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거대한 연기에 의해 어둠 속에 가려진 하늘. 곳곳에서 폐허가 된 건물들. 간헐적으로 들리는 비명들과 신음 소리.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포연砲煙.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설명해 무엇하랴. 


말 그대로 이곳은 멸망 이후의 세계다...


세상이 멸망했다. 

불타오르는 건물, 쓰러져가는 사람들, 치솟는 연기와 대기를 뒤덮는 검은 마기. 

저벅, 저벅……. 


온몸이 만신창이인 누군가가 피를 질질 흘리며 이곳으로 걸어온다. 얼마나 피를 뒤집어쓴 건지, 금빛 머리카락이 온통 피딱지와 먼지로 엉켜있다. 


또...


나를...


막으러 온 건가...


나는 냅다 검을 뽑아들어 바로 근처에 있는 인간을 양단 내어버렸고, 그 뒤로도 주변에 있는 인간이란 인간은 하나도 빠짐없이 베어넘기기 시작했다. 도심지는 이제 사람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곳곳에서 울려퍼지는 비명들. 내가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잠재워졌지만 바로 다른 곳에서 또 다시 터져나오며 끊이질 않았기에, 나의 살인또한 멈추지 않았다.

내가 세상을 멸망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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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께.


별 특별한 것도 없이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던 제가 이세계에 온지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갑니다.


처음에는 많이 울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본 후에는 악착같이 이세계에 적응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 동료들이 말하는 정의와 균형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고, 


평범한 사람일때는 몰랐던 용기와 동료애를 어렴풋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엄마, 아빠께는 말씀드려도 이해하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꽤 강해져 이제는 제가 의지했던 사람보다 저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많이 잃었지만 많이 얻었고, 넘어진 관문보다 헤쳐나온 관문이 많아졌습니다.


드디어 1년간의 여정의 끝이 눈 앞에 보이고 있습니다.


"용사! 준비됐어?" 


이세계에서 제가 살던 세계로 부칠 수 없는 편지에 이런 말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기도해주세요.


1년동안 겪었던 모험과 여정을 긴 꿈이나 추억처럼 여길 수 있기를.


동료들이 부르니 이쯤에서 편지를 마칠께요.


돌아가서 뵐게요.


가족과 일상을 그리워하는 딸.


서후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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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발생당일 오후 3시


"···어?" 


시작은 어느 소년의 외마디 탄성이었다. 딱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지루했을 뿐.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간 어린아이에게 수염 덥수룩한 어른들의 장광설이 무슨 재미가 있었겠는가. 



"예, 민후붕! 딴청 피우면 못써!" 


"하지만-." 


"안된다고 했지!" 


소년은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었다. 그것이 꼬마 소년의 행운이었다. 최소한 폭발의 순간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지는 않았으니까. 다음 순간, 한줄기의 섬광이 지상에서 화하였다. 


"아-." 


놀라움, 공포, 고통. 


그 모두를 담아 사람들은 외마디 비명을 토해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미처 다 비명을 질러보지도 못했다.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 섬광이 그들을 태워죽이는 것이 한발 빨랐다. 


철근 콘크리트마저 녹아내리는 업화 속에서 인체라는 이름의 나약한 고깃덩어리는 단 1초도 버티지 못했다. 


그들은 빛이 닿는 대로 남김없이 증발하고 기화되었다. 


도시 곳곳에 새겨진 거무튀튀한 그을음만이 본디 그 자리에 인간이 존재했음을 암시해주었다. 


그것도 수백, 수천, 수만 명의 인간이. 


"―악!" 


그들은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보다 멀리 있던 이들은 폭풍에 휩쓸렸다. 


살가죽이 타들어 가고, 섬유가 갈기갈기 찢기면서 하늘을 부웅-하고 날아올랐다. 


뒤집히고, 부딪히고, 추락하고. 


인간이 종이비행기처럼 펄럭이며 날아다녔다. 


새까맣게 타 죽어가는 종이비행기였다. 


이제 이들에게는 살아있는 것이 불행이오, 죽는 것만이 구원이 되었다. 


■■■―!!! 


그리고 그제야 뒤늦게 폭발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고막이 담아낼 수 없는 굉음이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종이비행기들은 그 즉시 고막이 터지며 달팽이관을 당하였는지 토사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토사물들이 다른 이들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입에서 토사물이 흘러나오는 즉시 혓바닥과 함께 불타고 눌어붙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까이 가려 하지도 않았건만 몸소 지상에 임한 태양이 이카루스들을 남김없이 불태우고 있었다. 


"뭐, 뭣-." 


여기까지 불과 5초 남짓. 


다음 희생자들은 너무나 뒤늦게 이변을 인식했다. 


누군가는 그저 멍하니 섬광을 우러러보았고, 또 누군가는 잽싸게 뒤돌아서서 도망쳤다. 


운 좋게도 장갑차나 전차 같은 것에 올라타 있던 이들은 저마다 애마를 재촉하며 어떻게든 폭발로부터 멀어지고자 했다.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다. 


도망치다가 휩쓸린 이들과 멍하니 휩쓸린 이들의 차이를 꼽아보자면 가만히 있던 이들은 폭발을 똑바로 바라보며 죽었고 도망치던 이들은 폭발을 등지고 죽었다는 것뿐이었다. 


애당초 생존 가능성을 따지기에 그들은 폭심지와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불과 10초도 안 되어 붉은 광장에 몰려든 십수만 명이 글자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대전과였다. 


"꺄아악!" 


15초째. 


그제야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소중한 사람을 찾는다거나, 사태를 파악한다거나. 


그런 건 아직 일렀다. 


희생자들은 그저 살갗을 태우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붉게 달아오른 철판에 살가죽이 눌어붙은 사람. 


인간 선인장이라도 되는 양 온몸에 깨진 유리를 뒤집어쓴 사람. 


살가죽이 헝겊처럼 뜯겨 펄럭이던 사람. 


백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 개의 우주가 있다는 말처럼 백 명의 희생자마다 백 가지 지옥도가 펼쳐졌다. 


쿠구궁-. 


그 복판에서 버섯이 피어올랐다. 크고, 웅장하고, 섬뜩한 독버섯이었다. 마치 무고한 생명을 양분으로 삼기라도 한 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버섯은 주변에 모든 것을 집어삼키면서 끝도 없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후진과 후붕이가 깜짝 놀라 급하게 그녀를 막으려고 그녀를 찾았고. 완전히 페허가 되어버린 강서구에서 기어코 그녀를 찾아냈다

“이러지 말아줘요 파괴를 멈춰줘...” 

서후순이 팔을 뒤쪽으로 뻗어 민후진의 얼굴을 더듬는다. 

“미안해 이젠, 도저히 멈출수가 없어 나는 ...” 

서후순는 고개를 뒤로 돌려서 민후붕에게 깊은 키스를 한다.

엄마, 아빠 

끔찍한 악몽을 꿨습니다. 꿈속에서 전 이상한 세계로 끌려갔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그 세계의 '마왕'을 잡아야만 했어요. 

1년 여간의 힘든 여정이 있었고 그 세계를 구하고 돌아왔을 때 

엄마, 아빠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죠. 친구들도, 친척도, 사회도 저를 받아주지 않았어요. 너무나 아팠습니다. 가슴이 미어진다가 아니라 타들어간다가 아니라 그야말로 생살을 제 입으로 씹어먹는 느낌이었습니다. 

너무나 답답하고 너무나 서럽고 너무나 슬퍼서 있는 힘껏 제 손에 잡힌 걸 휘둘렀습니다. 가슴에 담아둔 울분을 잠시 터트린 것이었지만 그날 저는 세계를 적으로 돌렸습니다. 

그런 저에게 책임을 물으러 온 사람들도 행복했던 사람들도 저를 말리려고 온 사람들도... 

다 제 손으로 거둬들였습니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남들의 행복을 짓밟는 것만이 잠시 저만 불행하다는 걸 잊게 만들었습니다. 잘못 되었다는 건 알았어요. 제가 망가졌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 저보고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나는 평범했는데, 나는 소박했는데, 그저 행복하길 원했는데, 그저 내 슬픔을 알아줬음 했는데, 그 악몽에서 저는 완전 괴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행동에 책임을 묻듯. 제가 구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이 불행을 감수하며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 평범했던 절 기억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동료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역시 악몽이겠죠? 한 사람에게 이 정도로 많은 불행들이 벌어질 리가 없잖아요? 

네? 대답을 좀 해주세요... 꿈이 아닌 것 같아요. 아직도 가슴이 너무나 아파요. 터질 것 같아요. 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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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1년간의 여정 끝에 드디어 마왕을 쓰러트렸다. 그 여정동안 수많은 난관을 겪으며 하나둘씩 동료들을 만나며 고난을 이겨냈다. 하지만 그 여정에서 소중한 동료였던 마법사를 잃는 고통까지 겪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험난한 여정을 이기고 강해졌다. 그리고 사람들을 공포로 지배하고 억압해왔던 마왕이 죽은 뒤로 이세계의 사람들은 자유를 되찾고 소중한 사람을 잃을 공포를 겪지 않아도 되었다. 


나도 이제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트럭에 치였던 그 날, 원치않게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내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내 평범했던 일상이 있는 내 고향으로.


그렇게 되면 나와 같이 마왕을 쓰러트린 이세계의 동료들하고 헤어지게 되겠지. 그리고 모두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에 돌아갈거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신관은 또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 


처음 이세계로 넘어와서 당황하면서 많이 울었던 나를 달래주고 많이 도와줬던 그였는데.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외롭고 울었던 사람은 신관이었는데. 맨 처음 여정을 떠났을 당시 나는 신관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릴 때부터 마왕한테 부모를 잃어서 신전에 거둬져서 혼자 살아왔었다고 했다. 그는 나보다 많이 힘들었는데도 울지않고 힘든 내색을 감추면서까지 나를 위로해줬다. 


나는 마왕을 쓰러트리고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여행을 다니다가 신관과 감정을 교류하다가 점점 더 서로 없어서는 안될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몰랐었다. 왜 나는 신관과 손을 잡거나 단 둘이 있으면 얼굴이 붉혀지는지를.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래도 나한테는 기다리는 가족과 친구가 있었기에 애써 그 마음을 접어두려고 했었다. 신관 역시 동료들이 나한테 이세계에 머무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할때도 나를 위해 공사를 구분하고 내가 살던 세계로 돌려보내려고 했었다. 그랬던 그 날, 나는 며칠 후에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잠이 오지않자 기분 전환을 할겸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쐬려고 했었다. 문이 활짝 열린 대성당 안을 들여다보기전까지는.


"엄마, 아빠. 저에요. 이제 마왕이 죽었어요. 그러니까 며칠 후에 용사님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요. 물론 그 뒤에는 전 다시 혼자가 될거에요."


신관은 여신상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을 말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애써 태연하게 웃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문틈 사이로 가만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한참동안 여신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두 뺨에서 눈물을 흘러내리며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지만 괜찮아요. 전 여신님이 내려주신 사명을 완수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걱정마세요. 전 혼자서도 잘살 수 있어요... 용사님을 보내줘도... 후순씨를 보내줘도... 더는 울지 않을거에요."

나는 순간 억장을 무너져내렸다. 지금까지 나는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마왕을 쓰러트리는 걸 목표로 싸워왔는데, 그는 마왕을 쓰러트린 이후에도 혼자서 기나긴 고독하고 싸워야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나는 순간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지금껏 내가 없어도 동료들은 서로 연락하며 가끔 만나고 안부를 전할 수 있었지만 신관은 아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었다는 것을, 내가 신관을 위해서 여정을 해줬다고 나 자신을 위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날 나는 방으로 바로 돌아가서는 얼굴을 베게에 파묻고 하루종일 울었다. 그 다음날, 나와 신관의 초쾌해지고 다크 서클이 낀 얼굴을 본 동료들이 당황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때까지의 유예기간동안 마음을 가다듬으며 진정시켰다. 이대로 원래 세계로 돌아갈지, 아니면 동료들의 제안대로 이세계에 남아서 남은 여생을 살아갈지. 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나를 기다리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일상과 내가 사랑하는 연인이 사는 세계 중 하나를 고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답을 찾고 또 찾으며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나흘전. 드디어 답을 찾았다. 그건 바로. 


"신관님. 아니. 윌이엄씨. 저하고 같이 제가 살던 세계에 가주시겠어요?"

"네? 지금 뭐라고?"

"그 말 그대로에요. 제가 살던 세계로 와서 저와 결혼해주세요."


신관, 아니 윌리엄와 같이 내가 살던 세계에 같이 사는 것이었다. 나흘 전 그날, 신관 '윌리엄'한테 동료들 앞에서 결혼 반지를 내밀며 프로포즈를 해버렸다. 동료들은 그런 내 행동을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그건 신관도 마찬가지였다.


"용사님. 그 말, 진심이세요?"


"뭐어! 용사! 그 말 진심이야!"

"야야. 내 귀가 그새 어두워진건가?"


"아니. 나도 똑똑히 들었어."

"에에에엑! 프로포즈라고!"


나도 이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동료들의 반응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신관은 그런 나의 뜻하지않은 프로포즈에 적잖게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역시 이건 너무 무리수였던걸까. 신관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안돼요! 용사님! 제가 용사님하고 같이 따라가면 용사님이 많이 당황하실거에요! 게다가 고아인 저를 용사님의 부모님이 받아들일리가!"


"그건 제가 다 설명할께요! 세상 사람들이 부정해도 제가 긍정하잖아요! 그리고 이세계에 처음 온 저를 받아준건 신관! 당신이에요! 저라고 못할 건 없어요!"

"그... 그래도 안돼요. 전 세라피네님을 섬기는 신관이에요. 제가 그 의무를 저버리면... 저버리면..."


하아. 역시 안되는건가. 결국 이대로 헤어질 수 밖에 없는걸까. 아니. 나는 포기하지않았다. 그는 나를 위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친구들한테조차 털어놓지 못한 속마음을 말하면서도 내 고민을 받아주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는 모든 고독과 슬픔을 같이 나누고 덜어주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괜찮아요. 윌리엄씨는 지금까지 혼자서 슬픔을 짊어지고 살아왔잖아요. 그런데도 이세계에 처음 온 절 위해서 도와줬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가 돕게 해주세요. 그리고 내가 살던 세계의 지식들을 모두 가르쳐줄께요."


"아아... 용사님... 그래도 될까요? 저같은 고아가 저만의 행복을 누려도 될까요? 행복해질 자격이 있나요?"


"물론이죠. 이제는 당신만의 행복을 찾아도 돼요. 우리같이 결혼해서 부모님도 뵈고 자식도 가져요."


그런 내 마음이 그한테 통한걸까? 그는 이세계에 처음 온 그날의 나보다 그 이상으로 눈물을 흐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지팡이를 던지며 나한테 달려와 두 팔을 벌려 꽉 껴안았다. 그덕분에 나와 신관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져버렸다. 그러면서 신관은 그런 내 프로포즈에 웃으며 답해주었다.


"네. 같이갈께요. 용사님. 아니. 후순씨."


"하아. 용사 녀석. 의외로 화끈한 구석이 있었는데?"


"이거 참. 이거 응원안할 수가 없겠는데."


"빌어줄 수밖에 없겠는걸."


"이렇게 된건 용사! 신관! 꼭 행복해야해!"


그렇게 나는 신관, 아니 '윌리엄'한테 시도한 프로포즈를 성공하며 동료들한테 축복을 받았다. 물론 그날 우리 두 사람은 대신관님한테 큰 야단을 맞았다. 대신관님은 그러면서도 윌리엄를 안아주며 훈훈하게 우리 두 사람의 행복을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그분은 그런 윌리엄을 위해서 세라피네의 축복을 내리며 내가 살던 원래 세계의 기억에 각인시켜주었다. 그렇게 그도 나와 같은 세계인으로서 기억하게 되었다. 


"행복하거라. 윌리엄. 세라피네님의 축복이 함께 하길."


물론 경고도 잊지않았다. 내가 용사로서 받은 힘과 윌리엄의 치유 마법이 내 고향에 통할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질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이세계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남는 시간동안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전에 어떻게 생활할지 회의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신관과 함께 손을 잡으며 원래 세계로 돌아갔다. 


"우리 다같이 용사님과 신관의 미래를 위해 기도해줍시다!"


"우리를 구해준 만큼 은혜롭고 축복된 삶이 두 사람의 행복을 기다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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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5시, 겨울의 한기에 차갑게 식은 햇빛이 늬엿늬엿 사그러든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의 구절이다. 

암담한 현실이고 뭐고 숨겨진 의미가 뭐고 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한 구절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의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수 시간을 별이란 단어 하나의 의미를 기억하기 위해 흑백색 종이에 온갖 땀과 잉크를 쏟았지만. 

정작 별은 우리를 위하지 않은 구름과. 우리를 위한다는 이름하에 세워진, 만들어진, 설립된 빛을 피해 모습을 감췄다. 

차가운 하늘, 차가운 바람, 차가운 공간, 차가운 물, 차가운 펜, 시선. 그리고 나의 심장. 



쿵! 


후순은 가로등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며 넘어지고 말았다.


“어….” 


공원에서 놀던 한 남자아이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아이는 소리쳤다. 


“엄마! 저 사람 얼굴에서 피나!” 


후순은 온몸에서 땀이 비처럼 흐르고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며 뛰는 것을 느꼈다. 

“뭐야, 저 사람?!”


남자아이는 울고 있는 날 보고 놀랐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어머니가 나를 밀쳐내며 아이를 억지로 데려갔다 .

‘이제 나는 어디로도 돌아갈 수가 없네.’ 

빛이 가리던 허상을 들추자. 

세상에는 나를 위한 온기가 없었음이 느껴졌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의미를 잃었다. 

나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지금을 살고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행복하지 않다. 

그럼, 나는 왜 용사 때, 작년에, 어제, 그 순간에까지도, 왜 그렇게 살아왔단 말인가?

후순이 할 수 있는 일은 슬픔과 두려움에 휩싸여 얼굴을 가린 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충분히 우는 것뿐이었다. 


내가 트럭에 치이지 않았었다면. 처음부터 이세계로 가지 않았다면 괜찮았을 일이잖아. 그는 서러움에 몸을 떨며 울기 시작했다. 

길 한 가운데 주저앉아 꼴사납게 울고 있는 다 큰 어른의 주변으로 어느새 사람들이 피해 다녔다.

후순이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불행한 자신과는 대조 되는 행복한 미소들. 후순이는 갑자기 주먹으로 그 유리창을 뚫고, 한바탕 몰아치는 뜨거운 열기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엄마, 제가 엄마 없이도 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는 이제 갈 곳이 없었다. 그의 친척은 그녀를 증오한다. 그녀에게 친구나 믿을 사람이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외로웠다. 갈 곳이 있었다면 차라리 가다가 외로움이란 감정도 느끼지 못했겠지만. 윌리엄이 죽은 이후 그녀에게 길을 알려줄 길잡이는 더 이상 없었다. 빗물만이, 그녀의 외로운 손바닥을 스쳐갔고. 그리고 손목시계 아래에 그어진 얇은 선을 스쳐 땅에 떨어졌다. 그녀도 순간 행복해지고 싶음을 느꼈다.

그때 어디선가 멀리서 조그맣게 후순을 향해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세요?” 

소리는 점점 커져 가까이 다가왔다. 

한 소녀가 세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소녀는 투명 우산을 쓰고 있었고. 

돌핀팬츠와 후드 티를 하나 입고 있었다. 볼은 양쪽 모두 이상하게 빨갰지만, 왼쪽 볼은 유독 더 빨갰다. 눈의 밑에는 묘하게 시선을 끄는 눈물 점이 하나 있었고. 키나 여러가지 것들은 대부분 작았다. 머리카락은 짧았다. 그녀는 그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떠올린 얼굴과는 달랐다.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의 생각과는 달랐다. 손목에는 흰색 무언가가 보였다.

“괜찮으세요? 울지 마세요. 울지 마시고 저를 보세요.” 


눈을 질끈 감았던 후순이 서서히 눈을 떴다.아까본 남자아이랑 여자아이 한명이 돌아와서 그녀를 위로해준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여기서.. 뭐하신지?"

 그 소녀는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와 난간에 몸을 기대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가로등의 빛에 닿아 반짝였다. 

”그게...어.“ 

그녀는 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할 말이 없는게 아니다. 맘에 드는 말이 없을 뿐이다.

“상처 때문이라면 괜찮아요.” 

“누나 울 필요 없어요.” 

"갈곳이 없으면 우리 집으로 가실..."


"당해보지 않은 애새끼가 뭘 안다고." 

서러움과 분노가 뒤섞인 채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평범한 아침 인사가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면 그렇게 보내진 않았을 텐데….”

후붕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쉰다음 굳은 결심을 하고 말한다. 

“후순언니, 나 기억나요? 민후진 민후붕. 유치원때...”

눈물에 의해 시야는 뿌옇게 가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꼬마가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고 있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고갤 돌려 바라보니, 꼬마는 그저 괜찮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웃어주고 있었다.

 그저 그 모습에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은 한 순간에 터져버리고 말았다. 

늘 구원을 바랬다. 누군가가 이런 나를 구해주기를. 

늘 행복을 바랬다. 오늘이라는 불행이 내일이 되면 행복으로 다가오기를. 

늘 미래를 그렸다. 아무런 걱정 없이 그저 평범히 웃을 수 있는 하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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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서울 강서구.


윌리엄. 내가 틀렸어. 내가 바보였어.


나는 세상을 구했지만 당신만은 구하지 못했어. 그리고 당신은 사람들을 구했었는데. 그랬는데.


이세계에서 나는 용사가 되었는데, 왜 내가 살던 세계에서 그는 테러범이 되었던거지?


내가 실종된지 4개월이나 지났을 무렵, 전국적으로 내가 장기매매단에 납치되었다거나 유괴된 뒤에 살해당했다는 여러가지 소문이 나돌았다고 부모님께 들었다. 그래도 부모님은 1년동안 사라졌었던 나한테 다그치거나 화내지않고 무사히 돌아왔다며 나를 안아주셨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부모님이 나와 같이 온 신관을 보고는 처음엔 노발대발했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났을 때는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인정해주었다. 그래도 부모님은 아직 우리 두 사람이 결혼하기에는 익혀야 할것도 많아도 결혼식 비용을 조금 더 모아두기위해 결혼을 1년뒤로 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가서 검정고시를 보겠다고 선언, 자퇴를 선언했다.


"그래도 되겠냐? 1년간 실종되어서 휴학으로 처리했는데. 게다가 검정고시도 꽤 어려워. 교장선생님도 너 학교에 다니는 거 허락해주셨다. 그동안 네 성적이 높은 걸 감안하셔서-."


"아뇨. 괜찮아요. 저도 해야할 일이 많아져서요."


학교는 내가 실종되었던 1년동안 내가 살아있다는 걸 믿으며 휴학처리를 해주셨지만 그래도 나는 대학교에 빨리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잘 말씀드렸다. 친구들도 그런 내 결정에 믿지 못하는 눈치를 보였다.


"의외다. 후순아. 네가 실종되고 돌아왔는데도 검정고시를 치루겠다니. 대학도 마치려고 한다는 말 듣고 쇼크였다."


"어, 그러고보니 우린 이제 동급생이 아니겠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이해해볼께."


그럼에도 나는 주변 사람들을 간신히 설득한 덕분에 점차 이해를 받고 검정고시 시험을 치뤘다. 그 사이에 윌리엄은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한테 여러 도움을 받으며 내가 사는 세계를 이해하고 공부하며 익숙해져갔다. 그때문이었는지 윌리엄은 이세계에 있었을 때보다 밝게 웃고 있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부모없는 고아와 결혼하려는 게 꺼림칙하게 보였는지 쑥덕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는 상관없었다. 이제 서로간의 해피엔딩을 치뤘으니 앞으로 전진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니까. 


내가 평범한 일상을 지내면서 수능 시험 준비를 끝마친 그 수능시험 당일날, 내 인생에 중요한 관문을 끝내려고 했었다. 수능 시험 장소를 향하던 그 때, 부모님과 윌리엄은 그런 날을 배웅하며 시험을 잘 치루길 기원했다.


"힘내라. 후순아. 수능 잘보고."


"평소대로 하렴. 우리 딸."


"잘 보고오세요. 후순씨."


"응. 잘보고 올께."


"맞다. 후순씨. 말할 게 있는데요."


"뭔데요? 윌리엄씨. 중요한 건가요?"


"으응. 시험끝나면 그때 말할께요."


그가 나한테 뭔가를 말하려다가 얼버무리며 말을 끊었다. 그래도 나는 그한테 말을 이어가달라고 조르지않았다. 수능만큼 중요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족들한테 인사를 나누고 곧바도 수능을 치루기위해 집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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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시동안 서후순의 굳어있던, 거칠고 시니컬한 표정이 풀린다. 대신 그자리에 자연인 서후순 본래의 표정이 찾아온다. 놀라움. 그리움. 아련함. 이런 감정이 수년만에 후순의 굳어 있던 마음속에서 풀려나 의식의 표층 까지 치솟아 오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후순의 표정은 순식간에 아까의 그 사나운 표정으로 돌아온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더 과장되어 있다. 


“ㅋㅎㅎㅎ. 이게 누구야.  중딩때 찐따 유딩이 아니야. 이야, 그래 그 사이에 초등학생 되셨네…”


어릴때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던 옆집 꼬마들.


굉장히 친하게 지내서 마치 자신의 친동생들 처럼 돌봤는데...


그 후의 이사를 가버려서 그후론 보지 못했다...


후붕이가 얼굴을 붉힌다. 


“ㅎㅎㅎ 근데 그래서. 왜?”


“누나는 어디, 갈 때는 있어?” 


서후순의 호흡이 잠시 짧게 끊긴다. 후순이가 차마 욕설과 비아냥으로 대답하기 전에 민후진이 먼저 말을 덧붙인다. 


“갈데 없으면 일단 우리집으로 가요. 저한테 남는 침대 하나 있고. 그게 길거리 노숙하는 거보다야 더 낫지 않겠어?.” 


그리고 잠시 침묵이 그들 사이를 채웠다. 

비는 계속 흐르고, 강물도 그랬다. 


비와 강물의 스타카토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녀가 입었던 교복은 어느새 완전히 젖어있었다. 후진은 후순을 보더니 말했다. 


”저 근데.. 언니 그러다가 감기걸려“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쓰고있던 우산을 그녀에게 씌워주었다. 


”ㅋㅋㅋ, 이제서야? 괜찮아, 너 써, 어차피 더 젖을것도 없어,“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쓰는게. 감기걸리면 아프잖아...“ 


”괜찮아, 추운거하고 아픈거엔 익숙해. 그러니까 그냥 너가 써.“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집에 갈래요?"


그 말에 담긴 그녀의 이야기는 그녀의 말과는 다르게 꽤나 무거웠다. 그녀의 죄책감, 후회. 그런 것들이 그 말 한마디에 응어리져 있었다.


후순이는 썩은 미소를 지으며 둘을 바라본다. 


“집이 어디니?. “


“그래서, 걸어갈꺼야?” 


그녀는 피식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둘을 따라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간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런 편함함은


겨우 숨을 돌리고 그녀가 힘겨운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그녀는 갑자기 불안이 닥쳐왔다. 생각해보면 아무리 그래도 너무 제멋대로 굴은 듯 하였고, 제일 문제인 것은 혹시라도 입었을 마음의 상처였다. 


그러나...


후붕이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저, 그... 언니, 어 누나." 


"어 왜그래?"


"어두워서 무서운데... 안아줘도 돼나요?" 


"!"


후순은 그 말에 놀라 후붕을 바라봤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희뿌얘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스스로 내뱉어 놓고도 내성이 없는 말이었던건지 후붕의 귀가 붉어져 있었다. 


괜찮다고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후순은 몸을 후붕이를 그대로 자신에게 잡아 끌어당겨 안았다. 


후진이가 묻는다. 


“어떻게 된건지 말해 줄 수 있나요? 뉴스에 난 폭발사고 그리고 그 테러범 그 건인...” 


서후순은 싸늘한 표정만 짓는다. 


“그거 누명이야. 그리고 그는 영웅이었어 세상을 구해낸 위대한...”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물먹은듯 어딘가 울먹거리는 것만 같았다.


“...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던거죠? “ 


“긴 이야기가 되겠네.”


그녀는 처음으로 가족을 제외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싶은 존재를 만났다...


자신의 존재를 따듯하게 받아준 존재를 만났다...


“흐흑…….” 


눈에서 따듯하고도 처절한 무언가 나오지만, 이것이 눈물은 아니었다. 마음이 아려오고 가슴이 답답해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지만, 이건 눈물이 아니었다. 목이 메이고, 시야는 차츰 흐려졌지만, 이것은 눈물이 아니었다. 다리는 맥없이 풀려버려 이제는 더 이상 걸을 수도 없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았다. 


“흐윽…… 흐으윽…….” 


비록 꼴사나운 신음을 내뱉고 있지만, 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을 마구 닦아내고 있지만, 비록 내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 지나가는 그 누가 보아도 손가락질할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았다. 


나는 슬퍼하지 않아, 나는 슬프지 않아, 


나는, 나는…… 나는……. 


"괜찮아요? 언니?"


"언니 울지마요..."


"아...아...안우...히극...울었어...흐극..."


"울지마세요..."


둘은 눈앞의 존재를 사랑스럽게 꼭 껴안아 주었다


“아니야!!!” 


그리고 마침내 벗겨진다. 


“나…… 나…… 너무 슬퍼……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벗겨진 가면은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슬픔, 절망, 그리고 후회. 


“미안해!!! 미안해…… 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아니, 눈을 뜨기 싫었던 것이다. 나는 비참하고 잔혹한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결국에는 이처럼 눈을 떠버렸고,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격통과 함께 그동안 억지로 외면해온 감정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그렇게 아픈 가슴을 달리기 위해 가슴을 두드려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안으니 남매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육중한 여인인데, 자기보다 훨씬 작고 여린 품 안에서 방금보다 더욱 서럽게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바라보는 둘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결국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무거운 입을 겨우 떼어내며 여태까지 말하기 꺼려왔던 사실 하나씩 쮜어 짜내기 시작했다.


과연 녀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를 미친 년 취급할까? 


또 거짓말을 한다며 비아냥 거릴까? 


아니면 이런 분위기에서도 눈치없는 말을 한다고 화를 낼까? 


놀랍게도 전부 아니였다, 둘은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덤덤하면서도 진지하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믿어주는 거니? 내 이런 말을?" 


"그럼요! 정의로운 용사님이 힘들게 말한 사실을 저희들이 믿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구나." 


서운했던 그녀의 마음은 다시 새록새록 설레이기 시작했다. 둘이 비난을 무릅쓰고 이렇게 많은 걸 해주셨어. 


나는 끝까지 나를 믿어주는 꼬마들에게 모든 사실들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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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능을 마친 그 날, 가족들한테 연락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누구세요? 누구신데 윌리엄씨의 전화를?"


"설마... 유가족분이신가요?"


"방금... 뭐라고 했어요? 유가족이라니...?"


"이를 어떻게 해... 오늘 오후에 ○○역 근처에서 대형 테러 사고가 일어났어요. 거기 가족분들은 이미... 이미..."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매우 흐느끼게 울며 말해주었다. 그리고 왜 다른 사람이 우리 가족의 전화를 받았는지 알아버렸다. 나는 전화를 대신 받은 그 사람이 알려준 곳으로 달려갔다. 내가 도착했던 사건 현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버린 유가족들이 차갑게 식어버린 시신 앞에서 오열하고 있었다.


이런 수많은 인파를 본 순간 내 눈을 믿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장난전화였으면 좋겠다라고. 누가 폰을 훔쳐서 장난전화를 걸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야했다. 나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가족들을 찾아다녔다. 분명 그 현장에는 없을거라고 말이다.


"아... 안돼."


있었다. 수많은 시체가 안치된 임시 안치소에서 가족들 모두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채 흰 천에 덮여져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 중에는 내가 이세계를 떠나가기전 그이한테 고백하며 프로포즈로 줬던 약혼 반지가 끼워져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천을 천천히 거뒀다. 부디 내가 잘못본 것이길 바랬다. 아니, 같은 디자인을 한 반지여야만 했다.


"아니야...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거에요... 왜 여기에 있는거냐고요... 어째서!"


"유가족분! 진정하세요!"


차라리 이 순간이 거짓말이길 바랬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던 가족들이, 윌리엄이 누워있었다. 나는 이런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오열하고 말았다. 나는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어버렸다. 게다가 그런 대형 사고가 있었는데 사망자가 123명밖에 안됐다는 기사가 나왔지만 내 가족과 그는 그 123명의 희생자 중 하나인데 기뻐할리가 없었다.


그 일이 있는지 며칠후, 옆집에 살던 이웃으로부터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수능을 마친 기념을 위해 깜짝파티를 준비하려고 현장에 갔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와 결혼하기로 했었다는 얘기까지 들었다고 한다. 


"으흐흑...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잖아... 어째서..."


그 사건이 일어난 뒤 어떤 사진이 인터넷에 유포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악의가 넘치는 소문까지 퍼졌다. 


"뭐야... 이거... 도대체 누가 이런거야!?"


하루아침에 가족과 연인을 잃고 합격이 예정되었던 대학교의 전화를 모두 무시한채 자포자기했었던 내가 참사 사건을 검색하던 중 내 눈으로 믿을 수 밖에 없는 사진을 보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싱크홀이 발생했던 해당 사건 현장에서 누군가가 탈출하기 직전 그가 무릎을 꿇으며 보호마법을 펼친 사진이었다.


그 때 나는 떠올렸다. 그는 갑작스러운 대형사고에서도 자신의 정체가 들킬 걸 알면서도 사람들을 구하기위해 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나는 그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람들을 구하려했던 그런 모습을 슬퍼하면서도 납득했다. 내가 이대로 슬퍼하면 그가 슬퍼하기에 기운을 차리기로 했었다. 그런 수많은 유언비어들을 보기전까지는.


- 사진 속 의문 남성. 재난을 일으키려다가 사망. -


- 이상한 힘을 쓴 사람. 사실은 테러범였다. -


'뭐, 무슨 소리하는거야. 테러범이라니? 사람들을 구하려고 정체를 들킬 각오로 마법을 썼는데?! 테러범이라고?!'


나는 그 폭발 대형 사건의 기사들과 너튜버들이 떠드는 말을 보고 들을수록 내 안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어떤 기사에는 사람들을 죽이려한 희대의 살인마로, 어떤 기사에는 인간으로 둔갑한 테러리스트로, 그리고 하지도 않은 살인사건의 진범이라는 기사까지 있었다. 도대체 너희들이 뭘 안다고. 뭘 안다고 함부로 떠드는거야!


나는 이런 허무맹랑한 기사를 쓴 언론사에 항의전화까지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오히려 그와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관쇠로 모른 척 했다. 게다가 기자들이 언제 나에 대해서 알았는지 기사에 실어넣었다. 그것때문이었을까. ○○역 대형 폭발 사건의 유가족들이 우리 가족이 살았던 아파트 앞까지 나타나서 나한테 달걀과 이물질을 던지며 항의했다. 


"이 망할 자식아! 그놈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어! 살려내! 살려내라고!"


"너도 그놈하고 무슨 관계야! 그놈이 우리 가족 죽였다고! 당장 살리란 말이야!"


"살려내! 살려내! 살려내라고!"


유가족들은 자신의 정체를 들킬 걸 알면서도 힘을 쓴 그를 테러범으로 매도하는 일이 늘어났고 급기야는 자칭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한테까지 아파트에 쳐들어왔다. 이 일이 계속되자 아파트 주민들은 아파트 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나를 내쫓았다. 얼마까지만해도 나를 칭찬해주고 호의를 보였던 이웃들은 나를 역겨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미안한대. 후순아. 자네가 여기있으면 우리 집값이 떨어져. 그러니까 며칠내로 집을 비워줬으면 좋겠어."


나를 믿고 걱정하고 기다려줬던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울리지말아야하는 '그 녀석'이 되어있었다.


"미안. 이제 엄마가 너하고 만나지 말래. 또, 이제 우리는 아니잖냐?"


"네가 이해 좀 해줘."


날 도와줄 친척따위는 없었다."


나는 부모를 잡아먹은 후레자식이 되어버렸다.


"야! 너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어!"


"너같은 건 사람새끼도 아니야! 눈이 삐어도 정도가 있어야지!"


"어디로 갔다가 미친 괴물을 데려와서 사람을 죽여!"


"아유! 그만해요! 이러다 후순이 죽겠어요! 갑자기 가족을 잃었던 애인데!"


"놔! 이런 새끼는 죽여버려야해!"


"가."


"이런 취급받기 싫으면 두번 다시 찾아오지마."


"너와 네가 데려온 애때문에 우리집 파탄나기 직전이야." 

" 아직도 안 갔어? 당장 꺼지라고. 경찰이라도 불러줘? "


그렇게 나는 사회로부터 괴물과 같이 산 괴인으로 찍혀있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어버린 나한테는 남는 돈이 없었다.


돈만 없는 게 아니었다. 가족도 없다. 그이도 없다. 집도 없다. 그리고... 나를 받아줄 곳도 없다.


"뭐지? 꿈인건가? 그냥 끔찍한 악몽인가?"


나는 세상을 구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렸는데…. 윌리엄도 이 낯선 세상에 와서 사람들을 목숨을 구해줬는데…. 목숨까지 잃었는데….


왜 테러범이 되어버린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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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 4분. 


서후순는 잠에서 깨어난다. 

습관적으로 기지개를 펴며 눈을 떠 보니 벌써 7시였다. 잠자리가 편했던 건지 아니면 그 동안의 피로 때문인지 평소보다 2배나 더 오래 잠든것 같았다. 

어제는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방 안을 둘러보니 제법 큰 침대와 거울이 놓인 작은 책상, 그리고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옷장이 보였다. 둘의 성격이 깔끔한 편인지 모든 물건들은 전체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죽은듯이 오래 잤지만 장시간 심적학대의 피로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잠시동안 그녀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를 쓴다. 방문 바깥쪽에서 누군가가 부스럭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서후순는 꼬마들이 나를 집으로 데려 왔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기억해낸다. 

나는 행여 그 둘에게 혼날까 이부지리를 반듯하게 개 놓고 방에서 나왔다. 

"일어났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 뭐.. 덕분에 정말로 편했어..." 

후순이는 방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저녁 만들어 놓았으니까 와서 먹어.”

"아니죠! 세수부터 하고 와서 저녁 드시죠. 전 아까 먹었어요." 

후붕의 목소리다. 부엌은 대충 정리가 되어 있었다. 쌓여있던 설거지도 해치워 버린듯 하다. 식탁위에는 밥상이 차려져서 덮개가 덮어져 있다. 

흰밥. 된장 찌개. 가자미 구이. 계란말이. 김치. 만들기 어려운 요리들은 아니지만 깔끔하고 보기 좋게 만들어져 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시장기가 확 돈다. 

서후순는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한다.

요 몇주간 돈이없고 길거리에서 노숙을하고 쓰레기통을 뒤지니 내 끼니는 제대로 채우지 못해서인지, 나는 허기를 억누를 수가 없었고, 허겁지겁 음식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천... 천천히 드세요..."

"누나 많이 배고프셨나보다..."

둘이 음식을 광속으로 먹는 나를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쓰레기통에서 나온것 보다 훨씬 맛있다. 

파를 넣은 계란말이는 색깔도 노랗고 식감도 탱탱하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가자미 구이는 간장과 올리고당으로 양념을 하고, 고추가루와 파슬리를 살짝만 뿌렸는데, 입안에서 쫄깃쫄깃 하게 씹히도록 잘 구워 졌다. 

냉장고에 있던 두부에 버섯만 썰어넣어 만든 된장찌게도, 비슷한 재료로 자기가 직접 만들어 먹었을 때에 비해 훨씬 맛이 좋다.

허겁지겁 먹는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둘이 말했다. 

"그렇게 맛있나?" 

"어, 완전맛있어."

따뜻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따뜻한 저녁밥를 음미하며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후순을 후진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서후순이 민후진에게 말한다. 

“... 밥 진짜 맛있게 잘하네. 요리 실력이 미슐랭 3스타 정도는 되겠다.“

후순은 넋이 나간채로 후진의 모습을 바라보며, 꾸역꾸역 입안에 밥을 집어 넣기를 반복한다.

"그, 그 정도 까지는..."

"언니 요리사 해볼생각 없어? 우리 떼돈 벌 수 있을 거야."

후붕이 후진을 놀리며 말한다

"좋겠다 난 혀가 망가졌는지, 이제 간을 못맞추겠더라고.. ”

"괜찮아요 그냥 마시다랑 미온 쓰면 끝이니까. 찌개에는 마시다, 볶거나 조릴때는 미온.”

“ㅋㅋㅋ. 알았어 다음엔 그렇게 해 볼께. 우리꼬마 주방장 고든 램지 ㅋㅋㅋ”

"아! 누나!"

"ㅋㅋㅋ"

얼굴이 잘익은 딸기처럼 빨게지며 뿌뿌거리며 화를낸 여자아이

이래서 요녀석들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고 보니 너희 부모님은?"

"출장 가셨어요..."

"너희 둘만 여기남겨두고?"

"네..."

"엄마랑 아빠는 출장 자주가요...가끔은 1달넘게 집에 안 돌아와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도란도란 이어진다.

이렇게 행복하게 웃어본게 얼마만이지?

오른 손등 위로 따스한 감각이 느껴진다. 

다름 아닌 그녀의 손이 내 손을 포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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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후

단 셋만의 생활이 시작된다. 둘의 등교시간에 맞추어, 여자도 아침을 준비하고 집안일을 미리 해놓는다. 전날 미리 돌려놓은 둘의 옷을 빨래건조대에 널고, 물걸레질을 하며 청소를 하고, 둘이 올 때 까지 숙제와 나머지 공부를 한다. 

저녁 7시가 넘어서야, 아침 일찍 학교간 남매가 귀가를 한다. 비닐봉지에는, 시장 반찬을 싸왔는지 음식물 꾸러미가 담겨있다. 

“언니 왔어!”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남매를 한번 꼭 안아주는 여자. 누나가 짐정리를 하는 동안, 식사를 준비하고 상을 차린다. 하루 일과에 대해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둘이 다니는 학교는 집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학교의 친구들은 잘 사귀고 있는지 체육시간엔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 방에서 둘만의 뉴스를 나누어 이야기하다가 상을 접고, 설거지를 하고, 이를 닦고 이불 하나를 나누어 덮어서 잠에 든다. 

1~2월의 밤은 추웠지만 여자는 남매를 꼭 껴안아 잠들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하등 상관 없다. 어떠한 것도, 가족을 떼어놓을 순 없다.

눈을 뜨니 후순이가 또 울고 있었다. 혹시 또 자살을 시도한 건 아닌가 두려워져, 몸을 일으켜 누운 후순의 양 손목과 발목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흉터 뿐이었다. 나는 안심하고 다시 누웠다. 바닥이 서늘했다. 

후순언니와 동거하기 시작한 이후로 맨바닥에서 자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언니는 바닥에서 잠을 자지 못한다. 바닥에 눕는 순간 어떻게 해도 죽은 가족들을 떠올리고 만다고 한다. 그냥 담요 위에 눕는 것도 시도해봤지만 무리였다. 그래서 침대를 포기했다. 

또한 거듭되는 자살 시도를 막기 위해 여러 생활용품들을 처분했다. 가위 하나. 크기가 다른 식칼 두 개와 과도 하나. 커터칼 한 자루와 면도날이 잔뜩 담긴 초록색 통 하나. 날카로운 것들은 전부 처리했다. 

나는 언니를 껴안는다. 스트레스로 인해 단숨에 새하얘진, 아침 하늘의 몽실 구름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 고맙워....후진아" 

조금 붉어진 것 같은 얼굴로 수줍어하는 것 같다. 

"앞으로 어디서 다치고 쓰러지지는 말아주세요 언니."

다시 보니 그녀의 키는 180cm가 넘는 것 같다. 덩치와는 다르게 신선한 그녀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이렇게 재미있는 날들도 있구나. 방과 짐을 정리하며 떠들썩했던 날들을 마무리한다.




코스프레 행사장

"그,그럼 시작한다!"

"네!"

카메라를 들고 기대에 가득찬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눈동자. 후붕과 후진의 친구들이 그녀를 보며 말한다.

"부,부름에 응답하라... 뒤랑칼!"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찬란한 황금빛을 내며 강림한 아름다운 검

"대박!"

"방금거 찍었지!"

"이 칼을 이렇게 쓰게 될 줄 몰랐는데." 

용사는 성검을 잡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성검의 가호를 받은 용사는 상처입지 않는다. 그 몸은 어떠한 마법이나 무기로부터 완전히 무적이다. 단 하나, 그 가호를 발휘하는 주체. 성검을 제외하면.

정적이 5초? 10초정도 이어지자 후순는 급하게 칼을 내리고 다시 수줍은 모습으로 고개를 깊게 숙이었다. 

아까의 충격에 당황했지만 언니가 행동으로 대답하기도 했고 더 말을 할거 같지 않아서 내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 

"구, 굳이... 사진 찍을 필요가..."

그 말을 끝으로 여자가 남에게 보여주지 못할 것을 보여주었다고 느꼈는지 후순는 창피함에 두꺼웠던 신체가 쪼그라드르는 착각까지 느껴지게 몸을 숙이다 못해 말아넣었다.

둘의 어리광에 못 이겨 이리저리 휘둘리지만, 이런 나날 덕분에 나 같은 사람도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것이다.

다음날 쇼핑한 물건들을  트렁크에 싣고 일행은 다시 어딘가를 향했다. 기분이 좋으신지 큰소리로 웃기도 하셨어. 혼자 콩닥콩닥 하는 와주에 불쑥 후진이가 말을 꺼냈다. 

" 장례계획은 어떻게...". 

후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도 몰라. "

"대학은 어디 지망할 생각이죠?"

나는 계속 너희 둘이랑 이대로 동거하고 싶은 생각인데 너희둘을 내가 입양해서 친남매로...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순 없고, 후순는 말문이 막혔다. 그럼 그렇지 하는 듯 후진는 혀를 찼다. 

"그럼 희망 대학교 정도면 괜찮은 경력이 되겠지. 다음달 같이 가서 인사 시켜드릴게요." 

"뭐?" 

"예전에 부모님이 나오신 대학교 구경해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저희 그 대학교 총장님이랑 아는 사이에요!"

"애.애들아..."

후순는 힘이 빠지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오늘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너무 늦었잖아..."

구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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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본래 꿈이란 것은 이뤄질 수 없기 때문에 꿈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다시 눈을 뜬 것이겠지.

"제발요! 여기있게 해주세요. 전 갈곳이 없어요..."

"당장  나가! "

" 나가라고 씨발 살인마 새끼야. " 

동공이 흔들렸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둘의 보호자이자 '부모님' 은 나를 벌레를 보는 눈빛으로 싸늘하게 째려보고 있었고,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 잠깐만요, 뭐든지 할테니까... 무었이든 다할테니까... 절때로 두분의 아이를 해칠생각은 없으니까… . " 

" 하, 씨발 닥치고 꺼지라고 내 집에서… . "

"전...전...제 뒤랑칼... 검이라도 드릴까요? 아,아니면..."

"엄마,그만해요! 용사님은 사람을 해치지 않아요! 이건 다 오해..."

"넌 조용히있어!"

짝!

두 아이는 부모에게 뺨을 맞으면서도 그녀를 위해 필사적으로 변호를 하고 있었다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사고에 불행 중 다행 같은 건 없습니다. 당신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알고 계십니까?” 

그들이 내가 정신을 차리도록 열변을 쏟아냈다. 

“저는 이번 사고로 사랑하는 오빠를 잃었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의 목숨만 앗아간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의 미래까지 빼앗아갔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빼앗긴 건 그 사람 혼자가 아닙니다. 제 미래에도 이제 더는 그가 없으니까요. 당신들은 피해자 유족의 미래까지 빼앗은 겁니다. 그 사실을 알기나 합니까? 어디, 입이 있으면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다 설명 드릴게요, 그러니까"

아연실색한 내 등 뒤로 어느새 신고받고 출동한 경찰이 나타나 서 있었다. 

시간이 흘러 다시 꽃이 피는 봄이 찾아왔다. 둘이랑 만나고 동거한지 정확히 1년이 다 되어가는 시기

허탈함에 잠긴 내 목소리는 변명거리조차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구원 받았다고 생각했던 인생은, 또 다시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어느덧 두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토록 상상하기 싫었던 감정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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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툭 -


"아, 뭐야! 왜 길 한가운데에 서있고 지X이야?"


"이노무시키가 꿀밤을 맞으려고 확 그냥!"


"어? 푸하하! 나 이 애 알어! 테러범과 같이 산 그 애잖아! 기사에서도 나왔잖아! 그만해! 사람 죽이게 생겼잖아!"


"그렇긴하네? 그 폭발사건 사건을 일으킨 테러범과 같이 산 애라면 날 죽이겠는데?"


그래. 그가 살던 이세계와 내가 살던 세계는 달랐구나. 이세계는 달라도 나를 적대하지 않았는데. 내 세계는 조금만 달라도 적대한다는 걸 말이구나.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여친이 웃어줘서 넘어간거다."


"너는 얼마나 알고 있어?"


"뭐?"


"너는 소중한 사람을 잃지않아서 슬프지 않은거야?"


"뭐래는거야. 동태눈깔이."


"이제야 내가 뭘 해야할지 깨달았어.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테러범으로 매도한 이 세상이 고통에 빠졌으면 좋겠어."

"응? 이 중2병환자가 뭐라고 중얼거리는거야? 입을 확 찢어줘?"


"부름에 응하라. 뒤랑칼."


"아! 하하하하하하!"


"이 애 정말 겁나게 웃긴다! 캐릭터 진지하게 임하는거봐!"


- 콰직! -


"응?"


"꺄아아아아아아악!"

"그래... 슬퍼해. 후회해. 그리고 고통스러워해. 그이만. 너희를 구했던 내 약혼자만 슬프고 고통스러우면 억울하잖아."


"나는 용사잖아. 이 세상을 구했잖아. 게다가 그이는 모습을 들킬 걸 무릅쓰고 구했잖아."


- 츠즈즈즈즈즈 -


"내가 제일 덜 슬퍼야하잖아."


- 후웅 -


"그리고 그이는…."


- 쩌어억! -


"보상받아야하잖아!"


사람들을 구한 용사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나야 하잖아.


이세계를 구했던 용사, 서후순은 마왕과 싸울 때 입었던 갑옷들과 성검 뒤랑칼을 소환하고 무장하였다. 그리고 성검 뒤랑칼을 빛내고 들어올렸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며 풍압과 빛을 방출하였다. 그 검의 힘에 휩쓸린 사람들을 모두 재로 만들어버렸다.


그날, 서울시 강서구가 증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사람을 구하고도 테러범으로 매도당한 연인의 죽음에 슬퍼한 용사는 폭주했다. 그리고 재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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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어졌다 갑자기...

시간은 참 야속한 것이었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엔 세상이 느리게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느리게 흘러갔으며, 행복한 순간에는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은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1달만에 유라시아가 멸망하고, 2달뒤 유럽도 내가 없애버렸다. 마지막에는 아프리카에 위치한 최후의 저항군 요새가 함락당해 버렸고...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은 채 전원 사살했다. 

날아오는 피가 내 얼굴을 적시고, 그들의 비명이 하나의 화음을 만들었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갔으니까. 

그렇다고 후련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애꿎은 화풀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는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죽은 자는,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렇게 청소가 끝나고,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허무감을 만끽했다. 돌아오지 않는 그를 향해 눈물 흘린 것은 덤이고. 

그렇게도 혐오스럽던 인간들이 싹 다 없어지고 나니까, 내 바람과는 달리 더 끔찍한 고독만이 밀려 왔다.

시간 또한 나를 배려해주지 않았다. 당신이 죽었음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나아갔고, 그렇게 1 년이라는 시간이 의미 없이 흘러갔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덧 내가 마왕으로 변하고 미국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것을 죽였지만.

이상하게 행복하지 않았다.

도를 넘는 허탈함은 한 순간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기 마련이다.

긴... 시간을 살아왔다.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죽지 않습니다. 

사람이 미웠어요. 그들은 언제나 바보 같은 선택을 합니다. 

'이 지옥을 만든 건 너희들이야. 이 지옥을 만든 건 너희들이야.' .

... 그렇게 생각해 왔었는데... 나쁜 일들은 희미해지고, 좋았던 기억들만 선명하네요. 많은 끔찍한 일들을 겪었어요. 가장 끔찍한 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군요.

'네' 가 없으니까 '나' 도 있을 수 없죠. 

어느덧 1년이 흘럿다...


"울지마세요..."


이상하게 그 꼬마들이 자꾸만 생각이 나네...


부모 없고, 집을 잃고, 갈 곳 없는 나를 거두어서 가족처럼 함께해 준 남매다. 그들에게 구원받은 삶이기에, 그둘에게만큼은 내 모든 것을 바치더라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눈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느낀다.


그 꼬마 둘...


미국에 피난을 같다고 했나?


갑자기 보고싶네...


둘이랑 지내면 다시 행복해 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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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통령 사이먼는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그는 미합중국의 대통령. 국민을 목숨을 바쳐 수호해야하는 한 국가의 수장이자 국민의 대표자. 

그러나. 정확히 3시간 전. 뉴욕 항만에 나타난 마왕. 그 마왕은 정확히 3시간 만에 미국의 모든 전력망과 통신망을 장악, 50만 주방위군과 3만의 경찰 병력을 먼지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현재 인류가 가진 과학기술로는 감히 대항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명명백백히 밝혀진 이상. 

더 이상의 항전은 자살행위였다.

사태가 벌어지고 2시간 30분이 지났을 때. 백악관의 지하벙커의 스크린 위로 영상이 하나가 도착했다. 

- 안녕하신가, 미국인들. 

"!!!" 

화면에 나타난 것은, 인간과 다르지 않은, 아니... 인간과 똑같이 생긴 여인이 갑옷처럼 보이는 복장을 착용한 모습이었다. 죽은 눈으로 검붉게 물들었으며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이젠 피눈물이 흐른 자국이 굳어서 섬뜩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비현실적인 광경. 

미국의 인간들이 놀라건 말건 마왕은 무감정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 단도직입적으로 요구사항을 하달하겠다. 대한민국 에서 미국 맨해튼으로 피난 거주중인 난민 민. 후. 진. 그리고 민. 후. 붕. 남매 연령 12세. 

"마, 맙소사..." 

대통령 사이먼의 혼이 나간 중얼거림에도 아랑곳않고, 그녀의 말을 실시간으로 통역하는 통역관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대신 전달했다. 

- 이 남매를 정확히, 대한민국 표준시각(GMT+09) 15시 30분까지 나에게 무손실상태로 인도해라. 만약 지침을 어긴다면. 너희는. 

지구는. 

종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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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후


"당장 내놔..." 

후진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용사의 모습에 겁을 먹어 뒷걸음질을 쳤다. 후순이 검을 바닥에 강하게 내려치자, 땅의 균열이 입구까지 뻗어나가 뒤에 있던 출구가 무너져 내려 길이 막혀버렸다.

차갑게 내리 앉은 공허한 눈동자... 마치 죽음 그 자체를 품고 있는 것 마냥 가늠 할 수 없는 공허함이 느껴졌다.

"싫다면...?" 

허나 그것은 부모도 마찬 가지... 자신의 앞에 서있는 압도적 존재에게 굴하지 않으며 자식을 향한 사랑과 모성애을 머금고 있었다.

공포라는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죽는다….’머릿속에는 단 한마디의 단어만 이 남았고. 고통스럽게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 생각나 그리고 더 비참한 일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대로 몸이 얼어버렸다.

엄청난 살기가 돌고 있는 듯한 증오 어린 눈동자가 후붕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시선을 마주친 그 순간 거짓말 처럼 여자의 눈이 순식간에 갑자기 늘 보던 '언니' 가 되어 자기를 감싸는 듯한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으로 변한 것을 보았다

"후붕아... 후진아..."

무의식적으로 둘에게 손을 뻗은 여인 

 "어디 가는 거야?" 

"요..용사님.. 왜 그러세요, 저 무서워요..." 

"무서워...? 내가... 무섭다고?!" 

마왕으로 타락한 용사는 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검을 죽은 군인들의 시체에 내려쳤다. 후붕은 지금까지 느껴왔던 그 어떤 것보다 더한 공포를 느껴버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두려움에 숨도 제대로 못 내뱉는 얼굴이 꽤나 귀여웠다.

퍽!

그리고 그녀를 밀쳐낸 둘의 부모

그러자 여자는 끝 없는 증오와 살기를 보내오며 칼과 마법을 앞세워 위협하기 시작한다.

살기가 피부를 찌른다는 느낌이 이러할까? 주변에 있는 모든 공기가 날카롭게 날이 서있는 것만 같았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는 아마도 마왕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녀, 후순이는 지금 어마무시하게 화가 나있는 상태였으니까.

"후붕아 후진아, 당장 그 여자한테서 떨어져 언니 옆으로 와"

"언....언니 일단 진정하시고...." 

"웃기지 마! 애들 은 죽어도 못 넘겨!"

맨해튼에 한 건물에서 한 젊은 부부가 이성을 상실한 마왕로부터 자신의 아이를 지키려고 있었다. 남매를 자신의 뒤로 숨기면서 절때로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후순이 둘에 부모에게 검을 치켜새우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 당장비켜 ! "

"못해"

"그럼 너를 찢어서라도 가져가겠다."

"아 안되요! 진정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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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1년후...

부모에 죽음으로 둘은 매일 밥도 잘 먹지 않고 눈물로 괴로워하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녀도 처음에는 둘이 자신의 것이 된 것에 하늘을 날 것처럼 좋아했지만 매일 식사도 거르고 슬퍼하는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했다.

"후진아 후붕아~♡ 언니 돌아왔어!" 

경쾌한 발걸음. 방금 전까지 미쳐 날뛰면서 한 도시를 파멸시킨 마왕이 맞는지 의심갈 정도로 그녀는 밝은 미소를 내보였다. 현실이 녹록치 않아도 마지막 희망 앞에서는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 

"자아~! 식사 준비 다 했어! 어서 밥 먹자!" 

"......."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고기 요리를 만들었어! 네 집에 있던 레시피 그대로 따라했으니까 맛있을 거야!" 

"......." 

"이거 하나 제대로 떠먹지도 못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 내가 먹여줄게. 자! 아앙~♡" 

"......." 

"아으 정말! 바보! 씹는 것조차 못하면 어떻게 해? 그러면 부끄럽게 직접 먹여줘야 하잖아?"

초점과 빛을 잃은 눈동자, 강하게 닫혀있는 입, 그리고 살려는 의지가 1도 보이지 않는 몸짓까지 둘의 상태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둘의 정신은 이미 박살나며 무너져내린 상태, 그도 그럴게 자신이 사랑하던 부모가 죽었을 뿐더러 그 죽음을 눈앞에 지켜봤기 때문이다. 

둘에게 영원한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그 날의 공격.

"안 됩니다!! 용사님! 부디 자비를!! 제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둘은 후순의 다리를 붙잡고 울고불고 간곡히 빌었지만 그녀는 무시하였다.

하지말라고...! 

하지 마... 

그만둬...! 

하지마아아아아!!!! 

간절한 증오스러운 통곡을 지르지만, 현실의 변화는 없었다...

부모를 구하기는 커녕 대신 죽지도 못하는 현실은 둘은 피눈물을 흘리게 했으며 그가 부모를 목이 찢어지게 부르도록 만들었다.

"흑...흑.. 우리.. 우리 엄마 아빠.. 살려주세요.. 언니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발.. 이제 다 끝내주세요.." 

"..." 

둘은 정말로 그녀앞에 무릎을 꿇며 대성통곡 하며 빌었다. 이 모든 것들이 비현실적이었지만 꿈이길 바랬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다 이내 평온해졌다.

“다시 한번 말할게. 죽은 사람과 만날 순 없고 그 사람은 살아 돌아오지 않을뿐더러 현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아. 그걸 받아들여.” 

그녀는 위압적으로 말을 내뱉으며 팔짱을 꽉 꼈다. 그러더니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둘 다 이루지 못해 소중하는 사람은 망가져버렸고 이 모습 지켜보게된 그녀도 무지막지한 후회와 죄책감에 휩싸이며 미쳐버리는 것 같았다. 

"나를 보며 웃는 네 모습이 보고 싶어! 나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는 모습이 보고 싶어! 좋아한다며 나를 안아주는 모습이 보고 싶어!!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되버린 걸까?" 

"......." 

"애들아......" 

"......."

처음에는 장난감이나 게임기, 만화 등으로 달래보기도 하고 코미디언을 불러다가 재미난 볼거리를 만들어도 둘은 항상 웃지 않았다.


"뭐라도 말해줘...... 아무 말이나 상관없으니까 말해줘! 나를 원망해도 좋아! 나를 매도해도 좋으니까! 제발 부탁이야! 말해줘!!"


“….” 


"...후진아! 누나라고.. 날 누나라고 불러봐. 그게 정 싫다면.. 나를.. 나를 엄마라고 불러!"


“….”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평소에 그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날 봐줘.." 


이곳에 함께 생활하고 자신들이 믿고 좋아하던, 사랑하는 언니는 없었다. 그저 심하게 뒤틀려진 광기에 삼켜진 미친 여자만 있었다. 


"마왕..." 


"....뭐?" 


후붕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당신 마왕이죠." 


후붕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굉음처럼 느껴졌다. 자기가 마왕, 지금 둘에 말은 자신을 모른다는, 아니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후순이 엄청난 속도로 후붕을 들어올렸다. 


"내 후붕은 그렇지 않아... 후붕은 나한테 그런 말은 절대로 안해.. 너야말로 후붕이 아닌 거야!!" 


"남의 행복은 짓밟아놓고선 행복해?"


후붕은 온 힘을 다 해 저항했으나 그녀는 마왕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죽은 눈이 후붕을 내려다 봤다. 눈을 마주치면 그 눈동자 속에 심연으로 빠져들어 갈 것 같았다. 


"날봐...날보라고... 날보란말이야!" 


후순이 한 손으로 후붕의 양손을 붙잡아 결속하고 다른 손으로 고개를 붙잡아 얼굴을 보게 했다. 


"너도 날 좋아하잖아!! 빨리 날 좋아한다고 말해... 말하라고... 날 좋아한다고 말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냥울어요...


어?


울지마세요...


아이가 차분하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처음 자신을 만났을 때 보여 줬던 눈빛과,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였을 때의 눈빛과 너무나도 달랐다. 그녀는 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안다. 


증오. 


아이는 자신을 사무치게 증오하고 있었다.


나를 완전히 경멸하는 눈동자가 다시 한번 나를 찢어버렸다...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한 후순...


"부름에 응하라. 뒤랑칼."


또다시 소환된 검 그러나 지금까지 베어온 생명들로 인해 완전히 타락한 마검이 되었다...


검을 들고 살벌한 협박을 하는 후순이...


"나를 좋아해주지 않으면, 세상을 부수고 조각내서, 너희와 나 말곤 아무것도 없게 해줄테니까..."


"고마워요! 덕분에 결심이 섯네요!"


"어?"


후붕 내면에서 무언가 끊어져 버렸고... 이성이 무뎌져 가는 것이 명확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후순은 보았다... 그의 눈은...


"아"


그가 자살을 할 기회를 말이다. 


철컥! 


후붕은 리볼버의 안전장치를 제 빠르게 해제하고 자신의 관자놀이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외쳤다. 


"잠깐!"


“혼자서 잘먹고 잘사세요.!” 


타앙! 


귀를 때리는 커다란 총성. 


"아...안되..."


“이게 아닌데...” 


손가락 끝에 결국 놓쳐버린 권총, 더 아상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난 이걸 원한 게 아니야...” 


결국, 자신도 원치 않은 결말에 슬피 울며 끝없는 후회를 되뇌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이런게 아니야...” 


와락 ㅡ!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남자아이를 있는 힘껏 끌어안는다. 


“후붕아!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제발...!” 


간절히 기도해도 닿지 않는 절실함, 시체는 어떤 행동을 해오든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싫어! 제발...! 정말로 미안해!! 어떤 거친 비난이라도 좋으니 뭐라도 말이라도 해줘!” 


변하지 않는 절망적인 현실에 그저 하염없이 절망하고 슬퍼하기만을 반복하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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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게 된다. 

“..........” 


이제 마왕의 마지막 정신적 지추가 돼버린 여자아이... 마치 영혼을 잃은 듯 휑하고 공허한 눈동자였다. 그녀는 군말 없이 앉아서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지난달에 디저트를 억지로 먹이다가 쇼크로 기절했던게 생각났는지 후순는 시종을 불러 의사를 데려오라고 명했다. 


“후진아... 저녁 다됐어 먹자.” 


후순는 벌떡 일어나 후진의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그녀는 정성이 가득담긴 요리를 후진을 위하여 손수 만든 너무나 환상적인 음식을 가져왔지만... 


“.....” 


막상 후진은 아무 미둥 없이 침대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후순의 두툼한 손가락은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그 옆의 부드럽고 창백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가 종내는 새하얀 목을 감싸쥐었다.


“오늘도 맛있게 만들어 왔어요, 부디...” 


어떤 미동도 하지 않는 아이에게 결국 숟가락으로 정성스레 먹여주려 한다. 


“.....” 


허나... 살아 있는 게 맞긴 한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후진 입에 음식이 들어와도, 오랜 원수가 자신을 탐해 와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 


그저 실이 끊긴 꼭두각시처럼... 영혼 없는 빈 껍데기처럼... 맥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으읏...” 


그런 행동에 결국 저린 가슴을 붙잡으며 눈물을 고이는 마왕 


“아아....” 


자신의 만행으로 이렇게 돼버렸다는 사실 절규한다. 


그 후... 후진는 완전히 폐인이 돼버리고 말았다. 원수에게 모든 걸 뺏았기고 이루지 못한 복수... 


뿐만이 아니라 그 한을 영영 풀지 못한 사실과 다름아닌 증오하는 대상에게 정신적으로 학대까지 당해버리며, 정신이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나마 저항의 의지나 하다못해 극단적인 선택도 시도해 보았으나 그녀에 의해서 모두 저지 되었고... 

“.......” 


결국에는 얼마 안 가 영혼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늘도 걱정이 된 후순는 후진의 방을 방문하게 되는데, 자살 기도 중인 후진이 보였다.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녀는 황급히 달려와 후진의 자살을 막았다. 


"어, 어쩌자고 이런 짓을..." 


"가족도 없는 세상에서,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아야 되는데..." 


"후진아..." 


"무엇 때문에 부모님을 죽이신 겁니까! 죽일 필요는 없지 않았습니까...." 


"...너야말로 왜 죽은 자를 따라가려 하는거야... 이렇게 난 고통스럽고 불행한데 ! 난 보이지 않는 거냐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적어도 내가 언니 곁에 있을지언정, 부모님을 해치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살려두면, 매일 그둘을 보러 갈 것 아니야! 내 곁에 있지 않을 거잖아!!" 


"..왜...왜 하필 그 많고 많은 아이들 중에 저 입니까...." 


"...행복하니까....."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혼자 하는 게 뭐가 행복입니까? 저는 언니한테 행복이라는 것을 느낀 적이 없는데 그게 뭐가 행복입니ㅡ" 


짝! 


"아니야!" 


짜악-! 


그녀의 손이 아이의 뺨을 가격했다. 처음으로 아이에게 가하는 폭력. 감겨오는 그 감촉이 너무나도 끔찍했지만, 그녀는 미친듯이 아이의 뺨을 후려쳤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안그래도 멍들어 있었던 아이의 얼굴에 손바닥 자국이 붉게 떠올랐다. 아이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나는......."  아이는 말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점점 멀어져 가는 아이를 보며, 그녀는 열이 오른 오른손을 움켜쥐며, 울고 또 울었다.


"난 그냥......." 


메마른 죽은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그녀는 문득 생각이 났다 자신이 남매의 집에서 쫓겨날때 그녀가 해준 말들을...



"울지마세요... 언니


좀 있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같이 살아요!


전 언니가 행복하게 오래 살았으면 해요. 신나게 놀고, 돈가스 덮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난 언니가 평생 웃으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할머니가 돼서도. 평생, 영원히.”




만약 그녀가 자살한다면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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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가 돌아왔다" 을 보다 아이디어가 떠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