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고 해도'의 설정을 가져왔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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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하게 부서지는 노을빛을 배경삼아, 한 여자애가 말했다


1. 방과 후까진 서로 아는 척 하지 않기

2. 연락은 되도록이면 짧게 문자는 안봐

3. 이 연애는 진짜가 아닌 가짜라는걸 명심하기.

어때 할 수 있겠어?


그 질문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응" 이라고 대답했다.


***


흔한 이야기다. 반에 누구나 한명씩은 있는 왕따가 된 이야기.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가 버렸다는 배경은 일진 무리들의 관심을 끌 좋은 소재였다.

구타는 기본이었고, 돈을 뺏기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괴롭힘이 지속되던 어느날, 날 괴롭히던 일진 무리 중 하나이던 송민우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너 저기 있는 여자애한테 고백하고 와 그럼 앞으로 안괴롭힐게."


손 끝을 바라보니 무언가를 끄적이는 한 여자애가 있었다.

포근하게 내리쬐는 햇빛은 그 애가 가진 외모를 더욱 부각시켜주는 듯 했다. 저런 외모를 가졌음에도 그녀의 주변에는 단 한 명의 학생도 없었다.

학기 초에는 그래도 꼬이는 사람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마다 싸늘하게 대꾸해서 애들 사이에 싸가지가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학교 걷다보면 저 애를 욕하는 학생들이 열에 한 두명은 있을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외모는 이뻐서, 남자 애들의 고백을 많이 받았었는데 그때마다 고백한 남자애가 울면서 도망친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변에 얼마 없는 애들도 다 없어져버렸다.


아마 그 소문 때문에 이런 장난을 시키는 것이겠지.

참으로 유치한 장난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저항 할 수 없다. 나는 이들의 장난감일 뿐이니까.


방과 후, 학교 뒤편으로 그녀를 부른 뒤 숨어있는 일진들의 감시하에 명령을 받은대로 이행했다.


고백을 받은 그 애의 눈은 잠시 커지더니 이내 싸늘해졌다.


이제 욕 먹을 시간이구나.


"그래 좋아."


......어?


 예상의외의 답변이 나오자 나도 일진들도 당황한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반응이 왜 그래? 너가 사귀자며."

"아니 그건 맞는데.."

"내가 니 고백 받았으니까 사귀면 되지, 근데 조건이 있어."


조건? 무슨 돈이나 학력같은 걸 요구하려는 건가


눈 앞에서 그 애가 손가락을 하나씩 들며 조건을 제시했다. 

나는 이 애를 잘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한수영'이라는 이름뿐.

여기서 내가 "사실 장난 고백이었어."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왜 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조건이 끝나자 나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응"


내가 생각한 대답과 다른 대답이 나왔다.


"그럼 내일부터 사귀자고 그리고 조건은 비밀이야 남한테 말하면 뒤진다."

"어..알겠어."

"내일 봐 방과후에."


할 말 다했다는 듯 미련 없이 멀어져가는 한수영을 보며 숨어있던 일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시발 소문이랑 완전 딴판인데?"

"아 썅 저년 존나 이뻤는데 내가 할껄."

"닌 백퍼 차일 듯."


저급한 말을 내뱉으며 일진들은 나에게 걸어왔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마른 침을 삼키며 나는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일진들이 나에게 도착했을때, 송민우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조소를 머금었다. 


"독자 완전 상남자네? 진짜 하라고 한다고 해버리네."


안 그랬으면 여기에 서있지도 못하고 누워서 맞기만 했어야 할테니까. 


"약속은 약속이니까. 이제 안괴롭힐게."


퍽이나 믿겠다 시발아.


"대답."

"고,고마워."

"진작 그럴것이지. 난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뺨을 툭 건드린 그는 무리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뒷편에서 서있던 나는 고민에 빠졌다.

지금이라도 한수영한테가서 거짓이었다고 말해야 할까.

하지만 이미 "응"이라고 대답해버려서 거짓이었다고 말하기엔 껄끄러웠다.


오해를 푸는건 내일 해도 늦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기분탓이었을까, 늘 똑같던 거리가 오늘따라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고등학교 2학년 4월 1일. 거짓말로 시작한 이 관계는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


다음 날. 평소와 같이 학교 복도를 걷던 도중 멀리서 한수영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는데, 무언가를 열심히 읽고있었다. 액정에 떠오른 텍스트를 꼼꼼히 읽는 그녀의 모습은 무언가 프로페셔널하게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인기척이 느껴진 탓인지, 한수영의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한수영의 고양이 같은 눈에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수영을 부를 뻔했다.


"저...."


그러나 한수영은 나를 보지도 않은 채, 옆으로 슉 지나가버렸다.


멋쩍게 뻗은 손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고보니 어제 한수영이 말했던 첫번째 규칙이 떠올랐다.


1. 학교에선 서로 아는 척 하지 않기'


설마 그것때문에 무시한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묘하게 서운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나는 내 반으로 걸어갔다.


***


종례가 끝나고 학생들은 다 왁자지껄 떠들며 자신의 일정을 위해 반을 나서고 있었다.

어느새 반에는 나와 한수영 둘 만이 있었다.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며 한수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각 거리는 발걸음이 들렸다. 서두르지도, 느리게도 않은 속도의 걸음걸이로.

묘하게 느껴지는 긴장과 함께 나를 향해 다가오는 한수영.

그녀는 서슴없이 내 앞자리에 다리를 옆으로 모으고 앉았다.

앉으면서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미안 다 가는거 기다리느라 말을 못걸었네. 내 남자친구 그러니까 김독자 맞지?"


남자친구...... 왠지 양심에 찔렸지만 사실이긴 하니까.


"어,응 맞아."

"살짝 어벙하게 생겼고, 너드같은 성격에...."

"어?"


한수영의 중얼거림에 난 바보같이 되물었다.

성격 괴팍하다는 소문은 사실인거 같다.

저런 말을 당사자 앞에서 하다니. 사실이라 딱히 반박은 못하겠지만.


"방과 후에 만나자고 했는데, 어차피 같은 반이라서 장소는 딱히 안 말했어. 다행이야 너가 동아리가 없어서 다른 곳으로 안가도 됐으니까. 찾아다니는 거 귀찮거든."

"어,어 그래."

"그래서 사귀기 전에 몇가지 물어보고 싶은데 괜찮지?"


올게 왔다. 나는 한수영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그런 나를 보며 한수영은 가벼운 한숨을 내뱉었다.


 "연애하면서 이상한 조건 거는거 이상하게 보이는 거 알거든? 그래서 취소하고 싶으면 취소해. 그런거 마음에 담아둘 사람은 아니라서."


나는 아직도 고민 중이다. 이 애에게 그 고백이 거짓이었다고 말할지 안말할지.

잠시동안 고민하다 대답을 정해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그 고백 말이지...."


나는 결국 그 고백이 거짓이었다고 말했다. 일진들이 너에게 고백을 하라고 했고 어쩔 수 없이 고백을 했다는 찌질한 이야기.

기분이 상하겠지 싶어서 살그머니 한수영의 눈치를 살폈는데, 한수영은 딱히 상처받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 뭐 예상은 했어. 한번도 말 안 걸어본 애가 대뜸 찾아와 좋아한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

"그건 맞지.."

".....넌 내가 싫어?"

"어...? 아,아니 그건 아니야."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저번처럼 똑같이 어벙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한수영은 작게 미소지었다. 


"어차피 마지막 조건에 가짜 연애라고 해놨잖아. 어차피 진짜도 아니고 헤어지면 또 그 일진 새끼들이 괴롭힐텐데."

"그렇겠지."

"그럼 이대로 연애하는 척하면 그 새끼들도 괴롭히진 않을 거 아니야."

"근데 넌 괜찮아?"


너도 타깃이 되면 어떡하려고.

뒷말을 삼켰다. 아마 이 애도 알고 있을테니까.

그런 내 모습이 어이가 없었는지, 한수영은 방금보다 크게 웃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냐 멍충아.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재밌을 거 같기도 하고. 어때?"

"...그래 좋아."

 

사각형으로 잘려진 하늘과 그가 주는 바람에 풍겨오는 봄 내음. 

그날을 기점으로 우리는 정말로 연인이 되었다. 

그 누구도 모르는 작은 비밀을 간직한 채로. 


***


작가 후기 : 영화보고 한번 써보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한번 써보게 됐음.

글 쓰는거 너무 오랜만이라서 이상하게 보일 수 도 있어

+) 조건 2번째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