시간의 여신인 나는 미래를 볼 수 없네. 하지만 미래의 내가 소멸을 각오하고 보낸 메시지는 읽을 수 있지."

나는 저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처음 능력을 얻게 되기 하루 전날.

여신은 한숨을 쉬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도 실패는 처음이네."

"놈들이 우리를 학습할것이라는 사실은 생각하지도 못했어."

"거기다가... 남은 신들의 영면까지 얼마 안남았네.
앞으로 2시간 38분 57초 안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같은 미래가 반복될거야."

다시한번 그 수순을 밟게 된다는 사실은 나를 공포에 적시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졌다.

"걱정하지말게."

여신은 그런 나를 진정시켜주었다.

"자넨 히어로 아닌가. 언제나 다시 일어서는 영웅."

"...이미 우린 실패했는걸..."

여신은 슬픔에 찬 손길로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럴리가. 자네들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달라.
우린 실패 했고 결과적으로 또 실패했네.

하지만 자네는 끝까지 포기 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

부숴지고 찢어지고 꺾인 그 만신창이의 몸으로도,
포기 하지 않는 의지를 미래의 딸에게 알려준것은 자네가 아닌가."

여신은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와 한층 더 가까운 거리에서 미소를 지어보이며 조용히 속삭였다.

"모든것을 지켜보며 일찌감치 비관에 빠져 소멸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를 설득시킨 것은 자네일세.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낸 것은 그대라는 말이야."

...

묻고 싶은게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여신은 그런 내 생각을 읽고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 입에 손가락을 올렸다.

"다 설명하기 시작하면 24시간도 부족하네."

"우리의 무능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자네들에게 떠맡긴것도 미안하지만 지금은 사과할 시간조차 부족해."

여신은 내게 제안했다.

"나는 신이지만 동시에 왕이기도 하네. 신은 항상 전지전능하여 최고의 선택을 해야하지만, 왕은 최악이더라도 최선의 결단을 내리는 존재."

여신이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각 면에 물음표가 그려진 정육면체가 나타났다.

"아마 다른 신들이 이 사실을 알면 무조건 반대하겠지만—"

여신의 눈에 담겨 있던 자애는 어느새 느껴지지 않았다.

비장함과 결심만이 굳혀져 있는, 마치 성가신 윤리 문제를 무시하는 결정을 할때의 새까만 느낌이었다.

"—자네는 분명 들러리가 생겨도 괜찮다고 했었지."

여왕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녀는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 –아주 이기적이며.

냉정하고

희생만을 강요하는

그런 영웅주의의 본질일세. "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하기를.

"시간의 여왕으로서 그대에게 제안하지."

"권능을 빼앗을 수 있는 수단을 주겠네."

"지나간 세계선에서 함께 싸워온 자네 동료들을
죽이고 굴복하고 타락시켜서.
권능을 모조리 빼앗게."


"권능은 한곳으로 모일 수 록 강대해진다네.

최종적으로 세계는 권능이 모두 모인 자네를 분해시켜 버리겠지.

배드엔딩이 정해진 결말을 끌어안고 자네 혼자 초월자가 될 수 있겠는가?"

'동료들'
그 단어가 심장 깊은곳에서 메아리치듯 울렸다.

나는 내게 남은 마지막 영혼을 부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대답했다.

"할 수 있어."
"어차피 모두 희생당할 미래니까."

나는 계약의 증거로서 여왕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그녀의 손에 있던 반지는 지금 이 계약을 기억하려는 듯이 밝게 빛났다.

여신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랜덤박스에 반대쪽의 손을 넣었다.

랜덤박스가 띠리리링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따란! 같은 소리를 내며 폭죽을 터트렸다.

여신이 박스에서 손을 빼자 내 앞에 게임의 상태창 같은게 나타났다.
게임과 관련된 능력인건가. 정말 웹소설 같다.



그런데 게임 같은 상태창이 생긴채로 한번 회귀하는것은 웹소설 주인공처럼 사기가 될거 같기는 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분명 여신은 권능을, 그러니까 우리의 능력을 빼앗을 수단을 주겠다고 했는데 이게 능력을 빼앗을 수 있는 수단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그 의문은 풀렸다.

갑자기 띠링–! 소리가 나면서–

[SYSTEM : '유혹하는 자'의 가호를 받습니다.]

–이런게 떴다.

유혹하는 자?

설마가 무섭게 시스템창이 렉이라도 걸리는게 아닐까 싶을정도로 무수히 많은 띠리리링 소리가 미친듯이 울리면서 촤르르륵 팝업이 떴다.

띠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링링링!

[SYSTEM : 종속의 음문(1Lv)이 활성화 됩니다. 각인된 상대는 모든것을 당신에게 바치게 됩니다.]
[SYSTEM : 연기(1Lv)이 활성화 됩니다. 당신의 진심을 가늠하기 어려워집니다.]
[SYSTEM : 약물 생성(1Lv)이 활성화 됩니다. 체액이 특수한 효과를 가지게 됩니다.]
[SYSTEM : 신체개조(1Lv)이(가) 활성화 됩니다. 상대나 본인의 신체를 변형할 수 있습니다.]
[SYSTEM : 무감정(1Lv)이 활성화 됩니다. 당신은 상대의 감정에 공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SYSTEM : 감정조종(1Lv)이 활성화 됩니다. 상대에게 어떤짓을 해도 행복을 느끼게 만듭니다.]


이건... 악마가 생각나는 세팅들이다.

[SYSTEM : '타락한 자'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신성한 존재들은 당신의 마음을 읽지 못합니다.]

[SYSTEM : 종족변경 '악마'가 되었습니다. 종족특성으로 상대의 의지가 눈에 보입니다.]


그래, 나는 악마가 되었다.


*****

이런식으로 시작해서 우울하고 자극적인 소설 쓰고 싶은데 어떤거 같음?

상태창은 좀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