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귀족 집안의 후예인 장Jean은

한밤중에 들리는 무선통신기의 소리에 잠을 깼다.

요란하게 울리는 점(.)과 대시(-)의 연속은 사람 마음을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그것이 나치 독일군,

특히 자기 부모님의 성을 무단으로 점거한 사람들의 것이라면 더했다.


조국이 단 6주만에 파시스트들에게 굴복하고 나서,  

국경지대에 있던 장의 마을은 나치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이른바 나치 점령하 프랑스Nazi occupied France, 

혹은 비시 프랑스Vichy France란 이름으로 괴뢰국 아닌 괴뢰국이 세워졌다.


독일군을 접대하게 되는 것은 귀족의 몫이었다.

비록 나치의 폭격에 그 부모님이 돌아가셨을지라도.


아니, 부모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가 유일하게 남은 혈족이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은, 사람들을 지키고 떳떳하게 행동하는 것이 의무라고 귀에 못이 박히듯 가르쳤다.


그러므로 장은 남자의 몸으로 독일군을 접대하고, 편의를 봐주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마을 청년들을 어떻게 괴롭힐지는 불 보듯 뻔했으므로.

보일 듯 보이지 않게 행패를 부리고, 순진한 남자들을 능욕하고

조국의 남자들을 잡아 노리갯감으로 삼을 것이었다.


마을이 짓밟히는 대신, 그는 군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자신의 성을 독일군의 기지로 내주었다.


가족의 와인 저장고는 탄약고로,

응접실은 지휘통제소로,

서고는 서류보관소로 변했다.


나치 군복을 입은 병사와 장교들은 

홀로 남은 장을 색욕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돌봐줄 여자가 없는 그는 실제로 연약한 먹잇감이었다. 

오로지 옛 시대의 귀족이란 의무와 부모에 대한 감정만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나치 장교들이 성을 제집처럼 지나든 지 반 년이 지난 때였다.

시끄러운 부호 소리에 잠을 설친 그는 물을 마시러 내려왔고

때마침 커다란 가슴을 한 장교와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무슈 장Monsieur Jean."


말한 것은 금발의 미녀로 독일 친위대의 군인이었다.

이름은 헬가 리첼Ritschel. 저 독일의 선전장관 마그다 리첼의 먼 친척이고

그녀의 남편인 요제프와도 친분을 두텁게 유지하는 고위직이었다.


호색하기로 유명한 선전장관의 친척인 만큼

그녀 역시도 장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색욕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가 당장이라도 장을 덮지지 않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염치와 체면에 달린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대령...상급대령Oberführer님."


장은 발음이 서툰 독일어로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어차피 독 안에 든 쥐, 아니 고양이 손 안에 든 쥐나 다름없는 신세였으니.


"무슨 일로 이 밤에?"

"잠을 설쳐서요." 

"이런.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그러나 헬가는 제 것이라도 되는 양 당번병에게 커피를 타오게 했다.

물론 그 커피는 성의 창고에 있던 것이었다.


"산책이라도 하실까요?"

"아니요, 괜찮습-"

"마침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금발을 쓸어내렸다.

어차피 아니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헬가가 허리에 루거 권총을 차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친위대의 상급대령 제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은 피곤한 얼굴로 그녀를 따라갔다.

그러나 그녀는 성의 정원으로 나가는 대신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갈 뿐이었다.


텅 빈 와인창고에 들어서자 그녀는 나무로 된 문을 꼭 닫았다.

파란 눈동자는 야간 근무로 인한 피로와-


성욕으로 희번득거리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장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남자로서의 본능은, 앞으로 어떤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갈지 쉽사리 예측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헬가였다.


"다름이 아니라- 일종의 징발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장은 포기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더 가져가실 재산이 있으신가요."

"그럼요. 제국Reich은 전쟁 수행을 위해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아주 많은 노력을요."


유들유들한 말투.

그러면서 자연스레 다시금 이마를 쓰다듬어 금발을 정리하고, 모자를 쓰는 것을 보자

장은 가슴이 설움으로 복받치는 것을 느꼈다.


"이미 필요하신 것은 전부 가져가시지 않았나요."

"그럴 리가요."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는 대신, 장은 텅텅 빈 와인 창고를 가리키며 욱 하고 내뱉었다.


"처음엔 연회를 위한 와인을 조금 요구하셨죠."

"그랬지요."

"공군원수께 선물할 것이라고 남김없이 털어가셨고요."

"마음에 들어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병사들을 위해 이 성을 통째로 빌리셨지요. 단돈 몇십 프랑에."

"마르크입니다."

"와인창고에, 식량창고에, 서고까지 통째로 빈 다음엔 가구까지 전부 트럭으로 날라 없어졌습니다."

"오래되어서 값나가는 가구들이었으니까요."

"이제 성은 껍데기만 있고 제 재산은 몸뚱이밖에 남지 않았는데, 대체 무엇을 원하신다는 건가요."

"바로 그겁니다."


헬가는 입맛을 다시듯 입술을 핥았다.

장은 발바닥에 떨어진 심장이 멎는 것을 느꼈다.


"지, 지금 뭐라고-"


헬가는 뚜벅뚜벅 걸음을 앞으로 내밀었다.

장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등 뒤에는 창고 돌벽의 냉기가 느껴졌다.


헬가는 손가락을 뻗어 장의 목에 갖다대고 


스르르륵,


쇄골에 닿을 때까지 내렸다.


"음...예의바르게 말씀드리자면, 민간인으로서 특정한 용역을 제공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면 서비스, 라고 할까요."


힘주어 말하자 장은 눈앞이 핑핑 돌고 숨이 헉 멎는 것을 느꼈다.

이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했지만, 이런 형태가 될 줄은 상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귀족답게 행동했다.


"...거절합니다. 그럴 권리가 없으십니다."

"아니요. 있습니다. 합법적인 징발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읍!"


헬가는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장의 입을 막고 있었다.


"아가리 조심해. 찢어지기 전에."


나치란 그런 식이었다.

겉으로는 그럴싸하고 예의를 차리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장 속내를 내보이는.

그렇다가도 또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부남자夫男子를 희롱하는 족속.


장은 눈물에 찬 눈으로 고개를 휘저었고

그제서야 헬가는 손을 놓아주었다.

제일 위 단추를 벗기면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이러셔야만 하...나요."


그의 질문에, 헬가는 이가 드러나도록 씨익 웃어보였다.


"물론 이러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다만?"

"마을에서 다른 남자를 구하면 그만이니까요. 제 몫으로 하나, 병사들 몫으로 여럿, 장교들에게는 한 사람당 하나씩.

작은 마을이니 미혼남도 기혼남도 가리지 않겠군요."


이가 뿌드득 하고 갈리는 소리가 창고에 울렸다 금방 사라졌다.

귀족 공자로서 예의바르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강간당하기 전 상황에 적합한 예법은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냥감이 마음에 든다는 듯 목덜미를 한 차례 핥았다. 

그 혀가 마치 맹견의 그것처럼 느껴져, 그는 설움과 슬픔에 몸부림쳤다.


"싫어....요."


공허한 말만이 다시금 휘몰아쳤다.


"지금 상황을 이해 못 하는 모양인데."


헬가는 이미 모자와 윗도리를 벗어 한구석에 접어둔 상태였다.

군용 브래지어 밑에는 탐욕만큼이나 커다란 가슴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장의 턱을 거칠게 붙잡아 눈을 마주치게 했다.


"강간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싶진 않겠지. 

그러잖아도 독일 여자들을 성에 들여놨다고, 인식이 좋진 않을 텐데."


그는 온 몸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능욕당했다는 소문을 덮기 위해 능욕당해야 하는 운명이란. 

신이 있다면 고약한 아이러니를 즐기는 자일 것이라고, 그는 눈물을 흘렸다.


"좋잖아? 오라버니 좋고 처남 좋고. 바깥에서는 대접해주고, 밤에는 네가 날 대접해주고."


그 말에는 손톱만큼의 예의도 들어있지 않았다.


"...언젠가 댓가를 치를 날이 올 겁니다. 반드시."

"아니. 무섭지 않아."


그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독일군은 강대했다. 유럽 제일이라는 프랑스를 단 6주만에 꺾을 만큼.

전 세계가 독일군은 무적이라고 알고 있었다.

두 달 전 소련에 쳐들어간 나치는 백수십만 명이 넘는 포로를 붙잡았고

전 세계의 누구나 소련의 멸망은 몇 달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는 그들이 언젠가 끝을 맞이할 것이라고 믿었다.

어쩌면 착각이나 희망일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부모님은 인간을 억압하는 체제란 오래 가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장은 그녀를 끝까지 밀어냈다.

그러나 그의 힘은 그녀의 욕망을 밀어내기에 부족했고

그녀는 아직 앳된 나이의 남자, 그것도 제대로 된 진짜 귀족의 핏줄을 범할 생각에 

꽤나 크게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결국 저항을 꺾고서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해."



텅 빈 창고에서는 이를 악문 교성과 신음소리만이 울려퍼졌지만

그 소리는 문지방을 넘어가지 못했다.






정확히 3년이 지난 1944년, 프랑스는 해방되었다.


장은 나치에게 숙소를 제공한 대독 협력 혐의로 삭발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941년 8월, 프랑스, 성Chateau. END.






후기

*예전에 AI랑 이야기한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함. 

**마그다 리첼은 마그다 괴벨스의 결혼 전 성性.

***프랑스가 해방된 후 약 2만 명의 프랑스 여성들이 독일 남성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죄목으로 삭발당한 후 조리돌림당함. 



읽어줘서 고맙다!