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로부터 나의 일상은 바뀌었다.

첫째로는 이동 수업을 하지 않게 되었다. 수험생들을 배려하는 차원이라나. 휴대폰도 아무 말 없이 제출하지 않아도 선생님들께서 알아서 납득해 주셨다. 

둘째로는 친구들과 만나는 일들이 적어졌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예체능 계열 지망이라, 출석만 하고 학원으로 가는 일이 잦았다. 덕분에 적적함이 한층 강화되었다.

셋째로는, 그녀와 만나는 일이 없어졌다. 

...

이 정도인가.

+++

그 날 이후로는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본 일은 있어도 아는 채 하지 않았다.

그녀도, 나도. 서로 아는 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생각인지 잘 모르겠으나, 나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와 나는 단 한 순간도 연인인 적이 없었고, 난 단 한 번도 연애따윈 해 본 적이 없었으나, 만약 결별한 연인을 만난다면 지금 내가 그녀를 마주할 때 느끼는 기분이리라, 하고 나는 이해하고 말았다.

우습게도 나는 아직 그녀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것 같다. 

나는 늘상 그랬다. 어떤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은 타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어중간하기 짝이 없는 졸작에 그치고 말았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판단 기준 자체가 다르니까. 나는 애매한 사람이기에, 내 입장에서 완벽한 것은 다른 완벽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애매한 것이다. 

아무튼 그녀와 마주치는 것이 내게 버거운 이유는 그러했다. 

혹시 마주치면 인사하게 될까 봐. 인사하면 근황을 떠들고 싶어질까 봐. 근황을 떠들다 보면 웃게 될까 봐. 

그러다 보면 다시 너를 좋아하게 될까 봐. 

그런 그녀도 나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날의 일로 이제는 내가 완전히 싫어지게 된 것인지, 그녀도 나를 마주치려 하지 않았고, 우리는 마주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쳐갈 뿐이었다.

매주 주말마다 나가던 우리 두 가족 간의 모임도 이제는 나가지 않았다. 

너를 보는 것은 너무나 괴로웠지만, 너를 보지 않는 것은 더 이상 괴롭지 않았다. 

이제는 네가 나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졸업을 앞두고 더욱이 집중할 일들이 있으니까.



정말 그것 뿐인가?

...


"그럼 뭐가 더 있겠어."


혼자 이런 말을 중얼거리며 곧장 집으로 향했다. 

익숙한 향기가 났다.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

집으로 가던 길에 돌연 우리 집 근처에 있던 공원이 떠올랐다. 

그 공원을 말하는 것이 맞다. 왜인지는 몰라도 오늘 그 공원에 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왜일까. 그 공원은 이미 낡아 빠지고 관리도 되고 있지 않아, 그네와 철봉을 이용하는 것과 길을 따라 걷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공원이라기 보단 공터와 비슷한 곳인데. 

왜일까. 정말.

그렇게 걸었다. 무작정 걸었다. 미친듯이 걸었다. 그 곳으로 가기 위해.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예상 밖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옅은 곱슬기가 있는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에, 동그란 눈, 꼬집기 딱 좋을 정도의 볼살, 아담한 체구를 가진,

무엇이든 잘 하고, 무엇이든 좋아하는, 완벽한, 나의 이상향이자 이상형이자, 내가 사랑했던, 

또 내가 사랑하는, 그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그 날 이후로 나의 일상은 바뀌었다.

다른 자잘한 것들도 있겠지만, 가장 큰 건.

그를 만나지 않게 되었단 것이다.

남자친구? 이제는 어떤지 모르겠다. 여하튼 자주 만나던 연하의 남성은 그 사실을 달가워 했다. 남의 불행을 보고 달가워 하다니, 정말이지 글러먹은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를 만나지 않는 나날은 지옥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만나러 갈 수 없었다.

그가 더 이상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지기만 할까 봐. 

그가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까 봐.

그에게 거절 당할까 봐.

그를 거절했으니까.

만날 수 없었다.

지금도 내 옆에 서서 알 수 없는 소리나 지껄여 대는 남자는, 그가 아니었다.

이 남자는 나와 공유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취미도, 특기도, 좋아하는 음식도, 음악도, 진로 희망도, 어릴 적 추억도, 교우 관계도. 그 어떤 것도 공유하지 않았다. 


사람은 자신과 닮은 이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지만, 그와 비슷한 정도로 완전히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도 끌린다고 한다. 자신에게 결여된 부분을 찾아 헤매는 본능 때문이라나.

그런데 왜일까. 이, 나와 닮은 구석이라곤 같은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는 어떤 점도 없는 이 남자가, 이다지도 매력 없어 보이는 것은.

사실 알고 있다. 사람이 자신과 반대인 사람에게 끌린다는 것은, 서로에게 결여된 부분을 채워가는 과정에 그 결과를 의존한다는 것을.

그는 노력했다. 나와 닮은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강화하려 힘 썼고, 나와 닮지 않은 부분이 있을 때면 그 부분을 나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은 비단 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껏 서로 닮아가는 과정을 밟아왔다. 일례로 나는 그가 좋아하는 적당히 달콤한 초콜릿 음료를, 처음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지만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는 그와 같은 적당히 달콤한 초콜릿 음료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 남자는 그 처럼 노력하지 않았다. 우리는 교제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전혀 닮아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나도 노력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러한 연유로 그저 아무 관심도 없는 남자가 아무 관심도 없는 헛소리를 떠들어 대는 것을 가만히 들어주다가, 아무 관심도 없는 그의 집에 들어오라는 것을 아무 관심도 없기에 거절하고 돌아오는 불행하기 짝이 없는 무의미한 나날들이 반복되던 중.



"요즘 누나 우울해 보이네. 혹시 그 남자가 누나한테 뭐 했어?"



이 남자의 입에 그의 이름이 올라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맥락상 누구나가 그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격분했다. 이렇게 화가 난 것은 아마 인생에서 최초이리라. 하등한 것이 감히 그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이 너무나도 불쾌했으나, 그 이상으로 그를 여자에게 몹쓸 짓이나 하는 쓰레기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그 길로 나는 이 남자에게 결별을 선언했다. 그는 붙잡았으나, 그 역시 나에게 있어선 아무 의미 없는 행위였기에 듣지 않고 돌아 섰다. 


"이제 어쩌지..."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상기한 이유로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거기다 이제 와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며 그를 찾는 모습이, 그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묻지 않는 편이 나을 정도로 뻔한 질문이었다.

그는 지금도 내가 그를 단순히 친구로만 바라보는 줄 알고 있다. 당연하다.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러나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으니까.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까.

그를 친구로 보지 않고 있었다면, 그에게 지난 십 수년간 품어왔던 감정이 사랑이었다면, 그에게 보일 낯이 없었기 때문에, 줄곧 부정해왔다. 그는 자의인지 타의인지, 단 한 번도 연애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손잡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허락한 적은 없었으나, 그 이외의 남성에게 마음을 허락한 적이 자그마치 5번이나 되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내가 그에게 품은 것이 단순 친애가 아니라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내심 알고 있었음에도, 애써 부정한 결과가 그것이었다. 스스로가 죄인처럼 느껴져 왔다. 


문득 손목 언저리가 답답했다. 옷을 걷어보자, 내가 결별을 선언한 남자에게 받은 허접한 팔찌가 내 손목을 옥죄고 있었다. 팔찌를 이루는 얇은 천을 걷어내면 그 밑에는 고무줄이 있을 것이 분명했음에도, 이 팔찌가 지금은 내 죄를 심판하려는 것처럼 내 손목을 강하게 구속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이 족쇄를 풀어내곤 조각 조각 내어 쓰레기 통에 버렸다. 그럼에도 내 손목은 어떤 것이 계속해서 옥죄고 있는 것만 같이 답답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미친듯이 내 손목을 긁어내고 있었다. 손톱 밑에는 벗겨진 피부 조직들의 찌꺼기가 잔뜩 끼어 있었고, 손톱으로 긁어낸 자리에는 손톱 자국대로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어떡해..."


나는 서둘러 상처가 흉지지 않도록 조치한 뒤 밴드를 붙혔다. 상처가 나거나 피가 나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으나 그에게 흉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문득 이대로 계속해서 상처를 낸다면 그가 나를 걱정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나, 역시 그만두었다. 


언젠간 그에게 주어야 할 몸이니, 상처를 낼 거라면 그가 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앞으로 해야할 일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그의 눈에 들기 위해, 다시 그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우선,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가 자주 하던 게임부터, 바느질, 십자수, 큐브 맞추기, 등등. 결코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어느 정도로만 연습해 놓은 뒤, 그와 함께 잘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애시당초 그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것들을 시작하는 의미조차 없었다.

그 다음은,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는 중학교 시절 허리까지 오던 내 머리를 좋아했으나, 지금의 나는 어떤 하찮은 남자의 영향으로 머리를 약간 자르고 말았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적당히 살을 찌우기 위해 평소보다 약간 더 많은 양을 먹고, 피부를 관리하기 위해 일찍 잠에 들었다. 상기한 남자의 영향으로, 남들로부터 '말랐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살을 뺐으나, 그는 약간 살집이 있는, 특히 꼬집기 좋은 볼살이 있는 여자를 좋아했다. 다행히도 이것들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시작 후 3일만에 목표하던 수치를 달성해 내었다.

그렇게 내가 원하던, 그가 좋아할 만한 모습을 가꾸어 내는데 성공한 나였으나,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를 불러낼 수가 없었다. 그는 나와 마주칠 만한 자리를 모조리 피했으며, 복도에는 아예 나오지 조차 않았다. 귀가는 항상 지나던 길이 아닌 빙 돌아가는 길로 하였다. 그렇다고 그의 교실이나, 그의 집 앞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난 죄인이었으니까. 감히 그를 보챌 수 없었고, 그를 불러낼 수 없었다. 그저 우연히 그를 마주치거나, 그가 먼저 나를 찾기를 바랄 수 밖엔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고, 졸업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미쳐버린 것인지, 학교가 끝나자 마자 그 날의 공원으로 향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 날의 일을 떠올리기 위해서인지, 그의 향취를 맡기 위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미쳐버린 것인지.

...

아니, 마지막 말은 조금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옛적부터

미쳐있었기 때문이다. 

종현, 너라는 사람에게.



익숙한 향기가 났다.

+++

"...종현아."


"...오랜만이네."

"...응."

"여긴, 왜 왔어?"

"응, 그게 있지이..."

"나도 모르겠어..."

"종현이 너는?"


"나는..."


"...글쎄."

"그냥..."

"그냥?"

"그냥... 익숙한 향기가 나서."

"우연이네. 나도 그랬는데."

""있잖
아.""

"...너 먼저 말해."

"...응."

"종현아."


"응."

"나, 너 좋아해."

"...왜?"

"왜라니?"

"왜... 이제 와서?"

"..."

"이제야, 널 털어낼 것 같은데. 이제야 널 포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왜 하필 이제 와서?"


"미안해."

"너무 오래 기다렸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하아, 너, 남자친구는..."

"걔랑은 진작에 헤어졌어."

"...!"

"있잖아, 종현아. 나아, 네 마음에 들고 싶어서 너 하는 건 다 해봤어. 퀼트도, 롤도, 체스도, 십자말풀이도, 마술도, 커피 만드는 것도."

"별자리 구분하는 법도 배웠고, 타자도 많이 연습했어. 노래도 많이 연습했고, 매운 것도 많이 먹어봤어."

"검도도, 수채화도, 마방진도, 영상 편집도, 끝말잇기도, 기타도, 작문도, 효율적인 방 정리도, 조각도, 응급 처치도, 배드민턴도, 사진 찍는 법도, 호른도, 프로그래밍도, 조형도, 종이접기도, 매듭 묶기도, 그림자 놀이도, 서양식 농담도, 컴퓨터 부품 보는 법도, 인터넷 커뮤니티도, 제과 제빵도, 원근감이 느껴지는 채색법도, 틀리기 쉬운 맞춤법도, 소설의 3요소도, 영화 감상도, 조향법도, 카드 셔플도, 스네어 드럼도, 한자 성어 외기도, 작곡도, 사진 보정도, 포토샵도, 베이스 기타도, 슬릭백도, 라틴어도, 폴리 아트도, 하프도, s보드도, 휘파람도, 비트박스도, 리프팅도, 바둑도, 루미큐브도, 가구 조립도, 피아노도, 스파이크도, 다도도. 다 연습했어."

"종현아. 나, 나아... 진짜 노력 많이 했어."

"..."

"나, 나 있지이. 졸업하고도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너랑 같은 대학교 같은 학과 지원했어어..."

"...그건 또 다 어떻게 알았는데."

"...너희 어머니께 몰래 물어봤어."

"하아..."

"조, 종현아아... 지금까지 미안해... 미안했으니까아..."

"나, 나 제발..."


"그만."

"..."

"됐어."

+++

익숙한 향기를 쫓아 도착한 공원에는 그녀가 있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눈다. 

그녀가 왜 여깄는지 물었다.


"응, 그게 있지이... 나도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배시시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우는 것처럼도 보였다.

향기를 쫓아 왔다고 말하니 그녀도 그렇다고 말한다. 어딘지 안심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있잖아.""


그녀와 나의 발화가 겹친다. 선수를 그녀에게 양보하였다.


"나, 너 좋아해."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떠오른 질문을 던지자, 그녀가 조금 울먹이며 말을 잇는다.

퀼트, 체스, 호른, 베이스 기타, 등등... 

지금껏 내가 좋아서 해온, 그러나 그녀는 하지 않았던 것들이 수없이 열거된다.

설마 그 짧은 시간 안에 저것들을 전부 했다는 걸까. 정말 그녀의 재능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거기다 뒤에 이르러서는 거의 울음을 터뜨리며 자신도 나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지원했다고 말한다.

그녀의 진로는 나의 진로와는 전혀 무관한 이공계열이었을 텐데. 내가 가고자 하는 학교는 그녀에게 있어서는 극 하양의, 넣으면 붙는 정도의 내신 등급만을 요구하는 학교일 텐데. 물론 그녀만큼 우수한 학생이라면 언제든 자신의 진로를 수정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조, 종현아아... 지금까지 미안해... 미안했으니까아... 나, 나 제발..."


그녀가 거의 바닥을 길 수준으로 울고 불며 사과?를 해온다. 

...


"그만."



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무언가 더 말할 것이 있는 눈치였으나, 나는 그것마저 끊었다.


"됐어."


왜냐면,


"서휘야."


그런 사과 따위는,


"나도 너 좋아해."


이젠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


예상외의 말이었던 걸까. 그녀가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다. 조금 기다리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린다.

그녀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난 그걸 받아 안아주었다.


"조... 종현아아...! 나, 나아..."

"응. 알아, 알아. 나야말로 미안했어."

"윽, 흑, 나, 나아, 앞으로 진짜 잘할... 흑, 흐아아앙..."


그녀가 나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는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 뒤, 그제야 진정된 것인지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본다.

나 또한, 반작용으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눈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는 까치발을 들며 내 뒷목에 손을 감아 왔다. 

곧이어 우리의 입술이 마주치려 했으나, 난 장난기가 발동하여 고개를 숙여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내 뛰어 올랐고, 나는 그녀를 받아 안아주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나는 공원 가운데 대자로 쓰러졌으며, 그녀는 아랑곳 않고 나의 입술을 탐했고, 반작용으로 나 또한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하아, 종혀나... 사랑해애..."

"응, 나도..."


우리는 그렇게 공원 가운데 누워 있는 모양새로 한참을 있었다.

+++

평생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해온 나를, 

그녀를 향한 감정의 경계에서 줄타기 하던 나를,

그녀가 당겨 버렸고.

그 탓에, 그 덕에. 나는 이제서야 애매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서야, 나는 경계에 서 있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나를 끌어당겨 넘어뜨려 버렸으니까.

더 이상 언제 넘어질지 불안하지 않았다. 

더 이상 이 가을이 춥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