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플갱어. 자기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가리키는 독일어.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는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그 말은 틀린 게 틀림없었다.

면접을 보고 집에 터덜터덜 돌아가는 길에, 한 교차로에서 도플갱어를 만났으니까.


단 12년 전의 모습,

그리고 여자애라는 점만 빼고.


내가 나온 남녀공학의 여자 치마, 멋드러진 교복 넥타이.

검고 긴 머리카락은 살짝 부스스하고 

안경은 쓰지 않고 공부에 정신없느라 졸린 눈.

애매하게 긴 치마 아래에는 쓸데없이 짤 빠진 몸이지만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있느라 살짝 굽은 자세.

털털한 후드티에 대충 질끈 묶은 앞머리. 


학생 때의 내가 여자였다면 딱 저랬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외모는 아니지만

'여자니까'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얼굴. 


7의 여자라고 할까.


어쨌든 도플갱어, 아니 나 역시 똑같이 생각한 건지

눈을 마주치자 눈동자가 경악으로 치켜뜨여 있었다.


"너...나지?"


상투적인 대사. 

그렇지만 누가 누구라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성인 남자 오피스룩 개꼴린다."


도플갱어는 내가 양복을 걸친 모습을 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등학생 여자애가 그런 소리를 하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오피스룩 아냐 임마. 취준생이야."

"그 몸을 가지고 취준을 해? 개아깝다."

"에휴...이게 지금, 그러게 말이다. 나이 서른인데."

"뭐? 그럼 띠동갑이네. 음. 근데 왜 남자야? 난 여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물어주는 여고딩.


"내가 말하고 싶던 건데. 난 남자란 말야. 왜 여자지?"

"너, 아니지, 오빠네 세상이 바뀐 거 아냐? 여긴 그대로인데."


도플갱어, 아니 고삐리 여자애는 조그만 손을 들어 거리를 가리켰다.

옛날 모습이었지만 서울 거리는 변한 바가 없었다. 

오래된 무인텔, 약국, 카페, 지하철역 앞의 KFC- 


"어? 이런 젠장. 뭐야. KFC 간판에 왜 할아버지가 있어?"


당황하는 여자애.


"원래 이게 맞다니까. 아마 네가 이쪽 세상에 떨어진 게 아닐까 하는..."


말을 하다 말고, 교차로의 지하철역 앞에서 

가슴이 봉긋한 여자가 군복을 입고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에는 작대기 네 개.


"...돌겠네. 왜 여자가 군인이야."


여자애 역시 내 변화를 알아챈 건지 당황한 얼굴로 같이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길가에는 우다다 뛰어가는 초딩과 길가에서 화장을 고치는, 누가 봐도 우리 세상의 여자. 

그렇지만 옆 고깃집 벽에는 수영복을 입은, 고간이 불룩한 남자가 소주병을 든 광고 사진.

그 반대편에는 도로 훤칠한 남자에게 꼭 달라붙은 여자 커플.

그 옆에는 여자 군인이 반팔티에 반바지를 입고 수줍어하는 남자에게 달려가 껴안고 키스하는 모습.


혼자였다면 당황해서 미쳐 버리기 직전이었겠지만

우리 두 사람, 아니 나 두 사람은 생각보다 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섞인 거지. 아마. 우리 좋아하는 SF 영화마냥, 아니면 크툴루 TRPG."

"서울이지만 서울이 아닌 곳, 그런 거구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를 더욱 잘 둘러보자 10년 전과 지금이 묘하게 섞인 길거리 모습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마 우리가 우연히 만나게 된 거 같다. 과거와 현재가 만난 거지. 나는 2020년대고,"

"오? 2020년대? 와. 미래인? 스즈미야 하루히 그거?"

"언제적 소설이야..."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상황을 대충 파악했다지만 가슴이 아직 뛰었다.

아마 이 교차로가 문제겠지.


과거와 지금이 수직으로 교차해서 생긴 일.

그렇다면 이 이상한 일도 금방 흘러가는 게 아닐까?

그렇게 희망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와- 근데 남자가 담배피는거 개섹시하네. 개따먹고싶다."


담배 연기가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다. 이 년이 진짜.


"야, 넌 여자애가 말 좀 이쁘게 해. 섹무새야?"

"응? 뭐?"

"됐다. 그리고 너 담배 끊어라."

"싫어. 나도 한 개비만."

"피우지 말라고!"


뻔뻔하게 손을 내미는 여고딩 고삐리의 손을 휙 쳐냈다.

순간 죄책감이 들었지만

히죽히죽거리는 모습을 보자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야. 진지하게 하는 소린데 너 담배 끊어."

"아 뭐래. 어른 될 때까지 피운 거 아냐?"

"그러니까 지금 끊으라고. 안 그럼 평생 핀다고."

"시른뒈에- 공부하다 피면 스트레스 조지는거 짱인뒈에- 

그리고 내가 나한테 왜 잔소리?" 

"...뭐 이건 메스가키 여고딩이냐."

"어? 뭐라고?"

"됐어!"


부여잡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긴, 거울에 대고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왜 못 이기냐고 성내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에휴...아. 그래. 너 사회 과목 바꿔. 그리고 공부 더 열심히 해. 제발. 서울대 가고 싶으면. 한 문제 차이로 후회하지 말고."

"오 씨발, 갈 수 있어?"

"아 그놈의 욕 좀 하지 말라고!"

"와. 그놈이래. 개야해."


킥킥거리는 여고딩.

물론 학생 때의 내 모습 그대로였다. 매일 이어지는 야자에 정신이 나가 저렇게 됐겠지.

그래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심히 화나는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배에서 재가 떨어질 시간쯤이 되어서야 


주제를 바꿔 툭 하고 내뱉었다.


"너 같은 반에 은주 있지."

"응? 누구?"


아. 그렇지. 

남자 여자가 바뀌었으니 이름도 바뀌었구나.


"좋아하는 남자애 있을 거 아냐. 

맨날 집에가서 상상하면서 자위하는 그"



"아아아아아아아아 승훈이 얘길 왜해! 미쳤어?"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악을 쓰는 고삐리.


"너 내일 당장 가서 고백해라. 후회한다."

"우으으-"

"야! 나 말 들어. 후회한다고! 나중에 다른 남자, 아니 다른 여자랑 결혼한 거 페북으로 보기 싫으면!"

"나 귀찮아서 sns도 안 하는데 무슨-"

"좀 해 제발! 아싸로 살지 말고! 너 친구들 다 괜찮으니까 니가 먼저 다가가! 은주, 아니 그 승훈인지 꼭 잡고!"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여고딩은 축 쳐진 채로 더듬거렸다.


"내가? 고백하면? 받아줄까?"


속이 터질 지경이 된 나는 교복 차림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가슴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 사이즈 C에서 D컵은 되겠구만. 걍 먼저 가서 부비든지 젖탱이로 때리든지 해!"


그렇지만 여자애는 황당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남자가 그런 걸 좋아해?"

"당연하...음. 그러네. 세상이 다르면 그거도 바뀌나?"


어려운 질문이었다. 

가슴에 대한 선호는 세상이 바뀌어도 그대로겠지.

그렇지만 저쪽 세상에선 여자가 먼저 남자를 꼬실 거고.

가슴을 내보이는 것 자체로는 꼬셔지는 건 아니겠지. 

여우짓하는 건 남자일 테니까...


순식간에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자니

여자애는 내 아랫도리를 흘끔흘끔 훔쳐보다 물었다.


"근데 있잖아. 나 남자면 발기하면 자지 14cm 넘어?"


담배를 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그렇지. 같은 나니까 생각하는 게 다 똑같겠지.

어떻게 씨발 물어보는 수준 하고는.


"야. 여자애가 길바닥에서 발기 자지 그러지 좀 말라고."

"아 왜에. 여자니까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진지하다고. 너 섹스해봤어?"

"아니 교복 차림으로 섹드립 좀 그만 하라고! 니가 무슨 남고딩이야?"

"나 진지하다니까? 진짜 30살까지 섹스 안해봤다 그러면 죽고싶을 거 같은-"


결국 버럭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야! 대학 가면 어차피 다 섹스해! 제발 공부해 공부! 혼자 콘돔 사고 헛짓거리 하지 말고! 

여자친구 만나서 연애하고 해외여행때 원나잇도 하고 할거 다 하니까 공부를 좀 처 해! 그리고 너 학교에서 아싸 되지 말고!"

"아싸라면서 원나잇도 해?"

"인싸였으면 20배는 더 했을 거니까 제발 인싸 하라는 거야 이것아!"


아마 내 얼굴이 여자애마냥 새빨개져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으니.


그렇지만 고삐리는 내 진심어린 충고를 듣는지 마는지

작게 오, 하고 감탄할 뿐이었다.


다음 개비를 꺼낼 때가 되어서야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휴...돌겠다 진짜. 야. 너 진지하게 잘 들어. 나이 서른만 되어도 섹스가 중요한 게 아니야. 

아 그래. 너 당장 집에 가서 비트코인 사."

"뭐? 나 초등학생 때인가 나온 그거? 그거 폰지사기잖아. 구조적으로다가."

"그래 잘났다. 폰지사기 맞으니까 사라고."

"아니 대체 그런 걸 왜-"

"시끄러워! 당장 가서 사기나 해!"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일이 이렇게 속터지는 일이구나. 

어린이 신문에 나온 비트코인을 비웃지만 않았어도 인생이 확 달라졌을 거라는

세상에서 제일 허무한 생각이 들 뿐이었다.


아마 도플갱어, 아니 나 역시 비슷하게 생각하는지 고개를 으쓱할 뿐이었다.

내가 맞다면 코웃음치고는 집에 가서 상딸이나 한 번 더 치겠지.


사춘기의 성욕을 감안하면 틀림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똑똑한 척 해 봤자

결국 대가리에 든 건 섹스뿐이었다.


"근데- 그럼 나 첫경험은 누구랑 했어?"

"...어플로 만난 여자애랑. 대학 들어가고."

"여자? 아, 남자. 걔 잘생겼어?"

"백인이야. 랜선연애. 한국 와서 사귀어."

"와 씨발!? 레알?"


여자를 쥐어박고 싶단 생각이 든 건 난생 처음이다. 


"걍 평범해. 괜히 기대하지 말고."

"아니 백인? 진짜? 백마잖아. 잘생겼어? 자지도 커?"

"그만 좀 해라 제발... 아. 걔 친구랑 둘이 같이 오는데 쓰리썸할 생각도 하지 마라. 들켜서 존나 웃는다."

"와 씨, 그걸 어떻게 참아?"


답을 다 알려줘봤자 죽어도 안 듣는 모습에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응? 또 누구 따먹는데? 빨리 말해 봐."

"에휴...어플로 만난 사람 몇 명, 그리고 여행 좋아하잖아. 해외여행 가서 원나잇 열몇 번. 아, 더 있긴 하다."

"오오오오 나 개쩌는데!"

"야. 제발, 혼자 쿨한 척 아싸만 안 했으면 훨씬 나았을 거라고. 그게 문제라니까? 섹스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래도 외국인 개쩔지 않나?"

"아니 너 반에서 여자애랑 평범하게 사귀고 오래 가고 결혼하는 만남이 있는 게 백 배는 더 중요하다고."

"그래도. 백마 이거 완전 대박인-"


결국 번개같이 정수리를 한 대 쥐어박을 수밖에 없었다.  

아얏, 하고 귀여운 소리가 났다.


"근데 넌 왜 섹스밖에 생각을 안 하니 대체. 미래가 어떨지 궁금하고 그러지 않아?"

"어- 궁금해 조금. 2020년이면 막 자동차가 하늘을 날고 그래?"

"아니."

"우주여행은 갈 수 있어? 달에 가고 화성에 가고 그래?"

"아니."

"통일은 안 했을 거 같고. 나 군대는 가야 돼?"

"응."

"제대로 된 거 뭐 하나도 없잖아. 뭐가 미래라는 거야."

"...그러게 말이다."

"근데 그럼 결혼은 했어? 누구랑? 그 여자애?"

"아니. 금방 헤어진다고. 허무하다니까."

"그럼 직업은 뭔데?"

"백수."

"뭐야, 나이 서른 살이라며?"





"이 새끼야! 그러니까 공부하라는 거 아니야 지금!"


한 대를 더 쥐어박았지만

도플갱어는 옆으로 쓱 피했다.

저거 시발, 나 맞네.


그렇지만 여자애는 풀 죽은 듯 중얼거렸다.


"아니, 30대면 결혼도 하고 대기업에 취직도 하고 애기도 있고 잘생긴 남편도 있고 알콩달콩하고 그럴 줄 알았지 난."


은근 보수적인 게 역시 내 모습 맞다. 

그렇지만 잔소리하는 나도 풀이 죽는 건 똑같았다.


"그러니까 말하는 거 아니냐, 아. 대학교 때 사법고시 한다고 혼자 시간낭비하는데 그거 하지 마. 

아니. 해도 되는데 할 거면 제대로 해. 학원을 가든 뭘 하든. 혼자 신림동 가면 인생 낭비한다."

"으음- 사법고시? 내 머리로 되나."

"되니까 하라고."

"못 붙어서 백수라며."

"그러니까 제대로 하라고 제대로!"

"아 소리 좀 그만 질러!"


자기 자신과 아웅다웅하는 일은 고시보다 열 배는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 시간만 안 날렸어도 취직은 껌이었을 텐데. 덕분에 자기소개서에 쓸 이력만 비고.

그렇지만 내 자신을 탓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이 여자애에게는 먼 미래의 일이었으니, 이 친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풋. 이쪽 세상이었으면 몸 팔면 진짜 잘나갔을 텐데. 그 뭐? 오피? 이런 거 있지 않나?"

"야. 여자애가 그런 말 좀 하지 말랬...됐다 그냥."


내가 이렇게 섹드립을 많이 했던가.

이 친구 입장에서는, 연상의 오피스룩인 여자를 만난 데다 

엄청 편하게 느껴졌으니

평소 하고 싶던 말을 다 쏟아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근데- 우리 어떡하지? 여기 교차로가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내 생각은...글쎄. 그냥 걸어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가로줄과 세로줄. 

그 교차점에서 만난 우연.

아니면 우연이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방법은 간단했다.


"밑져야 본전이잖아? 실험해보면 되지. 가던 길로 따로따로 걸어가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나 보자고.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보면 믿는다. 요한복음 20장 24절 말씀."

"아, 역시 나 맞네."


여자애는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나 역시, 아니 우리는 끝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마 내가 한 충고들이 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어."

"왜? 아- 그지그지. 맞다. 타임 패러독스."

"그래. 너가 지지리도 말을 안 들어서 미래가 안 바뀌는 거지."

"근데 내 입장에서 미래는 항상 바꿀 수 있잖아. 만약 내 미래가 바뀌면-"

"네 입장에서 나는 미래니까, 내 모습도 같이 바뀌려나."


우리는 잠깐 생각하고 

동시에 고개를 휘저었다.


"아니다에 5백 원. 우리 경우는 평행세계에 더 가까울 거 같아. 같은 세상의 현재와 미래 모습이 아니라-"

"그래. 아니다에 만 원. 남자 여자가 바뀐 비슷한 세상의, 몇 년 차이나는 시간대인 거지. 그게 물리학적으로 더 말도 되고."

"아, 빛보다 빠르지 않으면 미래에서 과거로 거슬러올라갈 수 없으니까?"

"그래."

"진짜 우연히 다른 세상이 겹친 거네. 영화처럼."

"원래 인생이 그런 거야."


내 말에 여자애는 웃음을 터뜨렸다.


"풋. 그런 말 하기 너무 어린 거 아니야? 오빠 아직 동안인데."

"됐어 이것아."


미소가 생각보다 귀엽게 느껴져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 친구는 썩 그걸 마음에 들어할 것 같지 않았고


나는 내 머리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갑자기 뭐 해?"

"칭찬. 어차피 내 몸이 네 몸이니까."

"풋. 뭐야 그게."

"여튼 꼭 기억해라. 비트코인. 그리고 힘들다고 징징대지 말고 조금만 더 열심히 하고."


어깨를 으쓱 하는 고삐리를 내버려두고 

나는 교차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그냥 걸어가면 돌아갈 수 있을 거란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럼 잘 가고. 공부해야 하는데 내가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나 모르겠다."


논쟁에 지친 몸을 빙글 돌렸을 때였다.


 


"잠깐, 잠깐만!"


여자애는 내 양복 소매를 잡고 있었다.


"왜?"


수험 스트레스에 쩔은 시선이 내 몸을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추억이 모락모락 되살아났다.

새벽까지 야자하다 죽은 듯 잠에 들던 나날.

대학만 잘 가면 될 거라고 되뇌이며 책상에 붙이던 날들.

모든 학생들이 가진 회색빛 추억.


그런 친구에게 다시 대학 잘 가란 잔소리를 하다니, 하고 씁쓸해하던 참이었다.


"야. 너. 아니 오빠."

"응."

"그-"

"뭐. 말해."




"오빠, 나 한 번만 대주면 안 돼?"


생전 처음 듣는 여자애의 목소리.

짜릿한 스릴이 등골을 싸늘하게 휘감았다.


"미친..."

"아니 진짜! 나 공부 개같이 열심히 한 거 알잖아! 이거도 기회 아냐?"

"무슨 기회...아,"


"아다 좀 떼자 나도!"


여자애가 내 복근에 뻗는 손을 가까스로 잡았지만

힘에는 별 차이가 없었어 터치를 허용해야 했다.


"응? 제발, 제발."

"야. 아니, 돌았나 이게. 내 입장에서는 고딩이랑 하는 거라고."

"니 취향 맞잖아!"


나는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돌아가서 좋아하는 애한테 제대로 고백하라는 것도,

아싸 생활 그만두고 친구들 만나라는 것도


결국 고딩때 연애 못 해보고 여자를 못 따먹어 봤다는 후회에서 오는, 내 대리만족이었으니.


도플갱어는 이미 첫 마디부터 궤뚫고 있던 게 틀림없다.

교복을 입은 여자인 자기 모습이 

남녀역전세계의 내게 어떻게 비칠지 쯔음은 역시,

그 쓸데없이 좋은 잔머리로 금방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본인이 스트레스에 미쳐버리기 직전인 사춘기 남고생의 성욕을 가진 여고딩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런 결말은 당연했을 것이다. 


"할 말 있어? 나도 연상 오빠 한 번 따먹어보자. 로망이잖아? 길 지나가는 여고딩들 잡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다 로망일걸?"

"그...아니, 그러네. 음. 그래. 남고딩...에휴."


연상 오피스룩 누나를 거부할 남고생이 몇 명이나 될까.

도플갱어, 아니 나는 다 안다는 듯 킬킬대고 있었다.


"오, 안다. 변명이 필요하다 그거지. 내가 말해 줄까? 아님 오빠가 말할래?"

"휴..."

"이거 그냥 자위라고 생각하자고, 응? 내 몸이 오빠 몸이잖아. 섹스 아니라 자위지 이건."


나는 대꾸할 거리를 찾을 수 없었다.

맞는 말이기도 했고, 

어쩌면 알량한 양심 이외에 대답할 말을 찾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이 고딩 여자애의 야한 몸을 음란한 시선으로 보는 것 그 이상으로

여자애는 내 양복 차림을 음란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아니, 어린 만큼 표정을 숨길 수 없어

당장이라도 홀딱 벗겨서 남자의 온몸을 핥고 싶다는 욕망이 

얼굴에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다.



여자애는 어느덧 까치발을 들고

넥타이를 자기 쪽으로 휙 댕겼다.

우리 둘의 머리가 만나고 있었다.

귀에서 뜨거운 바람이 느껴졌고


여자애는 이렇게 속삭였다.


"아다 고딩 보지, 따먹고 싶잖아."


나는 그 시점에서 나 자신과의 게임에 져 있었다.

섹스 경험이 있는 건 나고, 없는 건 이 친구였을 텐데

되려 본능에만 충실하게 남의 자지에 함부로 손을 대는 걸 나는 막을 수 없었다.

아니, 나 역시 교복 위로 탱글탱글한 가슴을 힘껏 주물러대고 있었다.


"와...씨발...벌써 섰어? 나 이렇게 야해?"

"넌 고삐리 주제에 벌써 질질 젖었을 거면서."

"시끄러워. 젖는 건 남자지. 쿠퍼액." 


그렇게 서로의 몸을 탐닉할 뿐이었다.

입술과 목덜미가 침으로 흠뻑 젖고,

교복과 양복 사이로 열두 살 차이가 나는 자지와 보지를 한참이나 맞댈 쯔음


우리는 길거리에서 서로 떨어져

누가 먼저일 세라 할 것도 없이

교차로에 있는 무인텔을 쳐다보았다.


어릴 때면 지나갈 때마다 괜히 음란한 상상을 하고는 했던 곳.

결국 대학 때 들어가서 여자친구와 들어가 첫 경험을 한 곳.

지금에야 모텔에 가면 치약 칫솔과 수건이 나오고 냉장고에는 더럽게 비싼 음료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걸 이 여고딩이 알 리 만무했다.


그래서 도플갱어는 입구를 들어갈 때까지도 침을 꿀꺽 삼킬 뿐이었다.


"...내가 산다. 성인이니까."

"오오오오오오 씨발! 연상남!"

"좀 닥쳐. 안 섹시하니까."

"난 오빠가 욕하는거 존나 섹시한데?"


무인텔에는 이름답게 알바가 없고 자판기가 있을 뿐이었다.

대놓고 교복을 입고 들어오는데 말리는 사람이 없던 건 

예전에 규제가 느슨했던 탓일 지도 몰랐고

다른 세상의 장소여서 그럴 것인지도 몰랐다.

하긴, 이 친구 입장에선 cctv에 찍혀봤자 

'여자가 그럴 수도 있죠' 하고 뻔뻔하게 나갈 수도 있겠거니와

성적이 좋은 학생인 덕에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 봐줄 수 있을 일이었으니.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이 기회를 날릴 머저리는

양쪽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이었다.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입술을 다시금 탐했다.

열두 살 차이가 나는 연하 고등학생의 입술.


누가 먼저 위를 차지하느냐 하는 일로,

어떤 것이 정상위냐 하는 일로 알몸인 채 살짝 아옹다옹하는 일이 있었지만

결국 리드를 하게 되는 것은 경험이 있는 나였다.

아다를 뚫으려면 보지를 적셔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으니.


그리고 또 말해야 할 것이라면


"아 씨발....보빨 너무 좋...아...흣...흐읏!"


침대에 누워 보빨받는 상황을 이 친구는 너무나도 즐기고 있었으므로.

도플갱어 여고생은 침대 모서리에 앉아 미끈한 다리를 벌린 자세로

내 머리칼을 꼬옥 잡고 있었다.

이 친구의 입장에선


연상의 여자가 침대 앞에 무릎꿇고서 정성스레, 또 능숙하게 자지를 빨아주는 상황이었으니.


"하...씨...발... 걸레새끼. 개같이 잘 하는...읏!"


그렇게 욕할 만큼 정복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할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나 역시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넣는다. 벌려."

"벌리라니-흐윽?!"


나 역시 이 자지로, 아다 여고생의 보지를 궤뚫을 수 있었으니까.

아아. 결국 아다를 먹게 되는구나. 처음으로.

그런 충족감이 몸 안에 가득찼다.


이 친구는 자신이 침대에 깔려 억억대는 걸 꽤나 창피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능숙하게 허리를 놀려, 이 아다녀의 보지를 위에서 공략했다.

어쨌든 내 보지니까.


"아. 흐읏. 읏. 으읏....천. 천천히."

"뭐야. 아파?"

"아니, 으읏. 그럴 리가. 벌써 싸면 아깝..."

"풋."


다른 세상의 여자는 생각하는 것도 다르구나.

속궁합은 놀랄 정도로 좋았다.

만약 나이마저 같았다면 평생 섹스만 하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누가 누구를 따먹는 것이었을까?

이 친구에게 물어보면 '당연히 내 아랫입에 넣은 건데 내가 먹은 거 아님?'라고 할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입이 험한 점들이나

묘하게 상식이 다른 점들만이 


섹스가 끝난 후 우리를 헐떡이게 한 이유였다.


열두 살 차이가 나는 여자의 몸은 부드럽고도 탱글거렸다.

물론 여자애 역시 내 몸이 단단해 좋다는 듯 힘껏 껴안고 또 여기저길 지분거렸다.

처음에는 지금껏 익힌 경험과 테크닉을 사용해 여자애를 공략했지만

여자의 성욕이란 발기가 없는 만큼 그야말로 끝이 없어서

마지막엔 이 친구가 원한 대로, 침대에 누워 깔린 채 신음을 내뱉는 신세가 되었다.


그제서야 그녀, 아니 나는 좋다는 듯 황홀한 얼굴을 지었다.

여자 밑에 깔려 허덕였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되려 나인 만큼 정복감을 느끼는 포인트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니.

우리는 서로 무릎을 꿇고 자세를 바꾸어가며 성기를 빨아댔다. 둘 다 69는 싫어했으니까.

또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는 시선을 교환하며, 서로 '정상위'를 차례차례 나누었다.


둘 다 다리가 후들거리게 되어 

모텔을 나온 것은 몇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해는 아직 지기 직전이었다.


양복과 교복, 둘 다 넥타이를 맨 차림.

누가 보았으면 한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붙어 있었지만

어둑어둑해지는 해를 보자 

우리는 정말 끝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동시에 서로 몸을 떼었다.

여자애는 만족한 얼굴을 하고

부드러운 윗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긁으며 부끄러워했다.

사랑과 허세, 만족과 아쉬움이 섞인 얼굴. 

첫경험을 한 남자가 여자 앞에서 보일 법한 모습이랄까.


"음- 같은 세상이었으면 사귀고 싶다든가, 이런 말은 안 할게. 오래 못 가는 거 알잖아."

"...둘 다 연하 취향이니까?"


여자애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키득거렸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나 역시도 피식 웃었으니.


나는 친한 친구와 헤어지듯 마지막으로 포옹하고 손을 흔들었다.

교차로에서 보이지 않게 될 때가 되자

나는 도로 교차로를 향해 뛰어갔다.


그렇지만 여자애가 자리를 비운 방향의 거리는 

이미 2020년대의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마 그 여자애는 자기 시간의 풍경을 보고 있겠지.



나는 교차로 한가운데 서서 


마지막으로 허공에 미소를 지어보이고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피곤한 하루였으니까.






원룸에 들어와 거울을 보며 옷을 하나둘 정리했다.

오전에 면접을 보느라 입은 정장이 

다시금 현실의 무게로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취업에 지친 내가 백일몽을 꾼 것은 아닐까.

바쁜 일상에 다시 예전처럼 스트레스에 정신이 나가 헛것을 본 건 아닐까.

그렇지만 나는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미소를 지었다.




아침에 맨 정장 넥타이는, 학생들이 쓰는 자동 넥타이로 바뀌어 있었다.







여고생 도플갱어를 만나다 END 








후기

*단편으로 쓰려 했는데 마음에 드는 소재라 하루종일 걸림. 한 번쯤 꼭 쓰고 싶었는데 만족스럽다. 대회를 열어준 주최자에게 감사함

**말줄임표(...)와 대시(-)에 주의하며 다시 읽어보면 재미있을 것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