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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오는 바람에 앞서가는 한수영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나는 인상을 쓰며 천천히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직도 빨간 귀가 눈에 띄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한수영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뭘 꼬라봐?"


"왜 시비야? 그냥 머리카락 넘기는거 보고 있었는데."


"그걸 왜 보고 있는데."


"내 시선이 마침 거기 있어버렸네. 근데 너 덥냐? 바람이 좀 차가운데."


"아니? 그건 또 뭔 소리야."


"그냥. 아까부터 너 귀 빨간 것 같아서."


"미친놈... 그만 훔쳐보고 빨리 걷기나 해."


"집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 좀 가자."


"왜?"


"아이스크림 좀 사려고. 진짜 너 더워보여."


"그런거 아니야. 근데 아이스크림은 맛있겠다. 너가 사는거지?"


그럼 왜 그런건데.

나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딸랑-


편의점 문이 열리며 청아한 종소리가 났다.


"뭐 먹을래?"


"난 스크률바."


나는 집에 있을 아이들과 곧 있으면 각자의 직장에서 퇴근할 동료들 것까지 모조리 담아 계산대로 가져왔다.


"157 코인입니다. 원화로 내시겠어요?"


"아니요, 코인 결제 할게요."


내가 주머니를 뒤적이는 동안, 한수영이 옆에 서서 담배를 주문했다.


"딥 다크 라이트 한 갑도 주세요. 얘가 계산할거에요."


"너 담배 좀 그만 펴. 진짜 폐 썩는거 아니야?"


"안 썩어. 가지고 나와."


"담배까지 해서 170 코인입니다."


나는 캐셔에게 코인을 지불하고 아이스크림의 포장을 까 들고 나갔다.


"여기."


"땡큐. 담배도 줘."


나는 초코 맛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먹으며 한수영에게 담배갑을 건넸다.


"여기서 좀만 있다 가자. 다 먹고 한 대 피우게."


"옷에 냄새 배잖아. 혼자 피고 오던지."


"좀 있어줘라. 혼자 집 들어가기도 애매하잖냐."


"아이스크림 녹겠다. 언제부터 그런거 신경썼다고."


"냉각 마법 걸어놨어. 너도 먹고 들어가."


손에 들고있는 비닐봉지가 차갑게 굳는게 느껴졌다.

나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어느새 딸기 아이스크림을 먹어치운 한수영은 손에서 검은 불꽃을 피워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검은색의 연기가 밤하늘을 더 새까맣게 물들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한수영과 눈이 마주쳤다.


"너도 피울래?"


나는 말없이 손을 뻗었다.


"웬일이야. 이거 냄새 독하다고 싫어하잖아."


"아이스크림도 다 먹었는데 뭐하겠냐."


한수영은 피식 웃으며 다시 불을 붙였다.

한 층 더 새까매진 연기가 우리의 눈 앞을 가렸다.

힘들게 기침을 내뱉은 나는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수영은 입을 열었다.


"하아... 인생 힘들다. 그치."


"너 오늘 상태 좀 이상하다. 시나리오 때도 그런 말 안하던 애가."


"그런가. 나도 모르겠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한수영을 쳐다보았지만 담배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재로 만들어버린 한수영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이 담배 연기를 걷고 집을 향해 걸어갔다.

나도 따라나섰다.


"얘들아 나 왔다!"


"수영 언니! 어, 아저씨랑 같이 오셨네요?"


"어. 같이 저녁 먹고 왔어."


"독자 형이 누나랑요? 갑자기 왜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너넨 저녁 먹었냐?"


"네! 길영이랑 집에서 먹고서 다 치웠어요."


"그래. 나 오늘 일찍 잘거니까 깨우지 마."


한수영은 금세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아이들에게 건네며 그녀가 남긴 검은 잔상을 올려다보았다.

.

.

.

"...이게 진짜 독자 목소리라고?"


나는 방금 JUS 삼인방과 그 외 회사 관계자들 앞에서 노래를 했다.

진짜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엘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랐다.


"뭐야! 엄청 잘 부르잖아! 하여튼 독자는 너무 겸손을 떤다니까?"


"솔직히 저음은 내가 더 낫다. 안 그러냐 오공?"


"아니, 막내의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흠잡을 곳이 없었다. 우리엘 말대로 잘 부르는 것이 맞다."


구석에 기대어 내 노래를 듣던 한수영은 등을 떼며 말했다.


"김독자는 준비 다 된 것 같네. 이제 사흘 밖에 안 남았으니까 다들 더 열심히 준비하자."


"알겠어! 공연 날 보자, 독자야."


"네. 연습 열심히 하세요."


"김독자 콘서트 날에 오늘처럼 안 부르면 죽는다!"


"너나 잘해! 이제 염룡이 리허설 한 번 보자."


"아 또 해?"


"잔말 말고 마이크 들어."


여전히 티격태격하는 성좌들을 뒤로 하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내가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나는 노래의 마지막 소절을 되뇌이며 집으로 향했다.

.

.

.

공연 전날이었다.

한수영이 저녁에 내 방으로 와서 대략적인 계획들을 설명해주었다.


"이벤트 무대는 3부 시작에 하고 앵콜 무대로 끝내니까 시간은 좀 있어. 의상은 네 코트 입고 오면 되고, 자세한 건 무대 올라가기 전에 스태프들이 다 체크해줄거니까 부담 안 가져도 돼. 노래는 그저께처럼만 해라. 제발."


"나도 모르겠다. 그날 엄청 못한 것 같았는데."


"아니야. 듣기 좋았어."


"그러면 다행이네."


"오늘 일찍 자고 아침 8시에 집 앞으로 밴 오니까 대기하고 있어. 늦잠 자면 계획 다 꼬인다."


"알겠어."


"그래 그럼. 잘 자."


한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숨에 내 방을 나갔다.

저 녀석도 힘들겠지.

이번 월드 투어가 끝나면 밥이라도 한 번 사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방에 방음 마법을 걸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연습이라는 생각으로 노래를 재생했다.

.

.

.

또 그 꿈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것이 흐릿했다.

그러다가 한수영의 흑염이 폭발하는 순간,


"야 씨발 일어나!"


"어?"


눈을 뜨니 실제로 일렁이는 흑염이 보였다.


"내가 8시에 밴 온다고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지? 지금 몇 시인줄 알아?"


나는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확인했다.


[AM 6:30]


젠장, 늦었....지 않잖아?


"뭐야?"


황당한 표정으로 한수영을 올려다보니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나의 아침을 깨웠다.

그녀도 아직 잠옷 차림이었다.


"그냥. 좀 일찍 일어나라고 손수 모닝콜 해준거잖아."


순간 백청강기를 한 대 먹일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래, 참 고맙다. 씻을거니까 좀 나가."


인상쓰는 나를 남겨두고 한수영은 내 방에서 나갔다.


욕실에서 나오니 한수영도 이미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준비 다 했으면 나가자. 밴 좀 일찍 도착했대."


현관문 앞에 검은색 차량 한 대가 서있었다.

운전석에서 이현성이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현성 씨? 왜 여기 계세요?"


"오늘 독자 씨와 수영 씨의 모든 경호는 제가 책임집니다. 우리엘이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중에 자기 몸 하나 간수 못하는 사람이 어디있다고."


"왜 그래? 난 편안하기만 한데. 빨리 타. 일찍 가서 리허설 한 번 하자."


차에 올라타니 내부는 작은 회의실 같았다.

한수영은 재빠르게 서류 뭉치를 꺼내더니 빨간색 펜으로 여기저기 별표를 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멈춰서고 이현성이 문을 열어주었다.


"도착했습니다."


그와 한수영을 따라 대기실로 들어가니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우리엘은 문자 그대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흑염룡은 특유의 암흑을 온 몸에 둘렀지만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제천대성은 도복이 아닌 웬 수트 차림으로, 한층 풍성한 머리로 나를 반겨주었다.


"김독자 어서오고!"


"독자야 왔어? 오는데 불편하지는 않았고? 잠은 좀 잤지?"


"얘 내가 깨워서 겨우 일어났어. 잡담은 다 끝나고 하고 준비 시작하자. 리허설 하게 올라와."


한수영은 자리에 한 번 앉지도 않고 무대 쪽으로 걸어나갔다.

우리엘과 흑염룡, 제천대성도 그녀를 따라나섰다.


"독자 싸. 이쪽으로 앉으세요."


핑크색으로 염색한 이설화가 커다란 메이크업 박스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잘 부탁드려요."


"원래 얼굴이 좋아서 저는 그냥 색칠 좀 하는 정도에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브러시와 마스크팩이 몇 번 왔다갔다 하는 듯 싶더니 20분도 채 안되어 메이크업이 완료되었다.

커다란 거울로 본 나의 모습은, 분명히, 유중혁의 뺨을 칠까 말까 고민할 수준이었다.


"근데 오늘 유중혁은 안 와요?"


"음... 저도 잘 모르겠네요."


생긋 웃으며 메이크업 박스를 정리하는 이설화가 모를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자신의 배우자인데.

이거 뭔가 불안한데.


"격하게 움직이면 메이크업 효과 떨어지니까 가만히 앉아계세요. 곧 있으면 독자 씨도 리허설 시작하실거에요."


"네. 감사해요."


나는 대기실의 모니터로 보이는 우리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발랄하게 윙크하는 그녀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내 배후성 진짜 이쁘죠? 나도 설화 씨한테 메이크업 받으면 저렇게 될 수 있으려나."


"희원 씨. 오늘 무대 올라가시나요?"


"제가요? 그럴리가요. 오늘은 공연장 외부 경비 담당이에요."


"아쉽네요. 노래 잘 하실 것 같은데."


"전혀요. 독자 씨가 더 잘하실걸요. 우리엘한테 들으니 완전 에덴 성가대 수준이라는데."


"하하. 과대평가 받았네요."


"아무튼 힘내요. 떨지 말고."


"네. 희원 씨도 힘내세요."


정희원은 내 어깨를 가볍게 치고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김독자 소멸까지 

1087일 14시간 19분 26초]


분량 조절 대실패...

콘서트는 다다음화까지 이어질 것 같습니다.

2주마다 [선배] / [독자의 1년] 중 하나 랜덤으로 올라옵니다.

추천은 글 쓰는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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