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다.





아무도 없는 집, 무겁게 내려앉은 고요함이 나의 공허한 마음속까지 스며들어 온다.


한순간의 변심과 그릇된 판단으로 속 빈 껍데기가 되어버린 지금,


나는 거실 바닥에 몸을 밀착한 채 천장만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역시 그 새끼의 입발린 말에 놀아나지 않았다면..


아니, 그 새끼와 같은 공간에서 등을 보이며 방심하지 않았다면..


아니, 애초에 모임을 나가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그렇게 했더라면.. 그 새끼와 엮이지만 않았다면..


순간적으로 치솟는 분노, 장난삼아 날 갖고 논 그 새끼에 대한 생각이 미치자


무력감 뒤에 숨은 분노를 태울 스파크가 온 몸을 한차례 훑고 지나갔지만


그 스파크에 타오르는 분노는 그 새끼를 향한것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가 섞인 분노였다.


등줄기를 훑어내려가는 그 새끼의 손끝에 홀려 놀아난 것도, 


그렇게 홀려 수년을 함께해왔던 그의 믿음에 배신의 칼을 꽂은 것도,


끝내 혼자 남아 그 날의 결정을 후회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 마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결과였으니..





자신이 장난감에 불과했단 사실을 알기 전까진 솔직히 문제될 건 없다 생각했다.


그와는 결혼을 했다거나 약속한 사이도 아니었고 수 년간 그에게 맞춰가는 연애방식에 적잖이 지쳐있었기에,


이별은 정해진 운명이며 모임에서의 일은 그저 정해진 이별의 때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라 여겼다.


이제와선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의 사랑은 나의 마음을 채우기엔 부족하게 느껴졌다.


서투른 감정표현, 미지근한 반응, 기대할 게 없는 데이트, 반기에 한번이나 나눌까 말까한 몸의 대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조차 제대로 들어본 경우가 드물었고 


하다못해 집착, 경계, 질투, 약간의 구속 등의 모습조차 보이는 법이 없으니


그 어떤 부분에서도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간간히 그에게 흑심을 품은 여우들이 꼬리를 흔들며 다가올 때 조금이라도 현혹되는 모습을 보인 적은 일절 없었지만


타인에게 확실히 선을 긋는 것 조차 서툴러 경계심과 불안감을 깔끔하게 해소할 수도 없었고


그런 연애가 고교, 대학을 거쳐 서로가 사회에 뛰어든 이후까지 지속된다면


누구라도 지치는게 당연하다 생각하지 않을까?


그런 순간에 나를 지옥으로 인도할 그 새끼가 나타나 거짓으로 꾸며진 사랑을 속삭이며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으니


충분한 합리화의 요소와 마음의 갈증을 해소할 새로운 기회가 만나는 순간,


나의 마음은 낡아버린 신의를 등지고 설렘의 오아시스를 향해 달려갔고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결국 지금까지 바보천지마냥 허상을 쫓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어


이미 멀어져 보이지 않는 그에게 돌아갈수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채로 공허의 사막에 쓰러져버린 것이다.


더러운 경쟁에서 승리한 다른 여자를 옆에 끼고 사라져가는 그 새끼의 모습을 보며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상실감이 사무치는 순간, 


이별을 통보하고 떠나려는 나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붙잡는 그의 모습이 떠올라버렸고


그제서야 내가 그에게 받았던 것은 부족하게 느껴졌던 사랑뿐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집착과 구속의 부재는 나에 대한 무한한 믿음의 증명이었고


드물었던 몸의 대화는 나에게 향하는 사랑이 찰나의 순간 타올랐다 꺼져버리는 성욕같은 것과 비교할 것이 아닌,


창작물에서나 나올 법한 진실된 사랑의 증명이었음을


나라는 존재 이외엔 어떤 것도 담아두지 않은 그 마음의 본질을..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고서야 깨달아버렸다.





그런 그의 마음을 철저히 부수고 떠나버린 나는 그렇게 쓰러져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멀리 왔기에, 배신자에게 어울리는 결말을 감내해야했다.


하지만 비어버린 공간을 채우지 못해 쓰라린 마음이, 눈치도 없이 흘러 넘치려하는 복잡한 감정이 


과연 어지간한 의지로 누를 수 있는것이던가?


결국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그에게 연락하여 저녁약속까지 잡아버리는 최악의 수를 두고는


그렇게 다시 만난 그의 앞에서 술의 힘을 빌려가며 그에게 한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그의 곁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했지만..


본래 나만의 것이었고, 다시 내 것이 되기를 희망했던 그 자리가 이미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녀가 잠시 없을때만 곁을 내어 달라며 있지도 않은 사랑의 잔재를 구걸하는 추태까지 보였음에도


고작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에게 감정없이 베푸는 값싼 동정만을 손에 쥔 채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패잔병의 모습으로 집에 돌아와 쓰러지고선


대책없이 들이킨 술때문에 쓰린 속과 그보다도 더 쓰라린 심장의 외침을 무시하며


적막이 흐르는 집 안에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시한부 환자마냥 흐리멍텅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심장 안쪽에서 소용돌이 치듯 나를 괴롭히고 


그 부정적인 감정들의 끝에 외로움과 그리움이 차오르며 흐린 시야에 물기가 차오른다.


이제는 일말의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적과도 같이 이 모든일이 사실 그저 한낱 꿈일 뿐이었고


두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나의 곁에서 눈물을 닦아주며 평소와 같이 옅은 웃음을 보이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면..


그의 품에 안기며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꿈을 꾸었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나의 모습을 그리며


어린 날 촛불을 앞에 두고 간절히 소원을 빌던 그 때처럼 지그시 눈을 감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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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새오 뉴비애오..

얼마전에 충동적으로 짧은 글을 하나 쓰고 사실 반응이 아예 없을줄 알았는데

반응을 주신 친절하신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덕분에 글 쓰는데 좀 더 재미가 붙기도 하고 글 쓰는 법을 배워서 더 잘 쓰고싶은

의욕도 생기고 했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이건 계획에 없었던건데요.. 반응에 들떠서 전보다도 짧긴 하지만 여주 시점의 뒷 이야기를 써봤습니다.

배운 것도 없고 경험도 없어서 글의 질이 많이 떨어질텐데도 읽어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부족하거나 아쉬운 부분들을 남겨주시면 앞으로 글을 쓸때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