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벽을 넘은 자'는 이질적인 스킬이었다. 


그는 제 의사를 표현하고, 시나리오에 개입했다.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허물고, 타인의 이야기를 고쳐 썼다. 


그것은 최후의 벽의 파편조차 불가능한 일. <스타스트림>의 신이나 다름없는 도깨비왕에게 허락된 권능조차 능가하는, 가히 초월적인 힘이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론, 도깨비왕을 능가하는 존재는 <스타스트림>에 단 한명뿐이다. 


- 가장 오래된 꿈


하지만 나는 얼마 안 가 그 가설을 포기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 가장 오래된 꿈은 모든 세계를 공평하게 들여다봐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 어길 시, <스타스트림>은 붕괴한다. 천년 동안 내 말동무를 자처하며 곁을 지킬 수 없단 소리다. 



게다가 내가 빙의했을 땐, 유중혁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어떤 독자가 읽겠나. 


이런 연유로 나는 진작에 '벽을 넘은 자'가 누구인지 추론하는 것은 진작에 관두었다. 다만, 벽을 넘은 자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가?'는 또 별개의 문제였다. 


'그것은 신뢰의 문제다.'


그는 내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제멋대로 행동했으나 덕분에 목숨을 구했고, 틈만 나면 무질서한 문장을 늘여놓았으나 덕분에 삶이 지루하지 않았다. 


그러니, 고작 스킬일 뿐이지만 내가 녀석에게 느끼는 감정은 꽤 각별했다. 그래서 녀석에게 기회를 줬다.


반론할 기회를.


'그동안 내게 보인 호의는 전부 기만이었나?'


내 사고에 녀석이 격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츠츠츳! 


강한 스파크가 실내를 어지럽혔다. '은밀한 모략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맨손으로 스파크를 쳐 냈다. 


【답변이 거칠군.】


그러나 나는 은밀한 모략가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릅뜬 눈으로 내게만 보이는 글귀를 응시했다. 


「아 니 야.」


벽을 넘은 자가 말하고 있었다. 


「기 만 이아 니야 어째 서 ■■■을 아는 지나 도 몰 라」


급히 휘갈긴 듯한, 마치 어린아이의 낙서같은 활자들. 가독성이라곤 전무했으나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기 억 나는 건오 직 한가 지 소망 뿐」


그리고 마침표가 찍혔다.


「벽 을 넘 어 라.」


츠츠츳! 


스파크가 잦아들고, 이내 간접메시지가 전송됐다. 


['벽을 넘은 자'가 자신의 진심이 닿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 . . . "


전에 없었던 간곡한 부탁. 만사가 제멋대로인 녀석과 어울리지 않는 메시지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쩌면 저 녀석도 혼자가 되는 걸 무서워하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을까. 외로움에 사무쳐 '복실이'라 이름 붙인 강아지를 껴안고 잠든 유년기의 나처럼.


['벽을 넘은 자'가 대답을 기다립니다.]


내가 침묵을 고수하자, 녀석이 초조한 듯 메시지로 독촉했다.


. . . 그래도, 나는 아직 녀석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나를 향한 호의는 진심이지만, 그것이 필터링이 해금된 이유를 설명할 순 없으니까. 


냉정해야 한다. 분명 그래야 되는데 . . . 


['벽을 넘은 자'가 대답을 기다립니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벽을 넘은 자'와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그가 나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걸었을 뿐,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특이한 스킬이구나 라고 여기며 필요할 때만 녀석을 찾았지. 


요컨대, 소통 부족이었다. 


그게 원인이라면 앞으로 관계를 더 개선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한번 믿어보기로. 


'더 숨기는 건 없지?'


['벽을 넘은 자'가 손사래를 칩니다!]


'너 손 없잖아.'


['벽을 넘은 자'가 시무룩해합니다.]


하여튼, 은근히 잘 삐진다니까. 나는 실소를 흘리며 의사를 전달했다.


'우리, 좀 더 솔직해지자.'


['벽을 넘은 자'가 알겠다고 말합니다.]


흔히 '화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



쨍한 햇볕이 내리쬐는 서울 한복판, 41회차의 신유승이 몸을 웅크린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변을 거닐던 화신들은 목석처럼 굳은 신유승을 발견한 즉시 고개를 홱 돌리거나 부리나케 도망쳤다.


"재, 재앙- "

"쉿. 닥치고 눈깔아."


" . . ."


익숙한 래파토리였다. 저들의 머리속엔 '범람의 재앙'으로서의 신유승이 깊게 각인되어 있으니까.


무릇 생사의 기로에서 인간이 느낀 공포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 저들의 머릿속에서 41회차 신유승은 아직도 재앙이었다.


그리고 본인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의 냉담한 눈길도 담담히 감내했다. 결국 자신이 안고 가야 할 짐이었으니까. 


-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 또 시작이다.'


내면에서 속삭이는 목소리. 그것은 선악과를 먹은 대가였다. 내면의 '악'이 신유승을 귀를 간지럽혔다.


- 이미 엎지른 물을 다시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해?


눈앞에서 파노라마가 스쳐 간다. 피로 얼룩진 장면들에서 그녀는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죽이고 있었다. 


기나긴 기다림에 지쳤다는 것도, 복수에 눈이 멀었다는 것도, 전부 변명에 불과했다. 이유가 뭐가됐던, 그녀가 화신들을 학살한 과거는 변치 않는다. 


문득 신유승은 자신의 첫 번째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품에 안긴 나의 사랑스러운 강아지. 그 아이를 목졸라 죽인 날은 '복실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지 정확히 1년이 경과한 날이었다. 


자신의 기원에서부터 필름을 다시 재생했다.


바꿀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선악과가 속삭였다.


- 속죄도 기만이었다. 나는 바뀌지 않았다. 


'끊임없이 죽이고, 죽이고 . . . '


- 그러다 결국 혼자 남았지. 


'아니야. 이 세계선의 동료들은 아직 살아 있어.'


- 그들이 정말 내 동료인가? '이 회차의 나'의 동료가 아니라? 


'. . .'


- 결국, 나는 혼자다. 고독하고 이기적이다. 그런 내가, 정녕 두 번째 삶을 영위할 자격이 있을까? 


호흡이 거칠어진다. 결국 혼자라는 문장이 가슴을 아프게 파고든다. 작은 돌맹이에 고요한 호수가 요동치듯 그녀의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주먹을 꽉 움켜쥔 신유승이 심란한 정서를 억센 발음으로 표출했다.


" . . . 닥쳐."

"뭐,뭣?"


다만, 그녀에게 다가가다가 난데없이 닥치라는 말을 들은 한명오는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신유승이 펄쩍 뛰는 중년을 응시했다.


"당신은?"


놀란 것도 잠시, 진정한 한명오가 헛기침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크흠, 한명오라고 부르게. 이렇게 보여도 마왕님의 사위지."

" . . . 당신이?"


'내까짓게?'라는 뜻이 담긴 물음. 회사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가장 잘난 인맥을 동원했으나 오히려 역효과만 나버렸다.


한명오가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 반응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안 드나? 하여튼 요즘 세대는 웃어른을 공경할 줄 모른 -"


거기까지 말하다가 멈췄다.


사실 정신연령으로만 치면 아스모데우스와 동년배인 그녀 앞에서 나이를 운운하는 게 우스은 일이었다. 


. . . 그냥 말을 말자. 


아이스 브레이킹 따위 집어치운 한명오가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등 뒤에 짊어진 보따리를 풀자 아이템이 우르르 쏟아졌다.


신유승이 어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건?"

"자네에게 필요한 것들을 좀 챙겨 왔지."


신유승이 아이템을 살폈다. 딱 봐도 매우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회복용 아이템이었다. 


"이걸 다 어디서 . . ."

"독자 씨가 줬네. 코인은 마왕님이 지급하셨고. 자넬 챙겨 주라고 부탁하신 분도 마왕님이야."


한명오가 잡상인처럼 아이템의 기능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정신적 충격 완화, 정신적 고통 감쇠 등등. 전부 선악과의 부작용을 염두에 뒀다는 게 확 티가 났다.


그 호의가 고마우면서도, 신유승은 선뜻 받지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락을 매만지다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 . . 이런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어."


흐릿한 사위에 재앙이 휩쓸고 간 서울 한복판이 걸렸다. 쑥대밭이 된 주변. 잘게 조각난 콘크리트 더미엔 치열한 사투를 방증하듯 붉은 혈은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침울해하는 모습에 한명오가 한숨을 내쉬며 신유승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내뱉은 것은 가식 없는 이야기였다.


"쩝, 그런 식이면 나도 자격이 없는데 말이지."

"뭐?"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나는 과거에 인간 말종, 그 자체였네."


악덕 상사 한명오. 

유상아의 자전거를 훔친 한명오.

김독자의 뒤통수 떼릴 궁리만 하던 한명오.


하나같이 부끄러운 과오이자,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과거였다. 신유승이 살짝 질린 눈으로 한명오를 바라봤다. 


"지금은 . . . "

"물론 지금은 아니지. 개과천선했네. 딸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될 수는 없으니까."


한명오의 시선이 유미아와 함께 차상경을 놀리고 있는 한다름에게 머물렀다.


"아저씨는 왜 머리가 없어염?"

"태양이다! 태양!"

" . . . 이 쥐방울 만한 것들이! 마구니가 꼈구나!"


분노한 차상경이 법봉을 휘둘렀으나 두 아이는 가볍게 몸을 피했다. 꺄르륵 웃던 한다름이 아빠를 발견하곤 우다다 달려갔다.


"아빠! 저 아저씨가 나 괴롭혀!"


제 품에 쏙 들어와 악을 쓰는 한다름의 모습에 한명오가 곤란하다는 듯 식은땀을 흘렸다. 반인반마라 그런가. 어째 싹수가 노란 듯싶었다. 


뒤늦게 쫓아온 차상경이 중얼거렸다.


"조심해라. 빠지는 덴 순서 없으니."

"그게 애한테 할 소리야?!"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한숨을 내쉽니다.]


차상경과 한명오가 투닥거리는 사이, 한다름은 신유승에게 매달렸다. 그녀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신유승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쁜 언니다!"

"나 . . . ?"

"응!"


높은 텐션에 신유승이 곤란해하든 말든, 한다름은 그녀의 신체의 일부가 된 털에 볼을 문질렀다.


"부드러워! 언니 혹시 강아지야?"

"뭐?"


차상경을 돌려보낸 한명오가 한다름을 안아 들었다.


"미안하네. 애가 워낙에 기운이 넘쳐서. 다름인 이따 아빠랑 놀자. 지금은 언니랑 할 얘기가 있단다. 이해해주겠니?"


"치. 이번만이야."


그리고 쏜살같이 유미아에게 달려가는 한다름을 한명오가 흐뭇하게 바라봤다. 화목한 부녀. 신유승은 한명오가 달라진 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명오 . . . 아저씨?"

"편하게 부르게."

"한명오 씨.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는 . . . 저 아이야?"

"그렇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가 내 삶의 전부야."


소중한 것을 지키는 삶. 비슷한 맥락에서 신유승은 41회차의 동료들을 떠올렸다.


최전방에 일행을 지키다가 산화한 41회차의 이현성. 죽기 전까지 유령함선에서 내리지 않고 적들에 맞선 41회차의 이지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전장을 배회하다 눈먼 창칼에 꿰뚫린 41회차의 이설화.


한때 그들의 동료였단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지난한 세월 때문일까, 아니면 한없이 이기적인 자신과 비교되는 숭고함에서 오는 거리감 때문일까. 


신유승은 알 수 없었다. 


"내가 . . . 누군가를 위해 살아갈 수 있을까?"

"음, 나는 모르지.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장담할 수 있네."

"무엇을?"


한명오가 신유승을 쳐다보며 말했다.


"누구나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어. 굳센 의지만 있다면 말이야."


그리고 자기 가슴팍을 힘차게 두드리며 으스댔다.


"나처럼 말이지."


우습기도, 한편으론 듬직하게도 보이는 그 모습에 신유승이 실소를 흘렸다.


"흐. 마지막이 좀 김빠지네."

"크흠, 아무튼 내 말은, 호의를 받는 데 굳이 자격을 운운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한명오가 보따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 건넸다. 


"애당초 자격이 없다면 호의를 베풀지도 않았을 테니까."


요컨대, 서순의 문제. 미노 소프트사의 낙하산 인사로 발령받은 한 부장 시절엔 떠올릴 수 없었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매우 당연한 진리였다. 


" . . . "


신유승이 난감한 표정으로 아이템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을 돌이켜봤다. 선악과가 영사한 장면보다 더 오래된 것들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자신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흔들리는 시선 끝엔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구나. 나도 현성 오빠처럼, 지혜 언니나 설화 언니처럼, 필사적으로 싸웠구나.


- 개죽음이었어. 


'아니야. 우리는 선택한 거야. 서로를 구했지.'


- 대장에게 이용당했을 뿐.


'그들의 선의를 폄하하지 마.'


- 원망스러워. 증오해.


'맞아. 난 아직도 대장을 증오해. 하지만 증오에 빠져 허우적대진 않을 거야.'


선악과의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졌다. 물론 이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 내면의 목소리는 다시 한번 자멸과 타락을 부추길 테니.


다만, 지금은 아니었다.


'안녕, 나중에 봐.'


인사말을 끝으로 어둠이 완전히 걷혔다. 탁 트인 시야. 무심코 "세상이 이렇게 밝았었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서울의 경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등장한 어느 화신이 보일 정도로 말이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할 수 없는 중성적인 외모.

불교적인 색체가 강한 복식. 

한눈에 봐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화신의 정체를 눈치챈 신유승의 눈이 가늘어졌다. 


"구원교주 . . . "

"음? 누구라고?"


신유승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상아 언니와 희원 언니한테 전해 줘. 사냥 시나리오가 끝나는 즉시, 본거지로 복귀하라고. 그리고 절대 구원교주와는 혼자서 맞서지 말라고."

"뭐?"

"놈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마. 그럴듯해 보여도 다 헛소리니까."

"아니 잠깐 - "


한명오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신유승의 신형이 사라졌다. 아무리 개연성의 제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녀는 본래 중후반 시나리오까지 도달한 존재. 


눈 깜짝할 사이, 니르바나 뫼비우스에게 접근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신유승이 코앞에 들이닥쳤음에도 상대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되려 두 눈에 흥미가 가득한 상태였다.


니르바나가 고했다.


"호오, 네가 스스로 재앙의 껍질을 탈피한 중생이구나."

"날 . . . 알아?"

"알다마다. 배후성한테 들었다. 유중혁의 명령으로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견뎌 이곳에 도달했다지."


환생자, 니르바나. 


그는 시간의 풍화작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엔 지루함이, 다음엔 허무함이, 종국엔 공허함이 밀려온다. 


자신처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도 아닌 그녀가 그 지난한 세월을 미치지 않고 견뎌 낸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가엾은 중생이구나. 한편으론 기특하다. 유중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다니."

". . . 네가 논할 이야기가 아니야."

" 비록 다른 회차의 유중혁이라 하더라도 나보다 먼저 하나가 된 것은 괘씸하지만, 너에겐 특별히 자비를 베풀겠노라."

" . . . "


사람이 아니라 벽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신유승의 냉담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니르바나는 두 팔을 활쫙 펼치며 구원교 입단을 권유했다.


"나와 하나가 되어라."

"뭐?"

"너는 아직 시나리오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 네 마음은 과거에 머물러있지. 지키지 못한 것에 안주하고 있어. 그래선 아니 된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야 한다!"

". . ."

"내가 너를 구원해 주마!! 욕망을 일깨우고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지, 너를 괴롭히는 번뇌가 얼마나 헛되고 무의미한 것인지, 깨닫게 해 주마!"


역시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살려 두면 거지 같은 신념으로 일행들을 해코지 할 터.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츠츠츳!


전신에 야수왕의 감수성을 두르며, 신유승이 니르바나에게 단언했다.


"거절할게."

" . . . 어째서지?"


신유승의 은은한 미소가 니르바나의 일그러진 표정과 대비를 이루었다.


"구원은 이미 받았거든."



*



아스모데우스가 떠난 자리. 홀로 남은 은밀한 모략가는 조금 전 대화를 곱씹으며 성류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고뇌하는 어둠을 향해,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떠났나?"


은밀한 모략가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근원지를 쳐다 봤다. 피스랜드에 나올 법한 소인이 계단 난간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왔다.


음영이 가신 소인의 얼굴은 유중혁과 동일했다. 눈, 코, 입 전부. 그리고 그것은 은밀한 모략가도 마찬가지였다.


모략가가 소인의 이름을 호명했다.


【떠났다, 41.】


[41]


그는 은밀한 모략가가 만들어 낸 분신. '41회차'의 유중혁이었다. [41]의 사위가 화면의 머물렀다.


화면 속에선 41회차의 신유승과 니르바나의 격전이 한창이었다. 실로 오래간만의 재회였지만, [41]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용캐 살아 있군."


【마왕이 개입했다. 그나저나 아직도 자신의 삶을 기억하지 못 하는 모양이군.】


" . . . "


[41]이 침묵했다. 모략가의 말대로 [41]은 대부분의 기억을 망각했다. 그 이유는 본인도 모른다. 신유승에게 냉담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 


다소 거북한 주제였기에 대화의 진도는 더 나가지 않았다. 대신, [41]이 다른 화두를 던졌다.


"놈을 직접 본 소감은 어떤가?"


【우리의 예상대로 마왕은 우리와 결이 비슷했다.】


"역시, 다른 세계선의 존재인가?"


【그렇게 단정 지을 순 없다.】


". . . 어째서지?"


[41]의 목소리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게 눈앞의 신격은 수많은 자신들 중에서도 누구보다 세계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 유중혁이었다. 


비록, '최후의 벽'을 넘지 못해 진정한 '끝'은 보지 못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그 어떤 비밀도 모략가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모략가가 조금 전 물음을 보류한 것은, 자신의 무지를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41]은 그 점이 놀라웠다.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설명하기 어렵군. '가장 오래된 꿈'만큼 이질적인 존재라.】


"그래도 나태한 신과는 달리 그 이름을 알고 있지 않나?"


[41]의 물음에 은밀한 모략가가 '그'를 처음 마주한 순간을 되세겼다. 


어두컴컴한 우주에서 그 어떤 별보다 밝게 빛나던 광원. 우연히 관측한 영혼은 한없이 맑고 순수하며, 형용할 수 없는 욕망을 품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것이 품은 욕망은 여타 성좌들처럼 타성에 젖어 역겨운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를 갈구하고 있었다. 도저히 지루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 점이 은밀한 모략가의 눈길을 끌었다. 


모략가는 영혼을 자세히 살펴봤다. 안에 든 내용이 너무나 광오한 탓일까. 표면 곳곳에 금이 가 있었다. 모략가가 읽어낸 이야기는 실은 상처 틈새로 새어 나온 활자들의 집합이었다.


영혼은 밝은 미소로 상처를 숨기고 있었다. 


한동안 우주를 배회하던 영혼은 얼마 안 가 종적을 감췄으나 그가 흘린 활자들은 남았다. 그중 가장 선명한 것이 바로 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아직도 유효한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등장한 영혼은 그때의 순도를 상실했으니 . . . 


모략가가 입을 열었다.


【이름은 존재를 정의하는 수많은 수단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으나 [41]은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모략가가 [41]를 신뢰하는 것처럼, [41]도 모략가를 신뢰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납득할 뿐이었다. 


". . . 유념하지."


그 말을 끝으로 [41]은 은밀한 모략가의 채내로 스며들었다. 자아의 경계가 희미해지자, 은밀한 모략가의 생각들 중 일부가 [41]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의식의 수면 아래로 침잠하며, [41]은 문제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학현.'


역시나 기억엔 없지만, 어딘가 낯익은 이름이었다. 







복선은 충분히 깔아놓았는 데 . . . 혹시 눈치챈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